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성인이 하느님의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신 분들이지만, 인류의 역사 안에 아직까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성인이 또 있을까 싶다.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 출신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St. Ignatius de Loyola, 1491~1556년)는 예수회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다. 46세의 늦은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교황청으로부터 1540년에 예수회 회헌을 인가받았다. 예수회의 표어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이다. 이른바 개신교의 종교 개혁에 맞서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주도하며 선교사들을 여러 곳에 파견하였다. 1548년 <영신수련>을 집필하였다.
극적인 회개의 삶을 살았던 성인은 특별히 ‘책을 통한 회개의 성인’으로도 알려진다. 그의 삶을 바꾼 책들로는 작센의 루돌프(Ludolphus De Saxonia, 1295~1378년)라는 독일 카르투시오 회원이 40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그리스도전(*원제는 De Vita Christi 영어본으로 Milton T. Walsh가 2018년에 The Life of Jesus Christ로 펴낸 바 있음)>이 있고, 다른 한 권은 13세기 도미니코회 출신 제노바 대주교이자 저술가인 자코보 데 보라진느(Jacobus de Voragine, 1230년경~1298년)가 지은 <성인열전(*원래는 라틴어로 Legenda aurea 혹은 Legenda sanctorum이며, 영어로는 Golden Legend라고 알려지는 책인데, 영어본으로 William Granger Ryan라는 분이 2012년에 The Flowers of the Saints로 펴낸 바 있음)>이라는 책이 알려진다. 성인의 축일은 7월 31일이다.
건강이 악화하면서 예수회 총장으로서 이냐시오 성인은 더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 아래 1551년 1월 30일 새 총장의 선출을 바라며 자신의 사임을 청하는 편지를 낸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밝힌다: 「 … 저는 제 안에서 발견되는 많은 죄와 결점, 그리고 육체적・영적 연약함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차분하고 현실적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결론짓게 되었습니다. 즉, 제가 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자질을 전혀, (아니 절대로)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 직무는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이, 아니 최소한 저보다 못하지는 않은 이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예상대로, 당시 예수회는 그의 사임을 거부했는데, 성 이냐시오는 그 결정 또한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사임을 고집하거나, 권위와 영향력을 이용해 회원들의 결정을 뒤집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수회원들의 결정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고 그것을 다시 받아들였다.
————————-
*성 이냐시오의 생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 예수회에서 옮긴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이에 관해 정리한 안창호 신부의 발췌 내용이다. 각 문단 끝의 괄호 안 숫자는 해당 책의 쪽 번호이다.(*출처: https://cafe.daum.net/heartjm/M2YL/122)
자서전의 유래
이 이야기는 이냐시오가 회심한 이래, 하느님이 어떻게 그를 인도하고 가르쳤던가를 술회해 달라는 몇몇 예수회 동지들의 수차에 걸친 간청에 못 이겨 오랫동안 망설이던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10)
그의 원숙한 영성을 특징짓는다고 말할 수 있는 활동 중의 관상이라는 좌우명 역시 그의 타고난 리얼리즘, 즉 생에 대한 개방적 자세, 일상생활의 한가운데로 몰입하는 자세에서 그 표현과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10-11)
동료 회원들, 특히 예로니모 나달의 간청에 못 이겨 이냐시오는 드디어 당시 로마의 회원 거주지에 거주하고 있던 젊은 포르투갈인 예수회원에게 자기의 젊은 시절의 사건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승낙했다. 그 회원은 루이스 곤살베스 다 까마라였다.(11)
까마라는 주의하여 이야기를 듣고는 이냐시오와 헤어지자마자 즉시 들은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이야기를 앞뒤로 맞춘 다음에는 필기사에게 불러주어 정서하도록 하였다.(11-12)

까마라 신부의 서문
나는 특별히 허영심에 관해서 말씀드렸다. 사부께서는 그 처방으로서 나의 내면의 이야기를 모두 하느님께 자주 말씀드리고 나에게서 발견되는 좋은 것은 다 하느님께 돌려드리도록 노력하며, 그 좋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라는 훈계를 내리셨다.(27)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사부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고 자리를 떠서 곧바로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갔다. 먼저 내 손으로 노트에 옮겼고, 그다음에 지금 쓰여진 것과 같이 긴 글로 다듬게 했다. 나는 사부께 들은 것 외에는 한 마디도 보태지 않도록 조심을 했지만, 사부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에 어떤 말씀은 그 취지를 확연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았나 걱정된다.(29)
제1장: 건강회복과 회심(1521년 5월-1522년 2월)
