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토리노라는 도시의 지도를 놓고 보면 거의 정중앙에 자리한 성당이 바로 ‘바실리카 델라 마돈나 콘솔라타Basilica della Madonna Consolata’이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위로의 성모 대성당’ 정도가 된다. 이 성당은 ‘위로의 성모님(Consolatrice)’을 그린 이콘을 모시면서 건립된 성당으로서 5세기 이래 토리노의 긴 역사와 함께한 성모님이 계시는 성당이다.
이 성모님께 비오 10세 교황께서는 1904년 24개의 별로 장식된 교황의 관을 씌워드린 바 있었고,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도 2015년 6월 15일에 이 성모님께 황금 장미를 봉헌한 바 있다. 신학생 시절부터 돈 보스코의 영적 동반자였던 쥬셉페 카파쏘 신부나 콘솔라타 선교 수도회의 창립자인 쥬셉페 알라마노 신부, 성 요셉 수도회의 공동 창립자인 레오나르도 무리알도 신부와 같은 성인들의 묘소들도 이 성당에 있다. 그렇지만 이 성당이 살레시오회에 더욱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성당이 돈 보스코의 삶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성당이며, ‘위로의 성모님’께서 돈 보스코를 늘 동반해주셨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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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보스코는 어른들의 품에 안기거나 어른들을 따라 걷던 어린 꼬마 시절부터 이미 고향 베키 외곽 기둥 위에 모신 ‘위로의 성모님’ 조각상을 자주 만났으며, 어려운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던 중 가까스로 미래의 터전이 될 피나르디씨의 헛간을 얻게 되었을 때 그곳에 27리라를 주고 위로의 성모님 상을 사서 경당에 모셨다. 살레시오회의 유물이 된 그 성모님은 오늘날도 발도코의 피나르디 경당에서 만날 수 있다.(※참고. 돈 보스코와 성모님의 여러 호칭 https://benjikim.com/?p=14163)
돈 보스코는 청소년 시절 중고등학생으로서,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토리노에 자주 들러야만 했고, 토리노에 들릴 때면 당연히 콘솔라타 성모님께 인사를 드렸다.(MB I, 267-68쪽) 성장하여 사제가 된 돈 보스코는 서품 후 「동정녀 마리아께 당신 아드님에게서 얻어주신 무수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드렸다.(돈 보스코의 회상, 174쪽)」라고 기록한 대로 성모님을 기리며 콘솔라타 성당에서 두 번째 미사를 드렸다. 그뿐만 아니다. 돈 보스코는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마땅한 거처가 없이 소위 ‘유랑’하던 시절에 아이들을 데리고 주로 콘솔라타 성당을 찾곤 했다.(MB II, 248.346쪽)
그 장면을 돈 보스코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침 나절 일정한 시각에 나팔을 불면 젊은이들이 모두 모였다. 나팔 소리가 한 번 더 나면 침묵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할 것인지 알렸다. 우리는 캄파냐의 마돈나, 콘솔라타, 스투피니지 성당이나 상기한 다른 성당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먼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꽤 오래 걸어야 했다.”(돈 보스코의 회상, 232쪽)」 1846~47년 5월 성모성월에는 마침내 안정된 거처를 얻게 해주셨을 때도 위로의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고 아이들이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콘솔라타 성당을 찾아갔다. 당시 동정녀 마리아 오블라티 신부님들이 성당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그곳 신부님들은 기꺼이 아이들을 맞아주셨고 아이들의 고백성사까지도 들어주셨다.(MB II, 430쪽)
이처럼 돈 보스코와 아이들에게 이미 친숙했던 콘솔라타의 성모님은 돈 보스코가 큰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아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돈 보스코를 살려주신 성모님이시다. 돈 보스코는 회상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며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했다. 콘솔라타 성당에서 밤낮으로 번갈아 가며 ‘위로의 성모님’ 성화 앞에서 날 위해 기도했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그 앞에서 기도했다. 아침에 일하러 나가는 소년들은 그들을 대신해서 제단 앞에 머물러 줄 촛불을 켜 놓았다. 밤늦게까지 많은 아이들이 하느님의 어머니께 불쌍한 돈 보스코를 낫게 해주시기를 애원했다.

