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기 상권에서 보는 ‘가족’, 그리고 부르심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깊은 열망을 보시고,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우리를 위한 배려를 멈추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행여 우리의 말이 들리지 않을까 두려워해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들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만을 골라 언제나 풍성하게 베풀어주신다.

사무엘기 상권은 이러한 우리의 갈망, 경청, 마련하심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이다. 특별히 왕을 갈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이다. 주님께서는 간절히 통치자를 갈망했던 사람들의 소리를 잘 알고 계셨고, 그들에게 가장 좋은 몫을 주시고자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못된 것을 보시며 알고 계시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셨다.

사무엘기 상권은 책의 이름이 된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나 한나가 정작 어머니가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한나는 평생 자식이 없이 어머니가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아기를 얻지 못한 한나는 무척 고통스러웠고 가슴이 아팠다. 두 아내 중 하나였던 한나는 남편 엘카나의 다른 아내 프닌나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아이만은 얻을 수가 없었다. 프닌나가 아기를 바라는 한나를 업신여기며 조롱하고 괴롭히며 화를 돋우기까지 할 때도 한나는 그저 울기만 하고 먹을 수조차 없었다. 슬픔과 절망 속에서 한나는 실로에 있는 주님의 성전에 가서 봉헌물을 바치고 흐느껴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지만, 아기를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성전의 사제인 엘리가 한나를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간 여자로 오해하며 나무라는 말을 했다가 한나의 하소연을 다 듣고,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라고 말했던 그해에 한나는 비로소 아기를 얻었다.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라며 아기에게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한나는 “주님께 (아기를) 보여드리고 언제까지나 그곳에 살게 하겠다”라고 약속했다.(참조. 1사무 1,19-22) 이처럼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셨고, 한나 역시 주님을 기억했다.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그 주님을 기억한다는 바로 이 내용이 사무엘 상권 1장과 사무엘기 상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누군가가 내게 무엇을 주었으니 나도 그에게 무엇을 돌려준다는 식의 거래나 교환 개념이 아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굳게 믿는 언약에 따른 결속을 말한다. 사무엘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기억하라고 계속 강조하고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은 점차 하느님을 잊어가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적인 욕망에 정신이 팔려 주님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여 잘 각색하면 TV 드라마로서 큰돈을 벌 수 있을 것도 같은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사무엘기는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 거칠고 이기적인 야심을 가진 사람들, 시련 속에서도 굳게 다져져간 우정, 거인들과의 전쟁, 사악한 아들과 이에 동조하는 군사들, 후계자를 두고 갈등하면서 걸맞지 않은 왕좌에 앉아 불안정한 임금… 이런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 모든 일이 하느님으로부터 잊혀졌다고 생각하여 깊은 상심에 빠졌던 한 여인이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며 자신이 어렵게 얻는 한 아들을 봉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자기를 들어주신 주님을 기억한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는다. 왕이 될 재목이었음에도 목동으로 살아가던 다윗을 만나기까지 인내롭게 기다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나 역시 사랑하는 귀한 아들을 얻고 기쁨에 떨며 그 아들을 주님께 바친다.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1사무 1,26-27) 그렇게 말한 한나는 몇백 년이 한참 흘러 메시아를 임신한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부르게 될 이른바 ‘성모님의 노래(Magnificat)’를 예고하는 찬송가를 부른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없습니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 하느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1사무 2,2) 하고 노래를 부른다. 주님께서 그녀를 보셨고, 아셨으며, 그녀를 보살펴주셨다. 주님께서 그녀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녀는 주님의 현존을 느꼈으며 찬양으로 응답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사실이 사무엘 상권의 핵심 교훈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백성을 들으셨고 응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자 누군가를 부르실 때도 들으신다.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1사무 3,10)에서 보듯이 사무엘은 자기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한다. 그렇게 예언자 사무엘은 평생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 것이고, 해를 거듭하며 하느님 백성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는 특별히 반복적이면서도 점점 더 절박해지는 백성들의 왕에 대한 요구를 듣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장에서 그들을 이끌고, 그들의 땅을 지키며, 그들의 재산을 보호해 줄 강력한 군주와 통치자를 원했다. 다른 나라들에는 이미 있었던 왕이 이스라엘에는 왜 없느냐고 이스라엘 백성은 부르짖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신다. 그러나 이러한 청원이 성취될 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다. 곧 하느님이 그들의 왕이시며 그들의 통치자요 그들의 보호자이심이 분명한데, 그들은 그 하느님을 두고 왜 다른 왕을 원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은 계속되어 요구로 바뀌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특별한 요청이 되어 간다. 언젠가 한나가 기억했던 주님을 이스라엘 백성은 금방 잊고 만다. 마침내 그들이 원하던 왕을 얻었으나 그리 좋은 왕은 아니었다.