주더라도 그 대가를 셈하지 아니하고, 싸우더라도 상처받음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땀 흘려 일하더라도, 휴식을 찾지 않게 하소서. 힘써 일하더라도 당신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아는 보수 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가르쳐 주소서.(로율라의 성 이냐시오 기도 중)
스물여섯 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를 붙좇는 사람이었다. 명성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크고 헛된 욕망을 가지고 그는 군사훈련을 즐기고 있었다.(43)
포격이 예상되던 날이 오자 그는 전우 한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포격이 끝날 무렵 총알 하나가 그의 발에 명중하여 그의 한 쪽 다리를 완전히 부서뜨리고 그 총알은 다른 쪽 다리도 관통했다.(43)
요새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이 부상자를 친절하게 치료해 주었고, 팜플로나에 열이틀 내지 열사흘 동안 두었다가 들것에 실어 그의 고향으로 데려다주었다.(43)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어 먹지도 못하고 임종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성 요한 축일이 가까워질 무렵 의사들은 그의 건강에 관해 거의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지 고해성사를 받도록 권했고, 그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 전날 성사를 받았다.(44)
그런데 부러졌던 뼈가 붙어가면서 무릎 관절 아랫뼈 하나가 다른 뼈 위로 튀어나와 다리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 뼈는 보기에도 흉할 만큼 불거져나와 있었다. 출세할 마음을 먹고 있던 그는 이것 때문에 불구자가 되리라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뼈를 잘라낼 수가 없느냐고 그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들의 말로는 잘라낼 수는 있지만 이미 완쾌된 데다가 잘라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까지 겪은 고통보다도 훨씬 더 큰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만한 고통쯤은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44)
살을 도려내 벌린 뒤에 튀어나온 뼈를 잘라내고 다리가 짧아지지 않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상처에 고약을 잔뜩 붙이고 기구를 가지고 다리를 계속 잡아 늘이는 치료도 했다. 여러 날을 두고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그러나 주께서 그의 건강을 쾌유시켜 가셨으므로 그의 상처는 점차 회복되었다.(44-45)
그는 평소 세속적인 소설책, 기사들의 무용담이 담긴 책들을 매우 즐겼다. 건강이 좋아지자 그는 소일도 할 겸, 그런 책들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즐겨있던 소설책들이 집에는 마침 한 권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스페인말로 된 『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을 가져다 주었다.(45)
이 두 권의 책을 여러 번 거듭 읽는 동안 그는 그 내용에 진지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때로는 책을 옆으로 밀어놓고 금방 읽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전부터 생각해 오던 세상사를 공상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45)
주님의 생애와 성인들의 전기를 읽다가 그는 간혹 읽기를 멈추고 마음속으로 헤아리는 것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나 성 도미니코가 한 일을 나도 하면 어떨까?”하고.(46)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는 일, 맨발로 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 가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해보면, 위안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46)
그는 서서히 자기를 동요시키고 있는 두 정신의 차이를 깨닫기에 이르렀으니, 하나는 악마에게서 오는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47)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더욱 진지하게 반성하게 되고 속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급기야는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구체적인 상황 같은 것은 거의 생각지 않았으나, 성인들이 한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의 소망은 완쾌가 되는 대로, 하느님에 의하여 고무되어 관대한 영혼들이 으레 소망하는 바와 같이 온갖 고행과 극기를 수행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었다.(47)
어느 날 밤, 깨어있는데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을 뚜렷이 보았다. 이 환시에서 그는 상당히 오랜 시간 크나큰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肉)에 따른 행실에 대한 심한 혐오감을 느꼈으며, 전에 머릿속에 그리던 모든 상상들이 말끔히 씻겨나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47)
이들 책에 재미를 느낀 그는 『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에서 요점이 되는 것들을 간추려 베낄 생각을 했다. 그는 열심히 책을 써 내려갔다. 정성을 다해 종이를 다듬고 줄을 반듯반듯이 그어가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붉은 잉크로, 성모님 말씀은 파란 잉크로 써 내려갔다.(48)
그가 가장 위로를 받는 일로는 별빛 찬란한 하늘을 조용히 바라보는 일이었는데, 점점 더 그런 일이 잦아지고 점점 더 그 시간은 길어져 갔다. 그는 그 결과 우리 주님을 섬기겠다는 커다란 열망을 마음속에 세차게 느끼게 되었다.(48)
