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마감하실 무렵, 제자들과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지낼 때이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제는) 그 길을 알고 있다” 하시는데, 토마스는 “어떻게 저희가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한다. 한술 더 떠서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수님께서는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뵌 것”이라 답하신다.(요한 14,1-12)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은 해를 거듭하여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길”을 묻고, 예수님이 길이시며 메시아요 하느님이심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과연 진리로 가는 길, 생명으로 가는 길, 길 자체이시다.
인생길을 바르게 걷느라 너무도 지치고 힘든 이들도 많지만, 대부분 사람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세상길을 걸으면서 세욕世慾에 찌든 나머지 탐욕에 발이 붓고 병들어 온전히 걷지 못한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모시지 못한다.
예수님, 그리고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하나같이 “벌떡 일어나” 온전히 걷게 된 이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 모신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만난 눈먼 거지는 “그를 불러오너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그리고 “곧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52)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서 만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니 일어나 걸으시오” 하며 베드로 사도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사도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사도 3,1-10) 바오로 사도가 전도 여행 중 리스트라라는 곳에서 만난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알아본 바오로 사도가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자,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사도 14,8-10)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의 이름만으로도 주어지는 명령, 사도가 알아본 믿음에 아무리 병든 이들이라도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온전히 걷는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 모셔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이 곧 “길”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신다.(요한 14,1-12)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믿다’ ‘보다’ ‘알다’는 모두 한 단어이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은 지적인 깨우침이 아니라 점점 깊어지는 앎, 사랑의 앎이며, 은총으로 얻는 통찰의 앎이다. 그 앎은 관계를 통하여, 들음을 통하여, 애정을 통하여, 함께 사는 삶을 통하여, 그리고 몸으로 사는 사랑을 통하여 온다. 예수님을 믿고, 보고, 아는 이들은 마침내 “벌떡 일어나” 걷는다. 생명을 얻는다. 우리 모두가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 이, 예수님을 보는 이, 예수님을 아는 이, 그래서 구원을 얻는 이가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해야 한다. 아멘!(*이미지-구글)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의 길을 아는 것!!!
그 앎으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신앙의 신비가 아닐까요?
행복한 주일되세요. ~*~
‘벌떡 일어나’ 구원의 길을 걸을 힘을 청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