많은 아이들이 한 달 동안 또는 1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성모님께 했다. 일생 동안 바치겠다고 한 아이들도 있었다. 빵과 물만으로 몇 개월 몇 년, 평생 단식을 하겠다고 약속한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많은 소년 벽돌공들이 몇 주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면서 빵과 물만으로 단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잠시라도 틈만 나면 급히 성체 앞으로 나아갔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의사들이 마지막 밤이라고 진단을 내린 밤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의사들의 말을 믿었다. 완전히 탈진 상태인데다 계속해서 피를 토했기 때문이다. 한밤중이 지났을 때 졸음이 왔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위독한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를 보러 온 보타 의사 선생님과 카파소 신부님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콘솔라타 성모님께 감사드리러 가라고 했다.(돈 보스코의 회상, 276쪽)」
「(1848년부터 1854년까지) 해마다 우리는 콘솔라타 대성당으로 종교 행사를 거행하러 갔다.(돈 보스코의 회상, 302쪽)」라고 돈 보스코가 기록한 대로 돈 보스코와 아이들의 생활에서 위로의 성모님은 늘 곁에 계시는 분이었으며 돈 보스코와 아이들의 성지 방문은 계속되었다. 한 번은 성지의 어떤 미사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달라는 초청을 받고 돈 보스코는 급하게 구성한 아이들 그룹과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들고 성당을 방문하였다. 돈 보스코는 유명한 마에스트로 보도이라Bodoira라는 분을 오르간 연주자로 초청하였는데, 그는 돈 보스코의 악보를 보더니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막상 연주하려 할 때 그 곡을 이해하지도 못하겠다면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던 돈 보스코는 자신이 오르간 앞에 앉아 자신의 악보를 따라 연주했다. 사실 돈 보스코의 악보는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들로 범벅이 된 악보였다. 그러한 악보에 당황하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돈 보스코는 끝까지 연주와 노래를 잘 소화해냄으로써 마지막에는 모든 신자의 열렬한 박수와 찬사를 얻어낼 수 있었다.(MB II, 148쪽)
1856년 11월 25일 어머니 마르게리타를 천상으로 떠나보낸 슬픔 속에서 돈 보스코는 콘솔라타 성당 지하 경당에서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콘솔라타 성모님 상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이제부터는 성모님께서 자신과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시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주셨다.(MB V, 566쪽) 그렇다고 돈 보스코가 특별한 기회에만 콘솔라타 성당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수시로 성당을 방문했던 돈 보스코는 어느 날 미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미사 집전자가 없는 것을 알고, 서둘러 제의를 입고 나가 미사를 드린 적도 있었다.(MB VII, 86쪽)
돈 보스코는 생애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장 끔찍했을 뻔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위로의 성모님 덕분에 이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여겼으며 위로의 성모님께 달려가 감사를 드렸다. 그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늦은 가을이었지만, 일은 빨리 진척되어 머지않아 지붕을 올리게 되었다. 이미 대들보가 제자리에 놓이고 서까래는 못으로 박았으며 기와도 대들보 위에 쌓여 제자리로 옮겨질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는 밤낮으로 쏟아져 대들보와 서까래를 적시고 석고 덩어리, 생석회가 물에 흘러내려 결국엔 벽돌과 물에 씻긴 담만이 남게 되었다.
모든 이들이 잠을 자고 있던 한밤중에 돌연히 굉음이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공포감을 일으켰다. 잠이 깬 소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담요나 홑이불을 움켜쥐고 침실을 뛰쳐나갔다. 혼비백산한 아이들은 절박한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무턱대고 달렸다.
