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12월 27일)

by 엘 그레코, 성 요한 사도, 1605년, 스페인 프라도 박물관

성탄 8부 기간에 지내게 되는 성 요한 사도의 축일은 축일의 날짜가 성인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예수님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말씀의 육화 신비를 기리는 사랑의 축제 기간에 아기 예수님과 함께 기려지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동생이다. 요한은 원래 세례자 요한의 열심한 제자요, 다른 유다인들과 같이 구세주의 임하심을 하루를 천추와 같이 고대하며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스승 요한이 지나가시는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죄를 없애버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십니다.”(요한 1,29)하고 가리키며 구세주이심을 깨우쳐 주자 요한은 즉시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아와 같이 최초의 주님의 제자가 되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처음 주님께서 기거하시던 집을 찾아간 시각도 잊지 않고 “때는 이미 오후 네 시 경이었다.”(요한 1,39)라고 기록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그들은 그물을 손질하다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나섰다.(마르 1,19-20) 이로부터, 집이 경제적으로 윤택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실(요한 18,15)이나 살로메(참조. 마르 15,40;16,1)로 알려지는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두 아들을 하나는 왼편에 또 다른 하나는 오른쪽에 앉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청탁(마태 20,20-28)과도 연결된다.

이들 형제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또 흥분을 잘하였으므로(마르 10,35-41), 예수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들(보아네르게스Boanerges)”라고 불렀다.(마르 3,17) 요한은 사도 중에서도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이 주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셨을 때, 타볼 산에서 모습이 변하셨을 때,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참관자가 위의 세 명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추측할 수 있다. 요한 역시 주님의 각별한 애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받들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사마리아 동네에서 냉대를 받으실 때 그는 야고보와 함께 화를 내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카 9,54)”하는 말까지도 할 수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면서 “당신들은 어떠한 영에 속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루카 9,56)하고 타일러 주셨다.

얼핏 보기에 여성다운 부드러운 인물같은 상상이 들지만, 주님께서 “당신들은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하셨을 때,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서슴지 않고 “마실 수 있습니다.”(마태 20,22 마르 10,38-39)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의 수난이 시작되자 야고보는 도망쳤고, 베드로는 “모른다.”라며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했다. 그러나 오직 요한만은 머물러 있어 성모님과 같이 칼바리아 산상에서 변모의 산에서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예수님 모습을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을 지켰다.

성경 여기저기에는 요한이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라는 표현이 많다.(요한 13,23;19,26;20,2;21,7.20) 그는 최후의 만찬 시에도 스승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요한 21,20)으로 등장한다. 더욱이,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긴다.(요한 19,25-27) 뿐만 아니라 부활날 아침에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요한 20,4), 그분의 부활을 믿었으며(요한 20,8), 티베리아 바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다.(요한 21,7)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며, 끝내 투옥된다. 성 바오로는 야고보와 케파와 함께 요한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갈라 2,9)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부활 이후에 최초의 큰 기적이 일어났을 때도 베드로와 함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의 앉은뱅이를 고쳐 준 것 때문에 그들은 감옥에서 함께 밤을 지내게 된다. 사도행전은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 사도가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사도 4,13)라고 부활의 신비를 체험한 사도를 기록한다.

44년 헤로데 아그리파에게 박해를 당해, 사도들이 각국으로 흩어질 때 그도 에페소로 피했으며 그곳 소아시아의 각 교회, 특히 묵시록에 나오는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및 라오디게이아 등 일곱 교회를 지도했다.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의 진리를 증언한 탓으로 95년에 제2의 네로라고 불리는 도미시아노의 박해가 시작되자, 잡혀 파트모스 섬에 유배를 당했는데(묵시 1,9), 그는 그곳에서 하느님이 직접 계시로 붓을 들어 저 유명한 묵시록을 저술했다고 알려진다. 96년, 도미시아노가 암살되자 이어 왕위에 오른 넬바는 추방된 신자를 전부 소환했으므로, 요한도 그리운 에페소의 땅을 다시 디딜 수가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매우 고령이었다. 에페소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그곳에서 수壽를 다하고 선종하였다. 성 예로니모에 따르면, 요한은 너무나 연세가 높아서 군중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고, 다만 간단한 말만 하였다고 한다. 너무 노쇠해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없었을 때도 그는 신자들의 부축을 받아 성당에 갔고, “아들아, 서로 사랑하라!” 하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결같이 같은 말만 거듭해 신자들이 싫증을 내도,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하였다 한다. 복음서의 요약이라고 하는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5-16)라는 구절을 기록한 그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네 번째 복음서와 편지글 3개, 그리고 묵시록이 요한, 혹은 그 제자의 저작물로 전해진다. 요한의 문장紋章은 높이 나는 독수리이다. 복음사가 마태오, 마르코, 루카 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주로 관심을 두었던 반면, 요한 사도가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기록하려고 하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저술에는 성령의 도우심에 더하여 성모님의 현존이 함께 있었으므로 그 깊이가 깊고 풍요롭다.

1세기 말경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지는 요한복음은 그노시스 이단 및 예수의 신성에 대해 구구한 이설이 떠돌 때였다. 그래서 요한은 그 이설에 대항해 올바른 것, 즉 구세주께서 위격位格으로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완수한 사도 성 요한은 전승에 따를 때, 트라야노 황제 시대에 백 살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의 수난 때 베드로의 배반을 여실히 알고 있었을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보고도 베드로를 존중하여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에게 그 기회를 양보한다. 하느님의 방식을 신뢰하면서 베드로에게 존중과 예의를 갖춘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시라면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품에 계시는 분이라면,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에 기댄 이고, 요한은 예수님과 똑같이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신 성모님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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