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일 ‘가’해(마태 10,37-42)

by 민쓰

1독서(2열왕 4,8-11.14-16ㄴ)는 수넴 여인과 그녀의 남편이 엘리사 예언자에게 베푼 환대를 전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대접하며 머물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다. 이에 엘리사는 자녀가 없던 그 부부에게 아들을 약속한다. 이는 단순한 보상의 논리가 아니라, 무상으로 베풀어진 환대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다시 흘러넘치는 모습이다. 곧,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사랑의 순환이다.

2독서(로마 6,3-4.8-11)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마 6,11)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마태 10,37-42)은 마태오 복음 10장의 파견 설교를 마무리하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파견받은 이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조건을 세 번 제시하시고(37-38절), 이어서 파견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해 여섯 번이나 강조하신다.(40-41절) 이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급진적이고도 전폭적인 제자직과,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약속된 은총을 동시에 드러낸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 위해 파견된 존재”(참조. 마태 10,8),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된 우리가 이제 안심하며 복음을 전하러 나간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인간적 사랑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요청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중심에 자리 잡을 때, 다른 모든 사랑도 제자리를 찾게 된다.

합당하다(악시오스, ἄξιος, axios)”라는 말은 어떤 자격 요건을 갖추거나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저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한쪽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의 ‘무게’가 놓여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감히 그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삶이 놓인다. 그러나 이 균형은 인간의 힘만으로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상응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 무게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은총이다. 우리의 몫은 그 사랑을 깨닫고, 그에 응답하려 애쓰며, 부족함을 겸손하게 하느님께 맡긴다.

반복되는 “받아들이는 이”(데코메노스, δεχόμενος, dechomenos)는 단순히 누군가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인격적으로 환대하는 이다. 파견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결국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파견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결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 작은 행위조차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주님의 합당한 종이시며 환대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

–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합당한”(그 무게에 상응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 내 삶 안에서 그리스도보다 앞서는 것(합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환대하는가?

연중 제13주일 -23 / 환대 / hospitality(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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