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見’이라는 글자는 ‘견’이나 ‘현’으로 음이 나는 글자이다. ‘눈 목目’ 밑에 ‘사람 인人’을 붙여 사람의 눈이 하는 일을 나타낸다. 나중에 이쪽으로부터 보는 것을 ‘볼 시視’, 저쪽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보이는 것을 ‘볼 견見’으로 나누어 쓰면서 ‘보다’와 ‘보이다’가 갈린다.
‘눈 목目’이 들어가 ‘보다’라는 새김을 하는 글자들은 참 많다. 앞서 말한 ‘볼 견見’과 ‘볼 시視’ 말고도, ‘관찰하다’ 할 때의 자세히 보는 ‘볼 관觀’, ‘간주하다-눈 위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보다’ 할 때의 ‘볼 간看’,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다’ 할 때의 ‘볼 정盯’, ‘노려보다’ 할 때의 ‘볼 고䀦’, ‘쳐다보다’ 할 때의 ‘볼 천䀖’, ‘좌고우면’으로 알려져 ‘곁눈질하다’ 할 때의 ‘곁눈질할 면眄’, ‘우러러보다, 바라보다’ 할 때의 ‘볼(바랄) 망望(=‘쳐다볼 망盳’과 통한다)’ 등등. 한자의 ‘보다’가 이렇게 여럿인 것처럼 서양 말에도 다양한 ‘보다’가 있다. see(보다), look(일부러 보다), gaze(오랫동안 보다), stare(빤히 보다), behold(바라보다), glare(째려보다, 쌍심지를 켜고 보다), peer(자세히 들여다보다), watch(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다), view(작품을 감상하듯이 보다), peek(재빨리 훔쳐보다, 엿보다), peep(뚫어진 구멍 같은 것을 통해 몰래 보다) 등등. ‘보다’를 묘사하는 말들은 이처럼 인간이 인식하는 가짓수나 사물의 현상,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만큼이나 많다.
눈만 뜨면 가만히 있어도 보이는 세상 것들은 하나같이 나를 좀 보아달라고 아우성을 치듯 내 눈을 잡아끌기에 여념이 없고, 끊임없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볼 것 천지인데도 사람들은 막상 무엇인가를 마주 보는 데에 두렵다. 그런가 하면 깊게 보지 못한 나머지 신경질적으로 체험해보라 하고, 만져보라 하고, 느껴보라 하면서, 다른 ‘봄’을 강요한다. 그러다가는 ‘보고 싶다 보다 더욱 간절한 것은 침묵이다’라는 말을 만들고 그에 취한다.
무엇인가를 유심히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경우(시이불견視而不見/시이불시視而不視)가 있는가 하면, 설령 보았어도 못 본 체하는 경우(시약불견視若不見)도 있다. 감추는 것은 더 잘 드러나고, 숨기는 것은 더 잘 드러난다. ‘막현호은莫見乎隱’이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눈을 떠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도로 눈을 감고, 보지 않고 다녔던 그대로 가야만 제대로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종종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안으로 살펴보아야(시호명명視乎冥冥) 한다. 그래야 보인다. 어두운 곳에서 보지 못하면 눈뜬장님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 수신修身)’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혜안慧眼이며 영안靈眼이다. 그것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옛사람이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유한준兪漢雋, 1732∼1811년, 당대의 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이라는 사람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붙인 발문의 부분)’이라 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본다’ 했다. 알아야 사랑하고, 사랑해야 본다. 그런 의미라면 알아야만 보고 보인다.
요한복음은 “와서 보라!”(요한 1,46) 하며 ‘보라’는 초대로 시작하고 마침내 “(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 하며 ‘믿다’라는 말로 끝난다. 성경에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보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자 필립보가 “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을 때 “너는 믿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시며 “믿어라” 하신다.(참조. 요한 14,6-11) (20170402 *이미지 출처-하영삼, 한자뿌리읽기-244회,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