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맥락을 따라 이해하자면,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하늘 나라의 헌장과도 같은 진복팔단을 설파(마태 5,1-12)하신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시민이 세상 사람들 앞에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처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으로 살라고 가르치신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을 받았지만, 인류의 역사에도 책임이 있다.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그들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이 공동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1. “세상의 소금…세상의 빛”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몸소 자신을 두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입을 통해서 우리더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ㄱ.14ㄱ) 하신다. 이 짤막한 두 문장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신원 의식에 관한 명제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한 대로 이 땅 인간의 삶에 빛을 주시고 의미와 맛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빛이시며 실로 지혜의 소금이시다. 주님의 이 두 문장의 말씀을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지켜갈 수 있다면 그 어떤 근본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주님과 친교의 은총을 매일 새롭게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시편 27,1)이라 한 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이심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그 말씀을 무게를 살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추기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려 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아름답고 착한 행동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두고 “빛이다. 소금이다” 하신 말씀들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다른 이들의 사랑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와 행동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구별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고 또 달라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형제나 자매들을 평가절하하자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소돔처럼 형편없는 세상이라고 판단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세상에 있으면서도…세상에 속하지 않은”(요한 17,11.14) 존재로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분명한 의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은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휩쓸리거나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 관해서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라는 말로 이를 정리해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연대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으로서 져야 할 책임도 온전히 지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은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고, 시대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세속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다고 함은 세상이 쫓는 우상을 식별해낼 줄 안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고유성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무관심이 팽배한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세상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찾아 제시하고, 그러한 세상을 위해 설득력 있게 공헌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소금”은 “간이 맞지 않은 것을 소금 없이 어찌 먹겠으며 달걀 흰자위가 무슨 맛이 있겠는가?”(욥 6,6)처럼 음식의 맛을 내고, “사제들의 아내들도 제물의 일부를 소금에 절여 저장해 놓고서”(바룩 6,27)처럼 음식을 보존하는 특성을 지닌다. 또한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민수 18,19) “너희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소금 계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신 것을 알지 않느냐?”(2역대 13,5)처럼 어떠한 약속이나 계약의 항구한 가치와 그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뜻으로 마르코는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세상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 안에 보존하고, 또 그 세상에 ‘살 맛’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져 밖에 내다 버릴 수밖에 없다. 요리하는 이가 어느 정도의 소금을 가미해야 하는지 가늠하듯 어떻게 해야 세상과 인생의 맛을 가장 맛있게 낼 수 있는지를 헤아려야만 한다.
2.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세상 사람들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복음화와 선교를 실행하는 모습이 어떤지, 다른 타 종교인들이나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등의 삶의 양식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의미를 담아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하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서 산 위에 우뚝 솟은 성도聖都이다. 새 예루살렘으로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소명이다. 누구나 볼 수 있게 산 위에서 빛나 인류의 길을 인도해야 하는 소명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은 내용이나 본질보다 형식이나 외모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선포하느냐에 따라서 그 선포의 신빙성이 좌우된다는 것을 잘 안다. 이 말은 다른 면에서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모양새가 그릇되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하시면서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마태 6,2.5.16) 하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닌 진실한 믿음을 보여 주는 스타일이 사실 결정적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온유와 자비로 하느님을 알린다고 하더라도 거만한 태도나 강한 어조로, 더구나 세속적인 모습으로는 결코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3.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
예수님께서 “제 맛을 잃은” 소금을 두고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하신다. “밖에 버려지는” 소금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하다. 당시의 소금은 오늘날과 같이 정제된 소금이 아니었고 사해死海 등지에서 거칠게 채취한 돌소금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소금이 습기 등과 접촉하여 그 형태나 맛을 상실하는 경우를 쉽게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 성서를 공부한 캐나다의 Thomas Rosica 신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시골에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토기로 만든 오븐을 생각해 볼 만하다 한다. 그에 따르면 대개 집 밖 길가에 설치되어 주식인 얇은 빵을 굽는 데에 사용하는 이러한 오븐은 낙타나 당나귀 같은 동물의 배설물에 소금을 넣어 떡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 말린 것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일정 기간 이렇게 사용된 것들은 소금기가 빠져나가고 나면 대개 길가에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소금이 소금의 고유성을 상실하면 버려지듯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그 고유성을 잃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복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제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의 우리가 인류와 세상에 대해 져야 하는 부채 의식은 더 커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알고 있고, 그리스도의 빛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 줄 것인가 고민하면서 겸손하게 그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빛이고, 세상에 어떻게 맛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고 또 사람들이 실제로 맛을 느끼도록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렇지만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ㄴ)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이라면, 우리는 짓밟히고 말 것이다. 우리가 그저 다른 사람을 비추는 척만 하고 있으면 우리는 결코 빛이 아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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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너희는 세상의 빛”(마태 5,13-14)이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세상에서 증거하고 살아가는 데에 기준이 될 만한 내용을 상징적인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고,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예방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사회를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의 삶을 오염시킬 수 있는 세균으로부터 보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는 도덕적인 타락이나 죄에 저항하고, 정직과 형제애의 가치를 증거하며, 세속적인 스펙 쌓기나 권력과 부를 지향하는 사회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문제가 됩니다. “소금”인 제자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다 그러하지만, 매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수를 털고 일어나 다른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기 위해 매일 용기와 인내로 다시 시작합니다. “소금”인 제자는 입에 발린 아첨이나 칭찬을 추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건설적인 현존을 위해 노력하며, 섬김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릅니다. 실로 이러한 태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이미지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신 대로 빛입니다. 빛은 어둠을 흐트러뜨리면서 우리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을 몰아낸 빛이시지만, 세상과 개인 안에는 아직도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복음을 선포하여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입니다. 우리의 빛은 우리의 말을 통하여서도 비춰질 수 있지만,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16절) 하시듯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비쳐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다른 이들을 도와 우리의 착함과 자비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께 인도할 때 빛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설 자리가 별로 없는 좁은 세상 안에서도 신앙을 살아내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추방하며 비방을 없애고 위선과 거짓으로 훼손된 상황에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을 때 빛입니다. 빛을 비추기 위해서, 그러나 나의 빛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이 누구에게나 비칠 수 있기 위한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등과 죄라는 조건이 있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 세상에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폭력과 불의, 그리고 억압에 맞서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안전한 자기 울타리 안에 숨거나 움츠러들 수 없습니다. 교회 역시 자기 안으로 물러날 수 없으며, 복음화와 봉사의 사명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정신)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5) 하셨습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관대함과 부드러움으로 자신을 늘려갑니다. 이런 것은 세상의 정신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빛이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작고 소외된 이들의 외침을 듣습니다. 이는 교회가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연장하도록 역사 안에서 부름을 받은 순례자로서의 공동체임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복음인 말씀과 모범으로 사람들 가운데, 모든 이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2월 9일 삼종기도 훈화, 영문에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