사울은 불안정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성질이 급하고 게으르기까지 하지만 처음에는 “키가 크고 잘 생긴”(1사무 9,2) 사람으로서 용감하여 백성에게 봉사할 왕의 자리에 적합하게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권력으로 타락하면서 불충실해지고 주님의 예언자를 무시하기까지 한다. 그는 자기 아들과 자기 후계자를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결국 그 자신의 칼에 맞아 쓰러진다. 사울 왕의 끔찍한 리더십 중에 하느님의 백성을 걱정하여 상심에 빠진 사무엘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다윗을 부르신다. 다윗은 소심하고 이기적인 사울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인내로웠으며 기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이었다. 물론 다윗도 흠이 있는 사람이어서 죄가 드러날 사람이었으나 필리스티아인들의 거대한 골리앗 장수에 맞서기 위해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돌멩이 다섯 개를 담아 용감하게 나아가는 겸손한 시작으로 복수심과 교만에 가득하여 자기 아들마저 죽이려 했던 사울 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주님을 잊게 되면 사울에게서와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주님께서는 보시고 아시며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지상의 임금만을 원하는 이들은 금세 주님을 잊고 만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마저 잊어버린 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무엘 상권은 다윗 왕과 그의 통치가 펼쳐지기 위해 발판이 되는 이스라엘 최초의 실패한 왕에 관한 역사이면서 동시에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교훈적인 이야기들 안에 주님을 잊지 않은 한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나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결코 자신을 잊지 않으실 것을 믿고 인내롭게 기다렸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나처럼만 했더라면 그 어떤 왕도 필요 없이 오직 하느님이 그들의 왕이심을 기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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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이름: 우리가 현재 사무엘기 상권과 하권으로 부르는 책은 과거에 ‘제1열왕기’와 ‘제2열왕기’라 불렀고 오늘날 우리가 열왕기 상권과 하권으로 부르는 책들을 각각 ‘제3열왕기’와 ‘제4열왕기’로 불렀는데, 이를 사무엘기와 열왕기로 나눈 것이다. 사무엘기라는 이름은 사무엘 예언자를 이 책의 저자로 여긴 옛 라삐 전승에서 비롯된다.

2. 책의 내용: 일종의 “부록”인 2사무 21─24장을 떼어 놓고 보면 현재의 사무엘기는 연대순으로 이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1사무 1─7) 사무엘이 태어나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자, 대판관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배경은 실로에 있는 계약 궤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이다.

사무엘이 늙자, 외부의 위협으로 불안해진 백성은 그를 찾아와 임금을 세워달라고 요구한다. 신정 제도를 옹호하는 사무엘 예언자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선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이스라엘 원로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울을 임금으로 세운다. 그런 다음에 사무엘은 물러난다. 왕정에 대한 논란과 사울에 관한 이야기들이 1사무 8─12장, 곧 둘째 부분을 이룬다.

