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에 교황 펠라지우스 1세(Pelagius I, 561년 사망)께서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 일부를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로마로 모셔와 열두 사도 대성당Basilica dei Santi XII Apostoli에 함께 안치한 것이 두 사도를 한 날에 축일로 지내게 된 연유이다.
성 필립보 사도(3~80년?)는 사도들 명단(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4 사도 1,13)에 등장하는 열두 사도 중 한 분이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지목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 사도의 직업 역시 어부였을 것이다. 시몬과 안드레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으며 필립보는 이에 순명했고, 뒤이어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였다.(요한 1,43-48) 성령 강림절 이후 사도의 행적은 거의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를 때, 사도는 주로 그리스를 무대로 활약하였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에페소에서 멀지 않은 오늘날의 튀르키예 남서부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거꾸로 못 박힌 십자가형이나 참수형으로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필립보 사도는 신약 서간문인 필립보서와 관계가 없고,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필리포스와도 관계가 없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5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때 예수님께서 “빵을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묻자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한 제자였고(참조. 요한 6,5-7),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는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한 이었으며(참조. 요한 12,20-23), 최후의 만찬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한 제자였다.(참조. 요한 14,8-9) 필립보 사도는 룩셈부르크나 우루과이의 수호성인이며 제빵사들의 주보 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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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형제라는 칭호를 받고 교회의 튼튼하신 기둥되셨네. 시온성 첫 주교로 착좌하시어…」(고유 성무일도 독서기도 찬미가 중에서)라고 노래하는 성 야고보 사도(62년경 순교) 역시 열두 사도 중 한 분으로 오늘 기념하는 분은 알패오의 아들인 이른바 작은 야고보이다.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다. 2세기 초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견해에 따를 때, 열두 사도 중 야고보라는 예수님의 제자는 두 분이다. 성 예로니모께서 지지하셨던 견해에 의하여 두 분 야고보는 7월 25일에 축일을 지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그리고 오늘 5월 3일에 기념하는 소위 작은(小) 야고보(주님의 형제 야고보-마태 13,55;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르 3,18)이다. 이런 전제 아래,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작은 야고보의 아버지는 알패오이고 어머니는 성모님의 누이 클로파스의 마리아이므로 작은 야고보는 성모님의 조카이자 예수님과 이종사촌 간이 된다. 마르 2,14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말이 있으므로 마태오와 작은 야고보는 마태오와 형제간이 된다. 제베대오의 아들을 큰 야고보로, 알패오의 아들을 작은 야고보로 부르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고 키가 작았거나 나이가 적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고, 작은 이들의 상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의 어느 2층 방에 모여 있던 열 한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 사도는(사도 1,13) 바오로 사도가 회심 후 처음으로 접촉한 사도였을 것이다.(참조. 사도 15,13-29) 바오로 사도는 야고보 사도를 “주님의 형제”라고 부르며 다시 방문한 적이 있고(갈라 1,19), 자기 서간문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야고보 사도에게 나타나셨다고 언급하기도 한다.(1코린 15,7) 사도 베드로께서 자신이 기적적으로 감옥을 빠져나온 사실을 알려주라고 이른 사람도 야고보 사도이다.(사도 12,17)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성 야고보는 오순절 후에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따를 때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서 제1차 예루살렘 사도 회의(공의회)를 관장하였고, 이때 사도는 처음에 구약의 계율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베드로 사도의 견해를 받아들여 비유다계 그리스도인에게 4가지 관행만을 따르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대신하여 최후의 심판을 선언한 이였다.(참조. 사도 15,13-21)
4세기의 주교였던 에우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264~340년)는 야고보 사도를 두고 “그는 성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었을 뿐 아니라 홀로 성전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고 무릎을 꿇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의 무릎은 낙타 무릎처럼 딱딱해졌다.…그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져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라는 기록을 남긴다. 병자성사에 관하여 중요한 내용(야고 5,14)이 들어있는 신약의 야고보 서간 저자라고 통상 생각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야고 1,1)로 시작하는 이 서간문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유다인으로서 개종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보낸 일반 서신이었을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우루과이의 수호성인이며 약사藥師나 죽어가는 이들, 모자를 만드는 이들의 주보 성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