제2장: 순례의 길에 오르다(1522년 3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53)>
그는 내면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일도 없었고, 겸손이니 사랑이니 인내니 하는 덕이 무엇이며 이러한 덕성들을 헤아리고 조정하는 분별심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특정한 상황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고 무작정 위대한 성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한 행업들을 했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뿐이었다.(53)
제3장: 만레사의 은둔생활(1522년 3월-1523년 초)
그는 만레사에서 매일 음식을 구걸하며 지내고 있었다.(58)
그는 돌연 자기의 생활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깨우쳐주는 듯한 고약한 생각이 떠올라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마음속에서 “앞으로 남은 칠십 평생을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해나가겠느냐?”하고 누군가가 질문을 던져오는 듯했다. 그 생각이 원수에게서 오는 것이라 믿으며 그는 마음속으로 맹렬한 격분을 가지고 대답했다. “이 불쌍한 존재야. 네가 나한테 한 시간의 목숨이나마 보장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렇게 유혹을 이겨내고 그는 평안을 되찾았다.(58-59)
몬세라트에서 그는 단단히 준비하고 성찰한 바를 빠짐없이 기록까지 하여 총고백을 했음에도, 그의 말을 빌리면, 어쩐지 몇 가지를 고백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큰 근심이 되었으며, 빠뜨렸다고 생각되는 일을 고백하고 나서도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었다. 이 소심증을 치료해 줄 만한 훌륭한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60)
세심증에 시달림을 받는 나날이 여러 달이나 계속되었다. 한번은 세심에 시달리다 못해 간곡한 기도를 드리면서 마침내 큰 소리로 하느님께 외쳤다.
“주님, 붙들어주십시오. 사람들 가운데서나 피조물에게서는 아무 처방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처방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어떠한 수고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오 주님, 치유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십시오. 강아지 뒤꽁무니를 따라다녀야 한다고 하더라도, 도움만 된다면 얼마든지 따라다니겠습니다.”(61)
마침내 그는 과거지사는 더 이상 고백치 않기로 굳은 결심을 세웠다. 그날로부터 그는 세심에서 벗어났으며, 주께서 자비로이 자기를 해방시켰다는 확신을 얻었다.(62)
그는 일곱 시간의 기도 외에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영신사정을 돕는 일로도 바빴다. 그 나머지 시간은 그날 묵상하거나 독서한 하느님의 사정을 명상하며 보냈다. 그러나 자리에 들 때면 큰 깨달음과 영혼의 위로가 찾아오곤 하였으며, 그래서 그나마 많지도 않은 수면시간을 잊은 채 시간을 보내곤 하는 것이었다.(62)
하루는 수도원 층계에 앉아 성모의 성무일도를 염하고 있노라니 그의 오성이 승화되더니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가 세 개의 현(弦)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는 흐느끼며 자제를 잃고 말았다. 그날 아침에 그 층계 위에서 시작된 이 감격은 점심 때가 되도록 눈물을 거두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그는 크나큰 희열과 위안을 느끼며 여러 다른 비유를 들어가면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께 기도하던 때에 커다란 경건심을 체험했던 그 인상은 평생을 두고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63-64)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손길로 언젠가 자신을 비추어주셨는데, 그는 거기에서 위대한 영성의 환희를 맛보았다. 그가 느끼기로는 하얀 물체를 본 듯도 하고 그 물체에서 몇 줄기 광선이 흘러나오는 듯도 했는데, 하느님께서 그 물체로부터 빛을 내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고,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자기 영혼에 비추어주셨던 조명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64)
어느 날, 앞서 말한 수도원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거양성체 때 새하얀 광선같은 것이 위에서 내려옴을 심안心眼으로 보았다. 먼 훗날에 와서도 그는 이 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거룩한 그 성사에 어떻게 현존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그는 심안으로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64)
그는 기도 중에 자주, 그것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심안으로 뵈었다. 그에게 나타난 형상은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흰 몸체인데 지체는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다. 만레사에서 그는 이것을 여러 번 보았었다. 스무 번 내지 마흔 번을 보았다 해도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65)
또한 성모님도 비슷한 형상으로 뵈었는데 지체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본 것들은 그를 강화시켰고, 그후에도 언제나 그의 신앙을 굳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 관한 이런 신비들을 가르쳐주는 성경이 없다하더라도 자기는 자기가 본 사실만으로도 신앙의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65)