소음과 혼란이 더욱더 거세지면서 지붕의 뼈대와 기와, 벽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와르르 무너졌다. 새 건물은 낮고 낡은 건물에 기대져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무너지는 건물에 깔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전율을 자아내게 하는 몸서리쳐지는 소음 외에는 다친 사람이 없었다. 아침이 되자 시 당국에서 보낸 기사들이 현장을 조사하러 왔다. 가베티 기사는 바닥에서 뽑힌 높은 벽기둥이 한 침실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소리쳤다. “콘솔라타 성모님께 감사하러들 가십시오. 저 벽기둥은 기적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저것이 떨어졌다면 아래 침실에서 자고 있던 돈 보스코와 30명의 소년들이 매장되었을 것입니다.”(*돈 보스코는 피나르디 집 가까이에서 자고 있었다. 그 붕괴는 하나의 섭리였다. 1928년, 여러 공사 중에 오라토리오의 이 첫 집의 벽에 쓰인 자재는 석회가 아주 적고 거의 전부가 자갈과 모르타르로만 된 질이 나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섭리는 발도코의 오라토리오가 모래가 아니라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무너지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탓으로 제일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벽돌과 기와를 쌓는 업자였다. 우리의 피해는 1만 리라였다. 이 사건은 1852년 12월 2일 한밤중에 일어났다. 덮쳐 오는 이러한 슬픈 사건들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의 불행을 덜어 주시는 하느님의 어지신 손길이 있었다. 만일 그 재난이 2시간 전에만 일어났었다 하더라도 야간 학교 학생들은 모조리 묻혀 버렸을 것이다. 학교는 10시에 파했고, 교실에서 나온 300명(*그들 중에는 갈리에로와 프란체시아, 루아도 끼어 있었다. 루아는 1852년 9월 23일에 기숙생으로 오라토리오에 들어왔고 10월 2일 베키에서 신학생복을 입었다)의 소년들은 공사 중인 건물 사이에서 30분 이상 뛰놀았었다. 그리고 그 재앙은 그들이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났던 것이다.(돈 보스코의 회상,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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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과 성화의 산실産室이었던 콘솔라타 성당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몇몇 기록들
성 카를로 보로메오(1538~1584) 덕분에, 1578년 성의(聖衣, 수의)가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옮겨진다. 이 거룩한 대주교는 성의를 경건히 공경하며,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왕가의 수호성인으로 모신 콘솔라타(Consolata) 성모 성지를 찾아 기도에 잠겼다. 1589년, 이 성지를 돌보던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을 대신하여 개혁된 시토회 수도자들(Fogliensi)이 그 역할을 맡았었는데, 그중에는 스페인 출신의 장 괄테롱(Jean Gualteron)도 있었다. 그는 온유하고 이웃을 돕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흑사병이 퍼졌을 당시, 시토회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병원으로 바꾸었고, 1600년에는 토리노에 남아 있던 소수의 사제들과 함께 장 괄테롱이 성모 성지에서 대성당까지 참회 행렬(processione penitenziale)을 이끌었다.
예수님의 성의를 찾아 기도하고 위로의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제네바의 주교였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년) 역시 콘솔라타 성당을 방문하였는데, 이에 관하여 기록은 “피에몬테의 공주가 주교님을 위해 격조에 맞는 숙소를 준비하였으나 성인께서는 그러한 영예를 거두어주시라고 청하며 시토회Cistercensi 수도원으로 갔다.”라고 전한다.
콘솔라타 성모 성지는 토리노 사람들에게 실로 영적인 요새라 할 수 있다. 복자 세바스티아노 발프레(1627~1710년), 카르멜 수녀회의 복자 마리아 델리 안젤리-마리안나 폰타넬라(1661~1717년)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시의회는 외부 행렬을 위한 조각상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이냐시오 산티아 수사(1686~1770년)는 거의 매일 이 성지에 들려 성모님께 경배를 드렸다. 토리노를 찾았던 쥬셉페 베네데토 라브레(1748~1783년) 역시 그러했다. 사보아의 카를로 엠마누엘레 4세의 배우자인 가경자 마리아 클로틸데 보본-프란치아(1759~1802년)는 이 성모 성지에 자신의 망토를 기증하여 제의로 사용하도록 주선했다. 복자 사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1812~1836년)는 나폴리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였는데, “성녀”로 알려진 여왕은 24세의 이른 나이로 출산 중 사망하기까지 콘솔라타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귀족의 삶을 넘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였던 카를로 탄크레디 팔레티 디 바롤로(Carlo Tancredi Falletti di Barolo, 1782~1838)와 그 부인 쥴리아 콜베르(Giulia Colbert, 1786~1864)도 있다. 두 사람 모두 가경자이며, 교육과 감옥에 갇힌 이들의 갱생을 위해 다양한 자선 활동을 구상하고 실행했던 이들이었다. 공직자이자 토리노의 시장이었던 카를로 탄크레디는 1835년 콜레라 유행 당시 콘솔라타 성모님께 서원하고, 성모님을 기리기 위한 기념 기둥을 광장에 세우는 일을 주도하였다. 쥴리아는 콘솔라타에 가장 깊은 신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한 번은 많은 신자가 모인 전례 중에 한 여자아이가 어머니에게 “Pijme am brass, prendimi in braccio, 안아주세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이 말은 그녀가 가장 즐겨 바치는 화살기도가 되었다.
