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예수님

수많은 작가가 조각이나 그림, 그리고 글들을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다. 카라바지오Caravaggio(1571~1610년)라고 부르기도 하는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도 그 장면을 “Deposizione(영어 deposition)”라는 제목으로 그렸는데, 우리 말에서는 간혹 원제목과는 맞지 않게 ‘그리스도의 매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 성금요일에 자주 회자하면서 카라바지오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지는 작품은 바티칸이 소장하고 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파스카 성야(2022 교황님 강론)

많은 작가들이 별이 빛나는 밤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밤은 죽음을 예고하는 빛으로 가득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밤에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의 인도를 따라 우리 세상의 어두움 안에 하느님 생명의 빛줄기가 처음 비치던 때를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밤의 그림자가 걷히면서 조용히 빛이 비쳐오기 전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발라 드리려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여인들은 당황스러운 체험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파스카 성야 ‘다’해(루카 24,1-12)

‘성야聖夜’는 밤샘이고 깨어 기다림이며 깨어 지킴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큰 축일의 전야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열망으로 밤을 지새웠다. 유다인들의 파스카(과월절)는 이집트에서 주님의 천사가 그냥 지나가시고 통과하심으로 이집트인들의 맏배만 죽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남을 기념하였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날에 주로 새 입교자들의 세례식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매 주일

주님 수난 성 금요일 ‘다’해(요한 18,1-19,42)

어제 성삼일의 시작인 성 목요일에는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대로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고 성체성사의 표징과 이에 대한 해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당신 아버지께 드리고자 의도하신 대답이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의 “감사”(εὐχαριστήσας, eukaristésas, 마르 14,23 마태 26,27 루카 22,17.19 1코린 11,24)와 “찬미”(εὐλογήσας, euloghésas, 마르

호산나!

“호산나(ὡσαννά)”라는 말은 우리말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만 6번(마태 21,9;21,15 마르 11,9.10 요한 12,13) 등장하는데, 루카복음에는 보이지 않는 말이다. 모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군중이 환호하며 외치는 말이다.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הושע נא(Hosha na) 혹은 הושענא(Hoshana)라는 말로서 “아,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아, 주님, 번영을 베푸소서.”(시편 118/117,25 *참고. “주여, 우리를 살려 주소서, 아아 주여, 우리를 잘살게 해 주소서.”-최민순 역)라는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다’해(요한 13,1-15)

매년 성 목요일마다 우리는 이 복음 대목을 읽습니다.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해방절 파스카 잔치 식사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이상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외출에서 돌아오는 주인의 발을 대문간에서 노예들이 씻어 주던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와닿는 그러한 행동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긴 배반자의 발도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다’해(1코린 11,23-26)

통상 주님 만찬을 기리는 성 목요일 전례에서는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예수님의 동작과 말씀은 없으나 성체성사의 본질을 밝혀주는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존중하여 전통적으로 제4복음서의 대목을 듣는다.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성경의 근거들은 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코린 11,23-26 총 4부분이다.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의 내용을 해설할 기회는 다른 때도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1코린 11,23-26)에

신애론(6)

제10장 사랑이 지향하고 나아가는 일치는 영신적인 것이다 하여간 일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사성이나 혈족관계의 일치 같은 자연적인 일치도 있고, 원인과 결과에서 나오는 일치도 있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일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 의지적意志的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 일치가 비록 자연 본성을 따라 생기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일치는 우리의

다칠 상傷, 근심할 상慯

‘다칠 상傷’은 몸에 난 상처를, 그리고 ‘근심할 상慯’은 ‘마음 심忄’을 옆에 붙여 마음에 난 상처를 일컫는다. ‘상처’나 ‘다치다’라는 뜻을 표현하는 ‘다칠 상傷’이라는 글자를 풀어헤치면 ‘사람 인人’ 더하기 ‘화살 시矢’ 더하기 ‘볕 양昜’이다. ‘傷’의 오른쪽 위에 있는 모양새는 화살을 뜻하는 ‘矢’가 변형된 것이다. ‘쉬울 이’라고도 읽는 ‘볕 양昜’이라는 글자는 제단 위를 비추는 태양(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구름

「‘구름’은 신비 속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 그분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분을 숨기는 것이다. 사도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감추는 사도행전의 그 구름은(참조. 사도 1,9), 히브리인들을 사막에서 인도한 구름이요, 계약궤 위에 머무른 구름, 예수님의 세례 때 아버지의 음성을 들려주었던 구름, 타볼산에서의 변모의 구름, 역사의 마지막에 산 자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그리스도가 타고 오실 구름이다. 성경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