한번은 그가 신심으로 만레사에서 1마일쯤 떨어진 성당으로 길을 나섰다. 길은 강가를 뻗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신심이 솟구쳐 그는 강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강은 저 아래로 흐르고 있었고, 거기 앉아있을 동안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비록 환시를 보지 않았으나 영신사정과 신앙 및 학식에 관한 여러 가지를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만사가 그에게는 새로워 보일 만큼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던 것이다. 비록 깨달은 바는 많았지만, 오성에 더없이 선명한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는 예순두 해의 전생애를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것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65-66)
만레사에서 한번은 병에 걸려 심한 열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며, 본인도 영혼이 자기를 떠나려나 보다고 굳게 믿고 있을 때 갑자기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크게 당황하여 이 상념을 얼른 떨쳐버리고 곧 자기의 죄를 되새겼다. 고열로 시달리는 자체보다도 이 생각 때문에 더욱 괴로움이 컸으며, 이 생각을 극복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열이 좀 내려 숨을 거둘 지경을 벗어나자 소리내어 울면서 자기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하느님께 거슬러 범한 죄과들을 마음속으로 일깨워보는 것이었다.(66)
한번은 발렌시아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뱃길에서 일어난 일인데, 심한 폭풍을 만나 배의 키가 부러지고 보통 수단으로는 도저히 죽음을 벗어날 길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그와 배에 탄 여러 사람이 판단했다. 그 지경이 되자 그는 자신을 면밀히 성찰하고 죽을 준비를 하면서 자기 죄를 두려워하거나 벌받는 일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주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선물을 잘 쓰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커다란 슬픔과 혼란에 빠졌다.(66-67)
또 한번은 1550년의 일인데, 그가 중병에 걸려 본인이나 주위 사람이 모두 임종에 임박했다고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지극한 행복감과 영성적 위안을 느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이런 기분은 그 뒤로도 빈번히 일어났기 때문에 거기서 너무 위로를 얻는 일이 없게 하려고 죽음에 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도 했다.(67)
그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세 가지 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몸이므로 비록 카르도나 공작의 아드님이나 아우가 동행해 준다 하여도 싫다고 대답하였다. 동행인을 데리고 가다가 배가 고파지면 동행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할 것이고 넘어지면 붙들어 세워주길 원할 것이며 그에게 의지하게 되고 정을 둘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자기는 신뢰와 애정과 희망을 오직 하느님께만 두겠다는 것이었다.(68)
제4장: 예루살렘 순례(1523년 3월-9월)
그는 스페인 황제의 대사관을 찾을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고 배삯을 구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가는 길을 마련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논리나 이유를 대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강직한 용기를 얻었다.(75)
제5장: 스페인에 귀향(1523년 9월-1524년 초)
예수회원은 거룩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될 수 있는 대로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랑을 창조주께로 향하게 하며,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도록 이따금 권고받아야 한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예수회 회헌(288)>(81)
끌려가면서 순례자는 붙잡혀 가시는 그리스도의 형상 비슷한 모습을 보았는데, 이것은 다른 때의 환시와는 달랐다. 그는 읍내에 있는 세 개의 큰 거리를 끌려 다니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만족감을 맛보았다.(84)
*‘순례자’는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이냐시오 성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6장: 바르셀로나와 알칼라에서의 수학(1524년 사순절-1527년 6월)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죽음이 나의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죽음에서 삶의 방식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의 투쟁은 나의 안식이고 당신의 인간적 약함은 나의 강함이 되고 당신의 수난은 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피에르 파브로, 이냐시오의 동료, 87)
경관은 그를 감옥에다 가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달리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를 나가서는 안 돼!” … 그에게 아직도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은 데레사 데 카르데나스 부인인데, 그녀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찾아보게 하고 그를 석방시키겠다고 여러 차례 제의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일체 수락하지 않고 늘 같은 대답을 했다. “그분의 사랑 때문에 여기 들어왔으니, 그분께서 소용되시면 나를 꺼내주실 것입니다.”(93)