1827년 병원에서 거부를 당해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젊은 프랑스인 산모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던 베네데토 코톨렝고(1786~1842년) 성인은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 토리노 시내 왕궁 근처에 구호병원을 지었는데, 이는 1832년 지금의 발도코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그는 콘솔라타 성모님의 이콘 상을 찾아 기도했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섭리와 성모님의 위로에 의존하여 병원과 구호소를 운영하였는데, 1841년 가을에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성모님 앞에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였고, 기도가 끝나자마자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밀가루가 가득 담긴 식량 자루를 실은 수레가 도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쥬셉페 카파쏘(1811~1860년) 성인 신부님은 토리노의 수호자이신 콘솔라타 성모님의 열렬한 팬이었다. 제단 근처 기둥의 기저부에 있는 기록은 성인이 즐겨 기도한 장소임을 표시한다. 물론 카스텔누오보의 베키 출신으로서 오랫동안 쥬셉페 카파쏘로부터 영적 동반을 받았던 돈 보스코(1815~1888년) 역시 콘솔라타 성모님께 깊은 신심을 보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돈 보스코는 아이들을 자주 이 성당에 데려가 성모님께 기도하고 아이들과 함께 성사를 거행했다. 1846년 7월 돈 보스코가 병에 걸려 앓아눕자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대로 순번을 지켜가며 성모님께 돈 보스코의 쾌유를 기도하기도 했다. 기적적인 치유의 은혜를 입은 돈 보스코에게 의사들은 “콘솔라타 성모님께 감사하러 가십시오. 성모님께서 잘 보살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54년 아시아 콜레라가 토리노 시를 강타했을 때도 시민들은 콘솔라타 성모님께 도우심을 청했다. 돈 보스코의 아이 중 하나였던 도메니코 사비오 성인(1842~1857년)은 콘솔라타 성당 합창대에서 소프라노로 활약하기도 했다. 1856년 11월 가경자인 돈 보스코의 어머니 맘마 마르게리타가 돌아가셨을 때, 돈 보스코는 콘솔라타의 성모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인근 본당 신부로서 복자들이 되신 란쪼의 페데리코 알베르트나 리발바의 클레멘테 마르키시오 신부들도 콘솔라타 성모님을 향한 대단한 신심가들이었다.
사빌리아 출신 복자 가브리엘라 보니노(1843~1906년)는 성 가정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인근의 성 안나 수녀원에는 복자 마리아 엔리케타 도미니치(1829~1894년)가 거주하였는데, 그녀는 바롤로 후작이 설립하고자 했던 수도회의 장상이자 공동 창립자였다. 사보이에서 태어났던 복자 안나 미켈로티(1843~1888년)는 피에몬테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콘솔라타 성모님 앞에서 기도했다.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까지 가야 했던 프란체스카 루바토(1844~1904년) 성녀 역시 조카에게 ”콘솔라타 성모님께 기도하라“고 편지를 썼으며, 콘솔라타 성모님의 또 다른 신심가에는 하느님의 종 마리아 루이지 안젤리카 클라락(1817~1887년)도 있었다.
나란히 형제 복자가 되었던 죠반니 마리아(1848~1913년)와 루이지 보카르도(1861~1936년)도 있는데, 형은 쥬셉페 알라마노 본당 신부의 권고에 따라 1899년 <콘솔라타의 아홉 개 토요일>이라는 소책자들 편찬했으며, 동생은 본당의 부주임이기도 했다.
1901년에 콘솔라타 선교 수도회, 그리고 1910년에 선교 수녀회를 각각 설립했던 쥬셉페 알라마노 성인은 “콘솔라타를 방문하지 않고는 선교사로 떠나지 말라.”라고까지 권고했다. 그가 설립한 수녀회 출신으로서 가경자 이레네 스테파니(1891~1930년)가 있는데, 그녀는 27번째 수녀로서 브레시아의 안포에서 1911년 콘솔라타 축일 전날에 도착했다. 그녀는 성지의 대규모 복원작업을 주도했는데, 그녀의 후원자 중에는 성 비오 10세 교황이나 사보아의 마르게리타 여왕, 사보아 나폴레온의 클로틸데 공주가 있었다.