셋째 부분은(1사무 13─15)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아말렉족과 벌인 전쟁을 다룬다. 사울이 전쟁들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두 가지 죄를 범하고, 이 때문에 사무엘은 그에게 암시적인 말로 왕좌에서 쫓겨나고 다윗이 그 뒤를 이으리라고 알려 준다.

넷째 부분으로, 다윗이 사울 앞에 소개된 때부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성별될 때까지의 이야기는 1사무 16장에서 2사무 5장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다윗의 왕위 등극사”에서 그려진다. 다윗은 어릴 때 사무엘에게 성별되어 사울을 섬기다가 필리스티아의 거인을 이기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쌓아 모든 사람, 특히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울은 병적인 시기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쟁자 다윗을 제거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자 결국 도망을 쳐 방랑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필리스티아인들을 섬기게 되지만 군대를 이끌고 동족을 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마침내 사울과 요나탄이 길보아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다윗은 사울의 후계자들과 싸움을 벌여 잇단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사울의 집안은 갈수록 약해진다.

다섯째 부분은(2사무 6─8) 사무엘기에서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는 2부작의 연결 부분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실로의 궤를 안치하는데, 이는 자신이 점령한 성읍을 왕국의 수도로 성별하는 행위이다. 또한 나탄의 예언은 다윗의 편을 들어 다윗 왕조가 왕국의 중심이 되도록 뒷받침해 준다. 8장의 기록은 예루살렘 왕국의 창시자가 실제 왕국의 정복자였음을 상기시킨다.

2부작의 후반부는 2사무 9─20장의 내용인데, 여기에 1열왕 1─2장도 덧붙여야 한다. 여기에는 여러 사건이 얽혀 있는데, 결국에는 솔로몬의 등극으로 끝을 맺는다. 솔로몬의 탄생과 이를 둘러싼 여러 상황, 그리고 솔로몬의 등극에 장애가 되었던 다윗의 아들들, 곧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등이 어떻게 제거되었는지를 들려준다.

“다윗의 왕위 계승”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삽입된 2사무 21─24장은 두 편의 시가와 여러 인물에 관한 기록, 그리고 두 가지 자연재해와 그 액땜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이 이야기들은 역사적, 종교적 면에서 중요한데도 앞 장들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 사무엘기와 이스라엘의 역사: 사무엘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기간을 다루는데, 적어도 그 마지막 시기는 정확하게 밝힐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노년기, 곧 기원전 970년에 솔로몬이 즉위하기 몇 해 전까지의 기록을 보게 된다. 판관들의 역사에서처럼 초기의 일화들은 그 연대를 분명히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이 시기와 관련된 사무엘기의 전승들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필리스티아의 지배에 관한 정보, 특히 필리스티아인들이 독점했던 철기류 제조에 관한 기록(1사무 13,19-21),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장소들을 많이 언급하는 전쟁 이야기들(1사무 13; 17; 31), 도망 다니던 다윗에 관한 일화 등이 이에 속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다윗과 사울 집안 사이에 얽힌 이야기와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갈등은 한층 역사적 근거가 분명한 전승이다. 2사무 8장이 들려주는 다윗의 전투들도, 비록 외적인 증거들은 없지만, 결코 거짓이라 할 수 없다. 기원전 10세기 초에 다윗 왕국이 건설된 시기는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방어적 처지에 놓여 있을 때였고,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통치 아래 번영을 구가하며 그 세력이 지중해와 홍해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다윗의 신하들에 관한 언급과(2사무 8,15-18; 20,23-26) 2사무 24장이 들려주는 인구 조사는 영토를 조직적으로 정비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가진 것이라곤 군대밖에 없던 사울 시대 이후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 준다. 반면에 사무엘기에서 왕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힘들다. 필리스티아인들의 위협이 원로들에게 사무엘을 찾아가 임금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언제 어디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사울을 암몬인들의 정복자이자 야베스 길앗의 구원자로 소개하는 1사무 11장의 전승을 잘 살펴보면 왕정 시작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승이 사울의 즉위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과 역사적으로 일치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울이 어디에서 왕위에 올랐는가? 라마에서인가, 미츠파에서인가, 길갈에서인가, 아니면 여러 장소에서 거듭 즉위하였는가? 사울의 통치에 관한 기록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1사무 13,1은 그의 통치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음을 암시해 준다.