제7장: 살라망카에서의 소동(1527년 7월–연말)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 이것이 참으로 예수회의 유일한 목적입니다.(예로니모 나달, 예수회원, 95)
사흘째 되는 마지막 날에 공증인이 와서 그들을 감옥으로 끌어갔다. 그들은 순례자와 칼릭스토를 죄수들과 함께 지하 감방에 가두지 않고 다락방에 가두었는데, 다락방은 낡은데다가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투성이였다. 두 사람은 같은 사슬에 발을 묶이었고, 사슬은 집 가운데 세워진 기둥에 연결되었으며, 그 길이는 열 내지 열세 뼘 정도이었다. 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려면 또 다른 사람도 따라서 움직여야만 했다.(101)
저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까지 할 생각은 없으신가 보군요. 옥에 갇히는 일이 부인에게는 그처럼 나쁜 일로 보입니까? 그렇지만 살라망카에 제 아무리 쇠창살과 쇠사슬이 많다고 해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무엇이고 감수하겠다는 제 소망을 꺾지는 못 할 것입니다.”(103)
갇힌 지 스무이틀이 지나고서 선고를 받으러 출두했는데, 판결은 그들의 생활과 가르침에 전혀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온 바와 똑같이 행동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하느님 사정을 이야기해도 되는데, 다만 앞으로 4년간을 더 공부하기까지는 “이것이 대죄다. 이것이 소죄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였다.(103)
제8장: 파리 대학 시절(1528년 2월-1535년 3월)
그는 이 생각을 혼자서 간직하고서 상당한 위안을 얻었다. 자기가 시중들 선생은 그리스도이고 그 학생들 중의 하나는 성 베드로라 하고, 다른 하나는 성 요한이며, 그리하여 학생들이 모두 사도들이라고 상상키로 했다. “선생이 내게 명을 내리면 그리스도께서 명을 내리시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다른 사람이 일을 시키면 성 베드로께서 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겠다.”(116)
그는 환자에게 위로를 하면서 문드러진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는 그 환자를 격려하고 얼마간 위안을 준 다음 홀로 나왔다. 그런데 그의 손이 쑤시기 시작하여 자기도 전염병에 걸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생각이 하도 강하여 도무지 견딜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손을 입안에 깊숙이 쑤셔넣고 말했다. “손에 만일 전염병이 옮았다면 입에도 옮겨놓을 테다.” 그렇게 하고 나자 근심이 사라졌고 손의 통증도 씻은 듯이 없어져 버렸다.(122)
파리에 있을 그때 그는 위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보름마다 위통이 일어나 몇 시간씩이고 계속하여 신열이 났다. 통증이 열예닐곱 시간이나 지속된 때도 있었다.(123)
순례자가 출발하려는 즈음, 그는 자신이 종교재판관에게 고발당했으며 자기에 대한 소송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자기를 소환하지 않자 그는 직접 종교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가 들은 바를 진술하고 자기는 스페인으로 떠날 몸이며 일행이 있다고 설명하고는 판결을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종교재판관의 답변은 기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보기에 그다지 중대한 사건은 아닌 듯하다는 것이었다. 재판관은 단지 그의 『영신수련』만 보자고 요구했다. 그것을 읽고 나서는 극구 칭찬하며 순례자에게 사본이 있으면 하나 달라고 당부했다.(124)
제9장: 모국 재방문(1535년 4월–연말)
무릇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내면의 체험은 교회의 규정과 순종과 겸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125)
그는 이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어린이들에게 매일 교리를 가르치기로 작정했으나, 형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극구 반대했다. 그는 한 사람만 와도 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단 일을 시작하자 많은 아이들이 계속적으로 그를 찾아왔고 그의 형까지도 교리를 들었다.(127)
그는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그는 한참을 가야만 했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강물로 떨어지지나 않나 겁이 났다. 그로서는 이때가 지금까지 겪어본 가장 고통스럽고 육체적으로 힘든 길이었다고 한다.(129)
볼로냐로 들어갈 작정으로 조그만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그는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진흙투성이가 되어 일어서자 거기 있던 많은 사람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볼로냐로 들어가 애긍을 구했는데,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녔지만 한 푼도 얻을 수가 없었다.(129)
제10장: 베니스와 비첸사에서(1535년 말-1537년 말)
내게 사랑에 찬 겸손을 주소서. 사랑에 찬 경외심을 주소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혼의 일기>, 131)
동지들은 갈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베니스에 돌아왔다. 즉 걸어서 구걸을 하며 여행하되, 세 무리로 나눠어 국적이 다른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서 따로 가는 것이었다. 베니스에서 아직 서품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미사를 드릴 수 있게 서품을 받았고, 또 그 당시에 베니스에 와 있던 교황대사 베랄로 추기경은 그들에게 성직권을 수여했다. 그들은 청빈의 표로 서품을 받았으며 정결과 청빈을 서원하였다.(133)
