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3일에 기념하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小) 야고보와 달리 7월 25일에 기념하는 이른바 큰(대大)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성경의 기록에 따라 “천둥의 아들”(마르 3,17)이라고도 불린다.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 어부로서 42년경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셨으며, 스페인의 순례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끝에서 이분의 기념 성당을 만난다.(※참조.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5월 3일) https://benjikim.com/?p=9714 조개껍질이 성지 순례의 상징이 된 이유 https://benjikim.com/?p=4991) 예수님께서 큰 야고보 사도에게 동생 요한과 함께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마르 3,16) 까닭을 두고 ‘가톨릭 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은 그들이 불같은 성격을 지녀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매우 열성적이었다고 설명한다. 복음에서도 이를 암시하듯 몇몇 구절이 전해진다.
예수님께서 당신에 앞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일이 있었을 때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마을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두 형제가 예수님께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화를 냈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에 앞서 동생 요한 역시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루카 9,49)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성경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the Bible) 역시 “성 예로니모께서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두 형제의 별명이 그들의 열정적인 설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밝힌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형제들이 급진적인 혁명론자들이거나 열혈당원(참조. 마태 10,4 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혹은 적어도 그러한 성향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별명을 지어주신 것을 두고 천둥이나 제우스의 아들들이었던 천상의 쌍둥이 형제(디오스쿠리Dioscuri)에 관한 신화와 연관을 짓기도 한다. *참고로, 천상의 쌍둥이 형제들은 카스토르와 폴룩스로서, 카스토르는 기수로서의 기술과 전투 역량이 뛰어난 용감한 영웅이고, 폴룩스는 권투 선수로서의 탁월한 기술과 속도와 민첩성을 지닌 운동선수이다. 두 형제 중 형이 죽게 되자 동생이 따라 죽게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청할 정도로 두 형제의 우정이 돈독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큰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 대해서는 “헤로데 임금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쳤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사도 12,1-3)라는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고유 성무일도 아침기도 찬미가에서는 사도의 생애를 요약하듯 다음과 같이 사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 「복되신 야고보여 찬미하오니 주께서 어부였던 당신을뽑아 이렇듯 높은지위 맡겨주시니 기꺼이 당신축일 기리나이다 주님이 부르시자 감동하시어 두형제 모든것을 내어던지고 주님의 귀한말씀 널리전하며 주님을 증거하려 사도되셨네 능하신 하느님의 위대한증인 다볼산 위에서는 황홀한영광 올리브의 동산에선 처절한고통 주님의 크신업적 두루보았네 수난의 쓰라린잔 다가올적에 기꺼이 마시리라 다짐하였고 사도중 제일먼저 박해를받아 주님의 사랑위해 목숨바쳤네 성실히 예수님을 따르신제자 천상빛 두루펴신 성야고보여 마음을 믿음으로 비춰주시고 가슴은 희망으로 채워주소서 주님의 계명들을 열심히지켜 참되게 이세상을 살게하시고 마침내 주님영광 노래부르며 영원히 찬미찬송 하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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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수난의 동반자들
제베대오의 아들들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 졸라댑니다. 이 말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그분은 제자들이 청하는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고 또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감히 청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깨닫도록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마르 10,38) 즉 그것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이며 하늘의 권세들까지 얼마나 초월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즉, “너희는 영예와 월계관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지만, 나는 투쟁과 수고에 대해서 너희에게 말하고 있다. 상급을 받을 때가 아직 안 왔고 나의 영광도 아직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생활은 죽음과 전쟁과 위험의 생활이다.”
그다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면서 어떻게 그들을 권고하시고 또 당신께로 이끄시는지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죽음을 견디어 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지 않고 “너희가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당하실 것을 그들도 당할 때 더 잘 준비되어 있도록 용기를 주시면서, 너희의 그 잔은 “내가 마시게 될 잔이다.”(참조. 마르 10,38)라고 덧붙이십니다. 또 수난은 온 인류를 씻어 줄 것임을 보여 주시려고, 그것을 “세례”라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할 수 있습니다.”(마르 10,39)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청하는 것을 얻기를 기대하면서 열성에 넘쳐 즉시 약속합니다.
주님은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르 10,39)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큰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너희는 순교를 받을 영예를 누리겠고 내가 당하는 것을 너희도 당할 것이며 포악한 죽음으로 너희 생명을 바칠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너희는 내 동반자들이 되리라.”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르 10,40) 주님께서는 이렇게 그들의 마음을 드높이시어 그들이 좀 더 고귀한 것을 생각하게 하고 슬픔을 이겨내도록 하신 후 마침내 그들의 잘못된 청원을 고쳐 주십니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마르 10,41) 합니다. 그 제자들 모두 얼마나 불완전한 사람들이었는지를 보십시오. 다른 열 제자보다 더 높은 자리를 탐하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이 두 제자를 시기하는 나머지 열 제자도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훗날의 이 두 사람을 보십시오. 그때에는 그들이 이 모든 경향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제자를 앞서 보려는 마음이 있었던 요한은 그 후 설교할 때나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적을 행할 때 항상 베드로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야고보는 이 일이 있고 나서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열성으로 불타올라 세속의 온갖 관심사를 버리고 덕행의 정상에 도달하여 즉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Hom. 65,2-4: PG 58,619-622 – 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제2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