4. 편집 요소들: 사무엘기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기록한 연대기가 아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여러 자료를 한데 모은 문학 작품이다. 이 자료들 가운데에는 대단히 오래된 것들도 있다. 이 작품은 사울과 다윗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두 전승들을 모아 놓고 있지만, 이 전승들이 기록되기 이전에 본디 그 원초적 사료가 어떠했는지를 밝혀낼 수는 없다. 이 기록들은 아마도 솔로몬 치하에서 편집되고,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 보충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사무엘기가 “신명기계”(여호수아기-판관기-사무엘기-열왕기)라고 하는 역사학파의 작품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신명기계 작품은 어법과 문체로 쉽게 구별된다.

사무엘기의 첫 부분에서(1사무 1─7) 중심인물은 사무엘이다. 이 인물은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소개되는데, 때로는 성소와 관련지어지며 예언직의 사명을 받는다. 동시에 저자는 그에게서 당대의 참된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1,27-28 참조). 이것은 사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사무엘의 선택을 강조하는 이유는 두 임금을 성별한 그가 진정 주님의 마음에 드는 심부름꾼임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1─7장의 다른 요소들은 사무엘기 전체의 주요 관심사들을 고려해야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일례로서 계약 궤에 얽힌 사건들이 매우 상세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이 사건들이, 다윗이 세운 도성의 보호자로 삼은 거룩한 궤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2,27-36에 나오는 “믿음직한 사제”에 대한 예고는 솔로몬 시대에 제정된 차독 가문의 사제직에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2,7에서 간결하게 표현된 높임과 낮춤이라는 반명제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에게 맞서는 사무엘의 이야기뿐 아니라 사울과 그의 집안에 맞서는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렇게 사무엘에 관한 일화는 이어서 나오는 일화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1─6장을 구성하는 옛 전승들의 편집자는 왕정 지지파로 볼 수 있다. 7장에서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관심과 문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역사가가 판관기의 역사를 완성하려는 의도로 7장을 재편집한 것이다.

5. 왕정에 관한 교훈: 이야기 저자들의 정치적, 종교적 경향을 살펴보면 사무엘기의 구성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사실 사무엘기는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를 들려주는 긴 이야기라기보다 하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왕정이다. 저자는 왕정 제도의 애매모호함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통치자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문제는 왕정 제도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풀려 나갔다. 주님과 그분의 대리자인 사무엘이 결국 사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왕정을 먼저 요구하였던 백성이 즉각 단죄를 받은 것은 아마도 왕정이 인간적 원의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의 군주 제도는 민주적인 것도 전제적인 것도 아니라 오직 신정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사울은 개인적으로는 그의 이름이 의미하듯 백성이 ‘요구하였기’ 때문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놀라운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경건한 사람의 권위를 드높여 준다. 사무엘기는 사울의 파멸을 불러온 잘못들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사무엘기는 예배의 대상과 관습과 인물에도 관심을 가진다. 만져서는 안 될 계약 궤와(2사무 6,7) 예루살렘의 제단에(2사무 24) 관한 일화는 그 좋은 예들이다.