로마를 몇 마일 남겨두고 하루는 어느 성당에서 기도하는데, 그는 자기 영혼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성부께서 자기를 당신의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선명히 보았으며, 성부께서 자기를 성자와 함께 해주셨음을 추호도 의심할 바 없었다.(135)
제11장: 로마에서(1538년)
어느 날 그는 오세스 학사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눈물을 많이 흘렸고 커다란 영신적 위안도 받았다. 그는 이 광경을 너무나 분명히 보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스스로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138)
지금까지 수록한 이야기를 사부께 듣고 난 뒤 10월 20일 필자는 어떻게 『영신수련』과 회헌을 초안했는지 알고 싶다고 순례자께 문의를 했다. 그분은 『영신수련』은 단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영혼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하리라는 생각에서 틈틈이 적어두었노라고 대답하셨다.(140)
사부의 신심, 쉽사리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덕성은 나날이 증대하여 최근에는 당신 생애의 그 어느 때보다 절정에 달해 있었다. 어느 때 어느 시각에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부께서 하느님을 만나 뵙는 것이었다. 환시도 매우 빈번했으며, 그리스도께서 태양처럼 보이는 환시가 특히 자주 일어났다. 중요한 사정을 이야기하시는 도중에도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났는데, 사부께서는 이것이 일종의 확인이 되는 것 같았다.(140)
기도나 미사를 올리실 때에는 항상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141)
디에고 데 구베아에게 보낸 서한
로마에도 교회의 진리와 생명을 증오하는 자들이 많더군요.(153)
교회상에 오류가 일어나는 주요 원인은 기실 생활의 오류에서 온다는 것은 두려운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생활의 오류를 교정하지 않는 한 교의상의 오류는 결코 시정되지 않을 것입니다.(154)
예수회 회헌 초안
각자는 성령께서 내리신 은혜와 자기 소명의 특정한 서열에 따라 일하되, 추호도 격정에 따라 하지 않고 지혜로써 할 것이다.(155)
회원들은 소유주의 승낙을 받아 필요한 것만을 사용하는 데 기뻐하며, 살아가는 데 꼭 필수품이 되는 금전과 물건을 받는 일로 만족할 것이다.(158)
***
여러분의 영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이냐시오는 유명한 사람들의 비상한 행적을 기록한 저속하고 공상적인 책을 즐겨 읽었다.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느꼈을 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그런 책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요양하고 있던 집에는 그런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모국어로 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과 ‘성인들의 꽃’이라는 책을 그에게 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을 자주 읽으면서 그 책에 담긴 내용에 어떤 공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책에서 마음을 떼어 전에 늘 읽던 그런 저속한 이야기로 생각을 돌리고 또 어떤 때는 그 생각에다 마음까지 돌리곤 했다. 마음속에 이런 무절제한 생각들이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가까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최근에 읽은 책의 영향으로 이런 생각들을 지금의 생각에다 굴복시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를 읽으면서 자주 자신에게 말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복된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가 한 것을 나도 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이런 생각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지만 다른 것들이 끼어 들어와 이전의 저속하고 공상적인 생각들이 되살아나곤 하여 그것들도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게 꽤 오랫동안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그가 저속한 생각을 가지고 즐기는 동안 그 순간에는 큰 기쁨을 느꼈지만 그 생각에 싫증을 느껴 흘려 버리고 나면 슬픔과 공허를 느꼈다. 한편 성인들이 실천했던 고행의 생활을 생각할 때 느낀 기쁨은 생각하는 중에만이 아니라 생각을 마친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이냐시오는 이 차이점을 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침 어느 날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이 차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체험에서 어떤 생각들은 슬픔을 주고 또 다른 생각들은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그가 하느님의 것에 관해 도달한 첫 중요한 결론이었다. 훗날 자신이 ‘영신 수련’을 할 때 이 체험은 자기 제자들에게 준 ‘영의 식별력’이라는 가르침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기념일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루이스 곤살레스가 성 이냐시오에게 직접 듣고 쓴 행적기에서 – Cap. 1,5-9: Acta Sanctorum Iulii, 7[1868],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