두 명의 거룩한 성인 주교도 콘솔라타 성당과 관련되어 있다. 수사의 주교이자 프란치스칸 선교 수녀회의 창립자인 복자 에도아르도 로사즈(1830~1903년) 주교, 토리노 태생으로 아스티의 사제였고 카를로 사비오 주교의 비서를 역임했으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나중에 아퀴의 주교가 되어 성 요셉의 오블라티회를 창설한 쥬셉페 마렐로(1846~1895년) 주교이다. 몬레갈레 출신 복자 마르칸토니오 두란도(1801~1880년)는 43년간 선교 사제의 장상을 역임하였는데, 그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정신으로 자선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하느님의 종인 루이지아 보르지오티(1802~1873년)와 함께 나자렛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분들 역시 하나같이 콘솔라타 성모님께 깊은 신심을 지닌 분들이었다.
복자 프란체스코 파아 디 브루노(1825~1888년)는 군인이자 수학자, 과학자로서 51세에 사제가 되어 그는 모든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려 마돈나 델 수프라지오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고, 여성들을 위한 사회 복지 사업을 창설했다. 토리노에서 나고 자라 영성을 받고 사목활동을 하였고, 1873년에 성 요셉회라는 수도회를 설립하여 성인이 된 성 레오나르도 무리알도(1828~1900년)도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저를 아름다운 이탈리아,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콘솔라타 성모님의 도시인 토리노에서 태어날 수 있게 해주셔서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오, 저의 좋으시고 감미로우신 콘솔라타의 어머니, 분명 당신의 보호였을 것입니다. 저의 육친인 어머니께서 저의 형제들과 함께 저를 당신의 보호에 맡겨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 복되신 저의 어머니, 천 번 만 번 찬미 받으소서. 제가 천상에서 당신께 감사드리러 갈 수 있게 하소서. 성모님의 자비를 제가 영원히 노래하리이다.”라고 쓴다.
카푸친 수도회의 선교사들로서 에티오피아의 사도로 알려지는 가경자 굴리엘모 마사이아(1809~1889년), 아프리카의 사도로 알려지는 노네의 안젤리코(1875~1953년)라는 분들도 위로의 성모님을 찾았다.
이 외에도 복자 네메시아 발레(1847~1916년), 가경자 쥬셉페 피코(1867~1946년). 예수회 회원인 가경자 바오로 비오 페라쪼(1846~1911년), 가경자 레오폴도 무소(1850~1922년, 가경자 루이사 마르게리타 클라레트 데 라 투체(1868~1915년), 파물라토 수녀회 설립자인 가경자 아돌포 바르베리스(1884~1967년), 복자 필립보 리날디(살레시오회 제3대 총장, 1856~1931년), 복자 프란체스코 팔레아리(1863~1939년), 가경자 쥬셉피나 오페르티(1871~1949년), 복자 테오도레토 가르베롤리오(1871~1954년), 성 루이지 오리오네(1872~1940년), 가경자 카를로 스테르피(1874~1951년), 가경자 오레스케 폰타넬라(1883~1935년), 병에 걸려 6월 20일 콘솔라타 성모님 기념 행렬에 참석했던 복자 피에르 죠르지오 프라사티(1901~1925년), 가경자 콘솔라타 베트로네(1903~1946년), 중국에서 순교한 쿠오르나테 출신 성 칼리스토 카라바리오(1903~1930년), 가경자 마리아노 다 토리노-바오로 로아센다(1902~1956년), 피네롤레 출신으로 기자로서 활약한 사제 죠반니 바라(1914~1975년),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1910~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인 성녀들이 이 성당을 방문하여 ‘위로의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으며, 성모님께서는 그들을 성덕과 성화의 길로 이끄셨다.
콘솔라타 성당과 관련이 있는 성인성녀들을 언급하다 보면, 많은 분이 1800년대의 분들이었음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돈 보스코 역시 1800년대의 성인이다.
*참고한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