사무엘기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임금은 다윗이다. 저자는 다윗이 용맹한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음을 드러내고 그가 거둔 전공들,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호감, 그의 관대함과 겸손 등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애초부터 이상적 인물로 부각시킨다. 이 이상적 임금이 주님께 보인 순종의 정신과 그의 탄원,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의 뜻을 묻고자 한 사실 등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인물이었기에 다윗은 간음을 저지르고 난 뒤에 나탄 예언자의 질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탄은 이스라엘에서 임금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윗에게 일깨워 주었다. 한편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후손은 벌을 받지 않는다. 그는 자식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리를 물려받으리라는 보장을 받는다. 이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서서히 부상한다. 사무엘기는 결국 유다 왕조를 옹호하는 작품이다. 나탄의 예언에 따르면(2사무 7) 임금들이 개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기는 해도 다윗 집안이 예루살렘의 왕좌를 끝까지 지키게 되어 있었다. 이 예언의 골자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편집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p><p>유다의 군주 제도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믿었던 시기에 나왔을 이 종교적 이념은 다행스럽게도 사무엘기가 구원 역사 안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훗날 언젠가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큰 잘못을 저질러 왕국 전체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에 결정적 심판이 내려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 주신 영원한 보증을 계속 믿으면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약속에 합당한 인물이 나오기를 고대하게 된다. 그분이 바로 이상적 임금이신 메시아로서, 인성으로 볼 때 그분은 분명히 기원전 천 년 경에 주님께서 뽑으신 이의 후손이시다.」(주석 성경에서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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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무엘의 탄생 1.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2.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3. 엘카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을 떠나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사제로 있었다. 4. 제사를 드리는 날, 엘카나는 아내 프닌나와 그의 아들딸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6.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7.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남편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9. 실로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섰다. 그때 엘리 사제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11.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그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14. 그를 나무라며,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자 한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16.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8. 한나는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그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19.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20.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21. 남편 엘카나가 온 가족을 데리고 주님께 주년 제사와 서원을 드리러 올라가는데, 22. 한나는 올라가지 않았다. 한나는 남편에게 말하였다.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주님께 보이고,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살게 하겠습니다.” 23. 그러자 남편 엘카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 좋을 대로 하구려.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리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이오.” 그리하여 한나는 집에 남아 아들이 젖을 뗄 때까지 키웠다. 24. 아이가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삼 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25. 사람들은 황소를 잡은 뒤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 26.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27.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28.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2장 한나의 노래 1. 한나가 이렇게 기도하였다.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제 이마가 주님 안에서 높이 들립니다. 제 입이 원수들을 비웃으니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2.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없습니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 하느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3.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놓지 말고 거만한 말을 너희 입 밖에 내지 마라. 주님은 정녕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의 행실을 저울질하시는 분이시다. 4.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 비틀거리는 이들은 힘으로 허리를 동여맨다. 5.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다시는 일할 필요가 없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6.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신다. 7.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는 분,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8.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기둥들은 주님의 것이고 그분께서 세상을 그 위에 세우셨기 때문이다. 9. 주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발걸음은 지켜 주시지만 악한 자들은 어둠 속에서 멸망하리라. 사람이 제힘으로는 강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10.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천둥으로 호령하신다. 주님께서는 땅끝까지 심판하시고 당신 임금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음받은이의 뿔을 높이신다.”」

사제는 사제 자신이 아니다(어머니의 기도; 1사무 1,5-20)

 – 풀톤 쉰Fulton Sheen 대주교(1895~1979년)

성소聖召를 바라는 어머니의 기도로서 전형적인 한 예가 바로 한나의 기도이다.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1사무 1,5-6)에 한나는 불임이었다. 한나는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 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1사무 1,11)라고 사제로 봉헌하겠다며 주님께 기도하고 약속한다. 한나는 기도 중에 세 번이나 자신을 “여종”이라 칭하며 주님을 “만군의 주님”이라 부른다.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참조. 루카 1,46-55)은 한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사제 엘리는 그녀를 술 취한 여자로 보고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1사무 1,14)라고 나무란다.

