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2-14)

제14장
신앙을 통해 받을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감정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은혜를 주실 때에 그는 우리 영혼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정신에게 강연하는 형식이 아니라 영감으로 말씀하시니, 특히 아주 달가운 방법으로 우리의 지성에게 믿을 바를 제시하시면 의지는 여기에서 아주 큰 회열로 받아들여 지성으로 하여금 아무런 의심이나 불신 없이 진리에 동의하고 굴복하게끔 충동시키는데, 여기에 경이적인 사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영혼에다 신앙의 신비는 제시하여 주시는 데 있어서, 희미하고 어두운 가운데 제시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겨우 흘깃 엿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표면이 때때로 안개에 덮이므로 우리가 태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만 태양이 있는 쪽을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는 것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 어느 누군가가 말하듯이, 우리는 실제로 태양을 보지 못하면서도 알아보게 된다. 즉 우리가 한편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본다고 말할 수 없으리만큼 그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까지 못 보게 되는 것은 또한 아닌 것이 사실이며, 더구나, 신앙의 이러한 어두운 빛이 이성의 추리력에나 또는 논증의 성립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 신앙 자체의 감미, 즉 신앙의 현존에서 오는 감미로써 우리의 정신에 들어 왔을 때 모든 확신을 초월하는 확신의 진리가 우리에게 주어질 만큼 그럴듯한 권위로써 우리의 이성을 굴복시켜 믿게끔 하여 우리의 이성을 지성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른 무엇과도 비교하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고 또 지성과 지성의 모든 활동을 지켜 주고 예속시켜 주는 것이다.
나의 하느님! 그리고 테오티모여, 내가 이러한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있으리오? 신앙은 우리 정신의 위대한 벗이다. 또한 신앙에 비겨 훨씬 명증적이고 명확하다고 자랑하는 인간적인 여러 학문에 대하여도 옳게 말할 수 있겠으니, 마치 거룩한 정배가 자기의 짝인 양치는 소녀에게 하던 말과도 같을 것이다. 즉,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아가 1,5) 오, 인간적인 추리여! ‘내 얼굴이 검어진 까닭은 아무런 확증이 없는 단순한 계시의 어두움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니, 이 그늘진 어두움은 나를 거무스레한 여자로 보이게 하며,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여쁘니” 내가 지닌 무한한 확실성 때문이다. 그리고 죽을 인생들의 눈이 본성으로 있는 대로의 나를 살펴본다면 그들은 아름답게만 보리라.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내가 무한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결론될 수는 없어야 하리니, 내가 제대로 보이지도 아니하고 다만 반쯤 보일 뿐인 캄캄한 어두움과 짙은 안개가 나로 하여금 그렇듯이 귀엽게 사랑받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보다도 가장 나를 값있게 하여 주는 영혼이란 것이 모든 다른 지식의 무리를 갈라놓으면서 모두가 나에게 자리를 내게 하며 제 여왕처럼 나를 모시게 하며, 그 궁전의 가장 높은 곳에 나를 모시며, 그곳에서 나는 모든 지식과 학문에 법칙을 주게 되며, 모든 논증과 모든 인간적 의의를 지켜 주지 않는가?
참으로 그렇다. 테오티모여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들도 자기들의 군복을 벗어 모아 왕좌처럼 만들어 예후를 그 위에 앉히며 말하였다. “예후가 왕이로다.(임금을 에워쌌다)”(2열왕 11,11) 이와같이 신앙이 찾아들면 우리의 지능은 모든 추리와 논증을 벗어, 신앙 밑에 두어, 신앙으로 하여금 그 위에 좌정케 하며, 신앙을 자기의 여왕으로 인정하고 또 크나큰 기쁨으로, “신앙 만세!”를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참조. 2열왕 11,12)
그리스도교의 경건한 추리와 논증과 기적과 다른 여러 가지 장점은 그것을 극단적으로 믿을 만하고 알만한 것으로 만들지만, 신앙은, 그 진리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반하게 하며 믿게 하고 마침내는 고백하게 만들고야 만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진리를 믿게 하며, 달가운 방법을 통하여 신앙은 의지에로 쏟아 부어지며, 의지는 그 확실성을 지능에게 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우리 구세주의 여러 가지 기적과 기묘한 교훈을 보고 들었으니, 신앙을 갖게끔 배려되지는 못하였었으니 그것은 그들의 의지가 신앙의 부드러운 감미를 수용할 만큼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 유다인들의 심중에 충만하여 있던 쓰디쓴 마음씨와 악의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에 고집을 부리게 되었다.
그들이 논증의 힘을 깨달은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론의 감미로움을 맛보지는 못하였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 안에서 참됨을 터득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행위는 우리 정신의 이 진정한 터득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진리의 고마운 빛을 받게 되면 달갑게 여겨 받아들이게 되고 더욱이 힘 있고 굳건한 보장과 확신으로 용납하게 되며, 또한 제게 주어진 계시의 권위 속에서 이러한 확실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너는 이미 들었으리라. 공의회에서는 진리에 대하여 추리와 논박과 여러 신학적 논증으로써 굉장한 토론과 탐색이 시도되지만, 문제의 토론이 끝난 후, 교부들, 즉 주교들과 특히 교황은 주교들의 으뜸으로서 결론을 내리고 최종 답안을 찾게 마련인데, 이렇게 해서 일단 결론이 내려져 결정 사항이 반포되고 나면, 각자는 충분히, 아주 온전히 이를 받아들이게 되며 앞서 있었던 토론이나 질문의 이유를 재론함이 없이 결정 반포된 사항에 그대로 순응하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토론과 질문의 이유를 근거로 하여 결정함이 아니라, 성령의 권위의 능력으로 함이니, 성령께서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공의회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판단하고 결정하고 결론을 내리되 당신 종들의 입을 통하여 하시니, 이들을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교회의 목자들로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질의와 논쟁은 박사들에 의하여 사제들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며, 결정과 단안은 지성소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니, 여기서 성령께서는 당신 교회의 몸 전체에 생기를 통해 주시며, 여기서 성령께서는 우리 구세주께서 약속하셨던 대로 당신 교회의 으뜸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도 타조란 놈은 리비아 해변 모래톱에 알을 낳는데, 알을 부화시키는 것은 태양이 혼자 해줄 뿐이다. 즉 타조는 알을 낳아서 내버려 두면 된다. 이와같이 교회의 학자들도 질문과 토론으로써 진리를 제시하지만 의덕의 태양이 비추는 햇살의 저울만이 확실성과 동의를 주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결론지어 말해 본다면, 계시 된 사실과 신앙의 신비 속에서 인간의 이성이 발견해 내는 이 확신이란 지극히 사랑함직한 흐뭇한 감정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인데, 이 만족은 우리의 의지가 제시된 진리의 아름다움과 달가움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므로 신앙은 사랑의 시발점을 내포하는 것이며, 이 사랑이란 곧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사물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