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출신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년)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더욱 엄격하게 따르고자 하는 시토회 수도원장으로 잘 알려졌고, 아름답고 깊이 있는 강론으로 유명하다. 8월 20일에 축일을 지낸다. 성인을 그린 회화에서는 주로 시토회의 하얀 수도복에 수도원장을 뜻하는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발밑에 주교관과 성체, 사슬로 묶은 악마, 하얀 개, 책, 벌통 등과 함께 그려진다. 양봉가·양초제작자·모래채취장·일꾼의 수호성인이다.
성인의 ‘아가서에 관한 강론’, 특별히 아가서 1장 2절에 관한 해설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은 <하느님의 세 번 입맞춤>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함께 읽기: 입맞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https://benjikim.com/?p=13264 신애론(10) https://benjikim.com/?p=14816 신애론(6) https://benjikim.com/?p=1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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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아가 1,2)라는 구절을 해설하는 베르나르도 성인은 여기서 ‘입맞춤’을 하느님과 인간 영혼 간의 깊은 일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 구원사를 펼치시는 과정에서 이 땅에 세 번 입을 맞추셨다고 풀이한다.
하느님의 첫 번째 입맞춤은 하느님이 몸소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통한 입맞춤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이 땅에 입을 맞추시고 인간과 하나가 되셨다. 하느님의 부드럽기 그지없는 사랑의 입맞춤이다.
하느님의 두 번째 입맞춤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신 십자가의 신비를 통한 입맞춤이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제물이 되심으로써 사랑, 용서, 자비, 화해, 구원의 입맞춤을 하신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입맞춤이자 당신 피로 봉인하신 입맞춤이다.
하느님의 세 번째 입맞춤은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의 신비를 통한 입맞춤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심으로써 사랑의 신비로운 일치를 이루시는 입맞춤이다. 인격적이면서도 영적인 입맞춤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하나가 되시고 황홀한 관상의 일치로 우리를 이끄신다.
하느님의 세 번 입맞춤은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그린다.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시고(육화, Incarnation), 우리를 위해 죽으시며(구원, Redemption), 우리 안에서 사시는(성화, Sanctification) 분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합일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외적인 계시로 우리는 내적인 일치로 나아간다.
하느님의 입맞춤으로 이제 우리는 발에 입을 맞추고, 손에 입을 맞추며, 입에 입을 맞추듯 영적인 세 단계 진보의 길을 걷는다.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우리의 회개와 참회로 하느님께서 죄로 얼룩진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심이다. 그렇게 깨끗해진 영혼은 고마운 은인의 손에 입을 맞추듯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덕스러운 삶으로 나아간다. 덕스러운 삶으로 진보한 영혼은 이제 입에 입을 대어 입 맞추듯 우리를 껴안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품에서 녹아들어 황홀한 관상의 삶을 누리게 된다.(※참조. https://catenabible.com/, 인터넷 문서고 https://archive.org/ 베르나르도 성인의 <아가서 해설집 1~43편 Commentary on the Song of Songs By Saint Bernard of Clairv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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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많은 지향과 감정과 정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피조물은 사랑을 통해서만 창조주께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과 같은 정도로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통하여 같은 방법으로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실 때 그 보답으로 사랑만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사랑하실 때 사랑을 받으시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으십니다.
신랑의 사랑은, 즉 사랑이신 신랑은 보답으로 다만 사랑과 성실을 찾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보답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신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 자체께서 사랑받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신부는 자신의 모든 여타의 정을 포기해 버리고 자신의 전 존재로 사랑에게만 헌신합니다. 신부는 보답으로 사랑을 줌으로써 사랑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 안에 자신의 전존재를 쏟아 낸다 해도 이것은 영원한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그 분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자체이신 분, 영혼과 말씀이신 그리스도, 신부와 신랑, 피조물과 창조주, 그리고 목마른 사람과 샘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은 그 풍요성에서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 즉 경주에 있어서 거인과, 단맛에 있어서 꿀과, 온유함에 있어서 어린 양과, 순결에 있어 백합화와, 광채에 있어 태양과,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사랑 자체이신 분과 겨루지 못한다 해서 혼인하는 이의 욕망과 애통하는 이의 갈망과 사랑하는 이의 열정과 간청하는 이의 희망이 사라지고 만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더 작아서 그분보다 덜 사랑한다 해도 힘을 다해 사랑한다면 부족함이 없고 있을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하는 이는 주님과 혼인했습니다. 이 정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혼인이란 양 배우자가 서로 합의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먼저 또 더 위대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8월 20일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 아가서에 대한 강론 Sermo 83,4-6: Opera omnia, Edit. Cisterc. 2[1958], 3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