그러나 한나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직 그녀의 영혼을 주님께 쏟아부었을 뿐이었다. 때가 이르러 한나는 아들을 얻고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1사무 1,20)

한나는 아들을 원했으나 하느님께 봉헌할 아들을 구했다. 한나는 사무엘을 성전에 바쳐 그가 성전에서 사제를 도와 “주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어린 사무엘은 주님과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1사무 2,26)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소가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주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서 나온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어떤 신학생 그룹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들 중 적어도 4분의 3은 그들의 성소 개발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신 분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2티모 1,5)라는 구절에서 티모테오의 성소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에 관해 말해준 바 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라는 젊은 사제를 칭찬하며 그 원천이 경건한 가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 집안에서 성소가 결실을 맺은 것은 3대에 걸친 돈독한 신앙이었다. 초대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티모테오가 사도 바오로의 친척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소스토모, 바실리오와 같은 성인들의 위대한 어머니들처럼 어머니들의 성실함과 거짓없는 신앙이 교회의 유산을 낳았다. 영국의 샤프츠베리Lord Shaftesbury 경(1801~1855년)은 “나에게 그리스도인 어머니 한 세대를 준다면 1년 안에 이 지구의 얼굴을 바꾸어놓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무엘 상권을 통해서 보는 성경의 가족이라는 가치

 – 로버트 배런Bishop Robert Barron 주교(1959~)

성경에 나오는 ‘가족’이라는 가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가치와는 다소 다를 수가 있다. 흔히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가치는 정서적인 유대나 개인적인 결속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감상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은 전적으로 다른 측면에서 ‘가족’이라는 가치를 보도록 촉구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의 저자들이 ‘가족’이라는 가치에 접근하는 방식은 전혀 낭만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거칠고 무뚝뚝하며 까다롭다.

사무엘기 상권의 첫 장에 나오는 한나의 이야기는 특별히 이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갖지 못했던 한나는 매년 실로라는 곳에 있는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 아기를 얻게 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해 너무나도 울부짖으며 주님께 간구하던 그녀를 보던 성전의 사제요 예언자 엘리가 그녀를 술에 취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제 엘리는 제발 술 좀 깨라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작정이냐고 나무랄 정도였다. 사실 한나에게 이보다 더 심한 억울한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괴로워하는 것도 모자라 성전의 사제로부터 공개적인 모욕까지 당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한나는 강한 용기를 발휘하며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1사무 1,15)라고 대답하던 한나는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나지르인nazirite으로 두겠습니다’라는 말이다. 나지르인은 ‘성별聖別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전적으로 평생을 바치는 고대 이스라엘의 수도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조. 판관 13,7)”(1사무 1,11)라고 기도했었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1사무 1,20) “아이가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서원을 이행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갔다.”(1사무 1,24) 그리고 사제 엘리에게 아들을 맡겨 하느님의 사람으로 키워주시도록 바친다. 그렇게 하여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중추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성장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사울과 다윗의 여정에 강력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를 따르는 많은 예언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무엘은 어머니가 온 마음으로 원했던 아들이자 해를 거듭하며 간절히 바라던 아기였다. 어머니 한나 역시 아기를 처음 두 팔에 안았을 때 여느 어머니와 아들처럼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신비하고도 강한 연결을 가슴 깊이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 한나는 아들을 놓아 준다. 인간적으로 무척 가슴 아팠을지라도 어머니 한나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아들이 자기의 사명을 찾도록 한다.

어머니 한나와 아들 사무엘의 이야기를 잃었다가 성전에서 찾은 아들 예수와 성 요셉과 성모님 간의 이야기로 나란히 놓고 보면 대단히 유익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아들을 잃고 사흘이나 잠 못 이루며 백방으로 아들을 찾아 헤매던 성모님과 성 요셉은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쓰라린 눈물의 체험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사흘 뒤 마침내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마침내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너무나도 태연한 아들의 모습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무척 놀란 어머니 마리아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며 원망이 섞인 어조로 말하는데도 아들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대답한다. 어머니의 격한 감정에도 아들은 조용하게 성전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두 이야기는 감정과 개인적인 느낌이 아이의 삶에 극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우선시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각자 자신의 사명을 찾는 것이며,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아무리 강하고 우선적으로 대두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각자의 사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가르쳐준다. 또한 아무리 정당하고 이해할 만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의도보다 우선시될 때 그것은 자기중심적이 되고 만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성모님과 한나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면서 가족에 대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몇 마디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양성을 받고 있었던 어떤 제자 중 하나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무뚝뚝한 어조로 냉정하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셨다.(마태 8,21-22)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하고 말씀하신다. 그뿐이 아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밖에 서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누가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란 말인가?’ 하듯이 “반문”하시며 당신 앞에서 당신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참조. 마르 3,32-35) 하신다.

