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소명만을 생각하며 거친 광야에서 모진 생활로 극기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여태껏 누려보지 못한 풍요의 삶을 사는 오늘날의 인류에게도 시대를 초월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그는 진실했다. 사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살았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을 두고 사람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7-11) 하셨다. 요한은 이처럼 꾸미거나 부풀리지 않으며, 소박하고 정직한 삶, 그 누구도 아닌 그만의 삶을 온전히 살았다.
그는 겸손했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하면서 한사코 자기가 가리켜야 하는 분만을 강조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나름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도 세례자 요한은 조용한 겸손을 산다. 거창한 겸손도 아니고, 가식적인 겸손도 아니며 감동적인 겸손을 끝까지 산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깜박이는 신호가 아니라 신호가 가리키는 바로 그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그분을 보아야만 한다고 힘차게 깜박거렸다.
그렇지만 그는 구체적인 현실주의자였다. 무수히 몰려오는 죄인들을 공감과 안타까움, 눈물로 안아주며 그들에게 세례의 물을 부으면서도 본질에서는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세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구체적인 삶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최소의 음식으로 연명하는 자신을 가리키며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하였고, 남들에게 요구해야만 하는 직분이나 권력을 위임받아 이를 행사할 수 있었던 이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3.14) 하고 일렀다.
그는 의로움에서 거침이 없고 불굴의 신념을 살았다. 앞뒤가 안 맞는 이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3,7 루카 3,7)라는 호된 질책으로 그들이 깨우치기를 호소했고, 동생의 여자를 빼앗았던 왕에게마저 “여러 차례” 경고하다가 결국 감옥에 갇혀 수난하고 어처구니없이 목이 잘리고 말았다.(참조. 마태 14,3-12) 피터 볼프강Peter Wolfgang이라는 이는 「오늘날까지 온 세상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는 까닭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언제 어디서나 (여러,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불법적인 간음’을 자행하는 이들을 고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유혹에 빠진 약한 이들에게 질 것이 뻔한 싸움을 걸어 끝내 지고 만 세례자 요한 같은 이들이 오늘날 진정 강한 이들이다.
올바름을 생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올바름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해야겠지요? 우리는 어쩌면 올바름을 알기 위해 순례길에 나선 나그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로움에 거침없는 불굴의 신념을 지닌 성인.
세례자 요한의 행적에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주말입니다.
세례자 요한, 딱 대쪽같은 양반. 슬렁슬렁 사는 삶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