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할 묵默’은 ‘묵黙’과 같은 글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음音을 나타내는 ‘검을 흑黑’과 ‘개 견犬’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개(개 견犬)가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인데, 어두운 밤(검을 흑黑)에 검정 개가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대충 이해가 간다. 그래서 생겨난 ‘잠잠할/묵묵할 묵默’은 말 없는 묵묵부답默默不答이다. 어쩌면 인생은 깜깜한 밤에 깜깜한 방에서 깜깜한 색깔의 고양이를 잡느라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떤 이는 가끔 그 고양이 꼬리라도 살짝 스쳐 건드려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묵默’이라는 글자의 왼편인 ‘검을 흑黑’은 아궁이처럼 벌어진 아래에서 불을 때고 그 위 굴뚝이나 창문 같은 구멍에서 연기가 빠져나가는 주변에 그을음이 시커멓게 묻은 모습이다. ‘검을 흑黑’ 밑에 ‘흙 토土’를 붙이면 숯검정과 흙으로 글씨를 쓰기 위해 만든 먹을 가리키는 ‘먹 묵墨’이 되는데, 얼굴과 온몸에 숯으로 검게 칠해서 죄인을 벌하는 묵형墨刑 역시 검은 재와 같은 것을 흙에 이겨 사람에게 칠하는 것이다. ‘검을 흑黑’은 숯이나 검댕이, 검은색, 나쁘다거나 어두운 것을 넘어 은밀함으로까지 번지는 부정적인 이미지, 점이나 주근깨, 잠잠함으로까지 나아간다. ‘검을 흑黑’ 왼편에 ‘입 구口’를 붙이면 ‘입을 다물다’라는 뜻이 되어 ‘잠잠할 묵默’과 거의 같은 ‘고요할 묵嘿’이 된다. 그래서 ‘묵默’은 ‘묵嘿’이다. 개도 가만히 있고 세상의 온갖 입들도 다물고 있다.
앙심이나 두려움을 담고 입을 꽉 다물어 자기를 감추거나 수행修行을 빙자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수도修道 정진精進하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글자 하나를 꼽으라면 ‘묵默’이라고 성현들은 누누이 말한다. 그래서 이 ‘묵默’과 조합하여 만들어진 침묵沈默, 묵인默認, 묵념默念, 묵도默禱, 묵묵默默, 묵상默想, 묵비黙秘, 묵시默示, 묵살默殺 같은 말들은 무게감을 지닌다. 범부凡夫는 감히 삶이 죽음이고, 움직임이 머무름이며, 참이 거짓이고, 빛이 어둠이며, ‘잠잠할 묵默’이 ‘말씀 설說’임을 분간하지 못한다. ‘묵默’은 말이 없어도 말이 있는 것이고, 말이 있어도 조용함이다. 그저 말 없는 웃음이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이 (말 없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음”(요한 1,14)을 믿는다. “비어 있었다”(창세 1,2)는 선언으로 시작한 성경은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 한다. 그리스도교는 ‘묵默’으로 말하며, ‘묵默’으로 사람이고자 하고, ‘묵默’으로 하느님이고자 하며, ‘묵默’으로 생명이고자 한다. 그렇게 그리스도교의 ‘묵默’은 깊고 넓다. 그리스도교는 ‘묵默’이라는 글자 하나에 죽음과 생명을 담았다.(20171114 )
다른 사람과 바른 대화를 위해 또 정확한 소통을 위에 어려서 부터 쓰고 말하는 공부를 하지만, 의도대로 대화가 되고 소통이 되지는 않을 때가 많이 있다. 그 와중에도 오랜 친분이나 관계안에 설명과 대화 없이도 곧 잘 마음이 통하는 좋은 느낌을 같는 관계도 있다. 내 안에 하느님과의 관계가, 타인들이 보기에는 고요함으로 보여지겠지만, 개개인과 하느님의 관계는 색다른 삶과 생동감의 관계이지 싶다. 결국 하느님과 각자의 관계에서 ‘평화’ 라는 특별한 선물은 똑 같이 갖는구나 생각해 보게 한다.
다른 사람과 바른 대화를 위해 또 정확한 소통을 위에 어려서 부터 쓰고 말하는 공부를 하지만, 의도대로 대화가 되고 소통이 되지는 않을 때가 많이 있다. 그 와중에도 오랜 친분이나 관계안에 설명과 대화 없이도 곧 잘 마음이 통하는 좋은 느낌을 같는 관계도 있다. 내 안에 하느님과의 관계가, 타인들이 보기에는 고요함으로 보여지겠지만, 개개인과 하느님의 관계는 색다른 삶과 생동감의 관계이지 싶다. 결국 하느님과 각자의 관계에서 ‘평화’ 라는 특별한 선물은 똑 같이 갖는구나 생각해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