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지난 2월 11일 연중 제6주일을 지낸 후 사순 시기에 이어지는 부활 시기의 정점으로서 지난주 부활하신 주님의 힘과 능력이 절정을 이루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끝으로 부활 시기를 마쳤다. 연중 시기에 들어서 셈인데, 다시 돌아온 연중 시기의 첫 주일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주일에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라틴 전례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고 이어서 다음 주에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6월 9일에야 연중 제10주일로 돌아간다. 이는 연중 시기의 끝에 올 ‘다’ 해의 대림 시기를 고려하여 연중 제34주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 이어진다. 교회가 부활 시기의 끝이자 연중 시기로의 전환 시점에 가톨릭 신앙의 두 중대한 축일을 배치하는 것은 사뭇 의미가 깊다. 오늘 복음은 ‘가’해의 주님 승천 대축일 복음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로마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요한 22세 교황(1244~1334년) 때였다. 어떤 의미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성탄, 공현,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신비들의 종합과도 같다. 교회는 오늘 전례의 고유 감사송 안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하나의 위격으로 한 분이 아니시고 한 본체로 삼위일체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라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노래한다.
오늘 교회는 살아계시며 참되신 우리 하느님의 신비, 교리와 교의로 선포된 신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겸손하게 거행하도록 요청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는 이 호칭은 사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밤낮으로 외치던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확인하면서, 우리 인간이 되어 오신 아드님의 오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의 친교를 거행하기 위한 호칭이다. 삼위일체는 유일하신 하느님의 삶, “사랑(아가페, ἀγάπη)이신 하느님”(1요한 4,8.16)의 교향곡이다.
그러나 어떤 사상 체계나 형식도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느님”(요한 1,18 1요한 4,12)을 드러내기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 인성을 취하시고 여느 인간들처럼 죽으셨다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아드님 예수께서 계신다는 사실 그대로를 믿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때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제는 “길”(요한 14,6)이신 예수님,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으며, 우리의 역사 안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 갈 “길”이 없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시기에 이어지는 연중 시기에 선포해야 할 내용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드님 예수님의 육화로 하느님께서 떼려야 뗄 수 없이 인간성에 하나가 되셨고,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에페 4,10)에 의해 인간성이 변화되었으니, 이 모두가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이다.
1.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거행하기 위해 ‘나’해 교회의 전례는 마태오복음의 마지막 결론 부분을 제안한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마태 28,16)이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갔다가”(마태 28,1)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주님께서 “평안하냐?(히브리어-샬롬, שָׁלוֹם)”(마태 28,9)라고 메시아로서 평안을 물으시는 말씀을 듣는다. 반갑고 놀라워 어쩔 줄 모르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셨다. 이에 여인들의 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의 측근들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
배반자 유다가 빠져 열하나가 된 사도들의 공동체가 갈릴래아로 돌아간다. 그들은 거룩한 성도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예수님의 설교가 시작했던 곳(참조. 마태 4,12-17)으로 돌아간다. 제자들은 이방인들의 지역, 변방, 유다인과 비유다인이 섞여 사는 곳, 사람들이 넘나드는 곳…그곳으로 돌아가 바오로 사도께서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한 대로 동서고금 남녀노소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불렸음을 증언하기 위해 갈릴래아로 간다.
제자들은 더는 혈연이나 언어, 문화라는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공동체, 가까운 이도 없고 먼 이도 없는 공동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만으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갈릴래아로 간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너희들 작은 양 떼야!”(루카 12,32)라고 부르셨던 작은 공동체, 양 우리에 갇히지 않은 공동체, 이리 떼 가운데일지라도 기꺼이 다른 이들 안에 함께 이고자 하는 공동체, 두려움이 없는 공동체, 열한 명의 공동체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가는 길목에 들어선다. 거창한 일도 아니었고, 열한 명의 제자들이 특별히 비상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인생의 극히 부분적인 내용만 알려지거나 어떤 경우에는 이름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는 이들, 가난한 이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주시는 위대한 사명과 예수님에 대해서마저도 “더러는 의심”(마태 28,17)하고 믿지 못하던 이들이었다.
