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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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하신다. 성경의 언어인 희랍말은 ‘메 무 압투(Μή μου ἅπτου, mḗ mou háptou)’이고 이를 라틴말에서는 ‘놀리 메 테네레(Noli me tenere, 나를 붙들지 마라)’ 혹은 ‘놀리 메 탄제레(Noli me tangere, 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번역한다. 희랍말의 ‘ἅπτω’라는 동사는 영어로 ‘불붙이다(kindle), 만지다(touch), 들러붙다(cling)’ 등의 뜻을 지녔다. “나를 붙들지(만지지) 마라” 하시는 말씀은 교회의 전례뿐만 아니라 의학, 식물학, 문학, 음악, 조각이나 회화는 물론이고 군인들의 깃발이나 구호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회자하는 구절이다.
“붙들지 마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반가워 예수님을 덥석 부둥켜안고 도무지 놓아주지 않으려는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달래시며 하시는 말일까? 아니면 그렇게 다가오는 마리아를 만류하시며 하시는 말일까? 반가운 마리아를 만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 형제들에게 가서…전하여라.” 하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으니 형제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일까? “붙들지 마라”고 하시는데, 그 앞에 붙어있는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 이러한 의문들은 나만이 갖는 물음이 아니다. 초대교회로부터 2천 년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교부가 이에 대해 고민했으며, 많은 신학자와 예술가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성경의 같은 장 같은 대목 10절 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를 만나시면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하신다. 토마스에게는 당신을 얼마든지 “만져보라(대 보라)” 하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1940~2021년) 그의 묵상집 <Noli me tangere: On the Raising of the Body>*에서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진정한 답이 부활의 신비 그 자체에 있다고 설파한다. 낭시는 예수님을 향해 손을 뻗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붙들지 마라” 하신 것은 마리아를 꾸짖거나 거부하고자 하시는 몸짓이나 말씀이 아니라 부드럽게 마리아의 방향을 바꿔놓으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낭시에 따를 때, 이 말씀은 냉랭하게 거리를 두고자 하신 것도 아니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식의 율법 준수를 강요하시는 것도 아니다. 이는 부활 후 그리스도께서 존재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시사하는 말씀이다.(*우리말 번역본: <나를 만지지 마라-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문학과 지성사, 2015년, 아래 사진)

부활 후 첫 증인인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붙들지 말고” “내 형제들에게 가라”는 요청을 받는다. ‘사도들의 사도’가 되라는 부르심이다. 낭시는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이 전에 보았던 예수님으로의 복원이나 복귀가 아니라고 쓴다. 시체의 소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신” 것이고, “영광스럽게 되신” 것이다.(*‘일어나다’는 ‘영광스럽게 되다, 영광을 받으시다’라는 말과 함께 성경에서 늘 ‘부활’과 관련이 있는 어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덜 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실재의 예수님이시다. 부활은 실로 변화의 신비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믿음은 이제 예수님을 만져보아 물리적인 물증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깨달음으로 확인된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리아는 뭔가 손에 잡은 것이 있어서 파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포할 것을 명받아 내달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몇 구절 뒤에서 토마스는 그 소식을 듣고도 의심한다. 그의 신앙 여정은 마리아와 다르다.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라는 그리스도의 초대 역시 믿음에 관한 것이다. 낭시는 마리아이든 토마스이든 상호 이율배반이나 모순이 아니라 진리의 또 다른 깊은 두 가지의 표현이라고 본다. 부활은 과거의 앎을 무너뜨린다. 과거에 만져보아 아는 것을 이제는 마리아처럼 믿어서 아는 것이고, 아직 믿지 못하는 것은 토마스처럼 이제 고백으로 안다. 마리아에게 “만지지 마라”하시는 것은 거리를 두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방식으로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떠남이 곧 도착이듯이 상실은 동시에 새로운 밀착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루카 24,39 요한 20,27),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루카 24,30.41-43; 요한 21,9.13-15 참조)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끄시며(루카 24,39 참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그 육신이 수난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는,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육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루카 24,40; 요한 20,20.27 참조) 한편 이 참되고 실제적인 육신은 영광스러운 육신의 새로운 특성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육신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나타날 수가 있다.(마태 28,9.16-17; 루카 24,15.36; 요한 20,14.19.26; 21,4 참조) 왜냐하면 그분의 인성은 더 이상 지상에 매여 있지 않고 다만 성부의 신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요한 20,17 참조) 이런 이유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정원지기의 모습이나(요한 20,14-15 참조) 또는 제자들에게 친숙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마르 16,12) 등 얼마든지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는 분명 그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요한 20,14.16; 21,4.7 참조)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제645항)」
낭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붙잡는 분이 아니라 따르는 분, 만지는 분이 아니라 믿는 분”이라고 서술한다. 손아귀에 쥐는 확실성과 물증에 집착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붙잡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삶에서 가장 충실한 태도가 때로는 내가 붙잡으려는 것들에서 내 손을 놓는 것임을 다시 생각하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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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0,17에 관한 [교부들의 성경주해]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당신을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의 전투를 끝낸 뒤 정화가 필요했으며 그 정화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완전하게 해 주셔야만 이루어진다는 해석도 있다.(오리게네스) 이 말씀은 당신의 인성에 관한 말일 뿐이라는 해석(테오도레투스)도 있다. 마리아가 기쁜 나머지 관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에, 임금님께 다가가듯(시리아인 에프렘) 전보다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도록(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과 마리아가 전과 다른 관계에 놓였음을 알려 주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유적인 말씀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 뒤에 토마스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에게 당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에 관한 것이다.(대 레오)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며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꾸짖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신께서 아버지와 함께 나누시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로마누스)
당신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야 한다는 말씀은, 전에 우리가 멀어졌던 분이 우리 아버지요 하느남이 되셨다는 기쁜 소식을 마리아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을 붙들지 못하게 하신 것은 교회가 성령을 지니지 못한 부정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신비를 만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드신다.(암브로시우스) 그분께서는 사실상 마리아에게 당신께서 부활의 맏물이시며, 인간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려 주고 계시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이 구절은 신성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이 다름을 알려 주기도 한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라고 나누어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을 명확하게 구별하신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창조주시며(암브로시우스), 본성에 따라 그분의 아버지이신 분은 자녀 되는 권한에 따라 우리의 아버지이시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같은 지위가 되신다.(다마스쿠스의 요한) 그러나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두 본성을 구별해야 한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마리아가 주님을 뵈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그의 곁에는 무덤에 같이 왔던 다른 여인들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아우구스티누스) 예전에 죽음을 불러온 뱀의 말을 여자가 전했듯이, 지금 생명을 가져오는 말씀도 여자가 전한다.(대 그레고리우스)」(교부들의 성경주해, 요한복음-제2권, 분도, 2013년, 506-507쪽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