어찌 생각하면 더 심하다고 생각되는 말씀도 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4-36) 다분히 도발적이며 심한 것도 같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성경의 원칙을 따라 영적인 가치의 우선순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메시아이시며 구세주이신 분을 따라야 하며, 주님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善이므로 그 어떤 다른 가치나 선으로 대체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타협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감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인간이 가장 민감하고도 소중하며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이는 가족이라는 가치와 대비하시면서 복음의 부르심이라는 가치를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소중한 가족이라는 가치마저도 하느님의 요청 앞에서는 내려놓아야 한다. 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하시면서 결정적으로 말씀하신다.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묵상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전문직 종사자의 꿈이나 운동선수의 꿈을 아들을 통해서 이뤄보려고 하는 아버지가 한 예이다. 그런 아버지는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위해 자녀를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기 딸에게 모든 것을 완벽으로 강요하는 어머니 역시 어느 날 자기 딸이 거대한 중압감으로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피상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단순히 너무 게으르거나 싫증이 난 나머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끼치는 역기능적인 역할을 청산하지 않고 그저 그런대로 살아가는 경우마저도 너무 많다. 반대로 자녀들이 자기 부모를 재정적이거나 정서적 안정 기반으로만 생각하여 이용하고 부모의 행복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모든 경우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나 몫이 아닌 다른 어느 한쪽 – 즉 쾌락, 명예, 체면, 성공, 심리적 욕구 충족과도 같은 것만을 가족의 중심사로 놓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가족의 관심사가 하느님의 의도와 뜻을 방해하는 장애로 부각 될 때, 이것은 근본적인 중요한 문제가 되고 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이는 가족이 하느님 예배를 최우선 가치로 놓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 식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부모는 자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책임이 자녀를 세속적 성공을 위해 잘 키워내고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만 한다. 부모는 한나와 성모님이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었듯이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정서적 이탈을 수련하고 그러한 자질을 개발해야만 한다. 성모님과 한나처럼 자신의 소중한 자녀를 기꺼이 성전에 남도록 해야만 한다.

침묵의 힘(1사무 1,10-13)

– 아를의 성 체사리우스St. Caesarius of Arles(470~542년)

(* 프랑스 아를의 주교인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8월 27일)가 512년경에 동정녀와 과부들을 위한 큰 수녀원을 세우고, 그의 동생인 성녀 카이사리아(또는 체사리아)를 초대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즉시 200명이 넘는 회원들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고, 젊은이들의 교육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 수녀들은 고유한 복장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이 수녀회의 성당 장식은 순수한 목재나 천만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 마리아 사랑넷)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자주 침묵으로 조용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시끄럽고 떠들썩하게 기도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기도의 열매를 빼앗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직 신음과 한숨 소리만 들려야 합니다. “하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1사무 1,10.13) 한 것처럼 정말이지 우리의 기도는 복된 사무엘의 어머니 거룩한 한나의 기도와 같아야 합니다. 모든 이가 이 말씀을 듣고 본받도록 합시다. 특히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은 당황하지 말고 가까이에서 기도하는 다른 이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주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 울음소리를 못 들은 체 마옵소서.”(시편 38,13 –최민순 역)라는 예언자의 말씀에 따라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숨과 신음으로 기도합시다. 거듭 말하거니와 큰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우리 하느님께 부르짖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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