여인들의 말을 전해 들은 제자들은 갈릴래아의 “산”으로 간다. 하느님의 뜻이 계시되는 새로운 “느보”(참조. 신명 32,49;34,1) 산으로 간다. “산”은 예수님께서 진복팔단과 산상설교(참조. 마태 5,1-7,29)가 이루어진 곳, 성부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이루어진 곳(참조. 마태 17,1-8), 바로 그곳에서 이제 열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뜻과 말씀을 듣는다. “산”에 다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8,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이 시작할 무렵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마태 26,56)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보시고, 이제 당신 발 앞에 엎드려 당신을 경배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다. 인간으로서 누군가 다른 이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몸짓을 하는 제자들을 보신다.
2.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라는 구절을 덧붙인다. 아직도 제자들 안에 의심은 남아있고, 그 의심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도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의심은 사랑으로 초월하는 것이고, 사랑은 의심을 이긴다. 의심과 그 의심을 넘어가는 믿음의 초월, 의심과 그 의심을 극복하는 사랑,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 안에 살아가야 하는 역동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사례는 루카 24,37-38 요한 20,24-27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부활에 대한 의심은 결국 미움과 불의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승리를 믿지 못하고 억압과 죽음에 대한 자유와 생명의 승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전도하면서 그 의심을 극복해 갈 것이다. 사랑은 의심을 이긴다.
연약한 죄인들의 교회, 의심에 찬 교회, 그러나 주님을 알아 모시고 경배할 줄 아는 교회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마태 28,18)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신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당당한 승리에 찬 조직이 아니라, 하염없이 가난한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하고 주님께 사랑을 담아 말씀드릴 줄 아는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열둘 모두가 오지는 못했습니다. 실패한 이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당신과 함께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수난 앞에서 저희는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신께서 저희를 부르시자마자 돌아왔습니다. 여기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감히 당신께 경배를 드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주님! “마라나 타!(‘저희의 주님, 오십시오’를 뜻하는 아람 말)”(1코린 16,22 참조. 묵시 22,20)』라고 기도한다.
3. “너희는 가서…언제나 너희와 함께”
이렇게 말하는 듯싶은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신다. 모든 민족이 복음의 학교에서 배우게 하라 하시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신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유일하게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고 죄를 씻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라 하신다. 마태오는 자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시로 아버지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를 계시하였고, 성령을 약속(참조. 마태 10,20)하셨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신학적인 종합으로 삼위일체를 힘주어 강조하면서 세례를 기록한다.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뿌리를 두었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태어났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하신다. 유혹의 산에서 악마가 세상 모든 나라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하였을 때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신 분께서 이제 산 위에서 그 모든 통치권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라고 선언하신다. 세상 그 어떤 권세도 예수님의 다스림과 견줄 바가 못 된다. “사람의 아들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한 그대로, 하느님에게서 받은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다스림은 당신의 종들에게 오직 사랑이라는 “새 계명”(요한 13,34;15,12)을 지킬 것만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다스림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시는 다스림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참조. 이사 7,14 마태 1,23)의 다스림이다. 언제나,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다스림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다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하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신다. 그리스도교의 권위는 순종에서 나온다. 우리도 권위 안에 순종을 살고 순종 안에 권위를 살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끝까지”(요한 13,1)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에서 나온 예수님의 권위이다.
오늘 복음의 끝 구절이자 마태오복음의 끝 구절은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로 끝난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마태 18,20)”로 약속하셨다. 옛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와 함께 계시겠다는 현존 약속이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원래 이름이 “임마누엘(Ἐμμανουήλ, Emmanuel=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마태 1,23)이시라는 것이 밝혀진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와 함께 계실 것이니 이제 감히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예수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이사 6,3) 하고 세 번 거룩하심을 칭송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오늘날까지도 매일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실감하고 체험한다. “세상 끝날까지”라 하시는데, 이는 현재의 이 (세대) 세상과 다가올 (세대) 세상 사이에 지켜질 예수님의 약속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세 번 거룩하신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이신 하느님, 우리와 함께이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세상 길을 동행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친교, 삼위의 친교가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집이다.
『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께서 (단순히) 당신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요,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분이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며,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에 관심을 가지시고, 가장 보잘것없고 곤경에 처한 이들로부터 시작해 우리 각자를 돌보시는 분으로 계시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분께서는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신명 4,39)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관심한 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어 한 민족을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그분의) 사랑을 믿습니다. (또한) 어떻게 성령께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고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지를 믿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삼종기도, 성 베드로 광장, 2018년 5월 27일)』
성부께서는 사랑하시는 분, 성자께서는 사랑받으시는 분,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그 사랑의 일부가 되게 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