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22-40 또는 2,22.39-40(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나’해)

by Solomon “이제야…당신 구원을 본 것”(루카 2,29.30)

성탄 후 12일간 주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유일한 주일에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기리는 주일을 지내면서 인간의 시간 속에 들어오신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기가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라는 사실을 기념한다. ‘가족’이라는 가치가 무너져 가는 현시대에 내가 사는 ‘가족’의 가치를 돌아보는 축일이기도 하다.

성탄절에 교회가 이스라엘의 가난한 목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찬미와 찬양을 드린 사실(참조. 루카 2,1-20)을 기념했다면, 이번 주 복음은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의 신비에 관한 다른 내용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한다. ‘육화肉化’는 구체적인 사회적‧종교적 배경 안에 있는 한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성장까지도 포함한다. 이에 관해 오늘 복음의 마지막 절은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라고 기록한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 각자가 처한 한계와 특별한 상황 안에 불림을 받아 경험하고 살아가는 인간적‧영적‧정서적‧심리적 성장 과정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한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하고도 충만하게 이루시고자 우리 인간의 모든 조건을 몸소 나누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신”(히브 4,15)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모든 신생아가 그러하듯이 당신 생애의 초기에 온전히 당신 부모님께 의탁했으며,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면을 받아들이시며 인간의 일상 안에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던 부모의 사랑을 통하여 사람들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당신 생명을 선물로 내어놓을 것이다.

1.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출생 이후에 이어진 가족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태어나신 종교적‧사회적 배경도 몸소 살아내셔야만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출생 후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은 백성이요 축복의 표시로) 할례를 베풀게 되자…(40일째가 되는 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부모)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1-22) 부모들은 양羊이 너무 비싸서 양 대신에 가난한 자들의 제물인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참조. 레위 5,7;12,8) 바쳤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모는 규정된 정결례의 율법을 완수했다.

『이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2코린 8,9)” 분이었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오리게네스, 185년경~254년경)』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입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나타내고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냅니다.(성 암브로시오, 333~397년)』

레위 12,1-8에 따라서 아들을 낳은 산모는 40일 동안 부정不淨하다고 여겼고, 그 기간에는 거룩한 물건을 만지거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출산 후 “40일째”에 “정결례”를 지낸다. 22, 23, 24절 모두 “율법”이라는 말마디가 되풀이된다. 39절에서도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라고 한다. 모세의 율법이다.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루카는 예수님의 부모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임무를 열성으로 수행하였음을 기록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제물이든 부자의 제물이든 그깟 제물이나 돈 몇 푼으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마태 20,28) 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제물로 바치셔서 구약의 모세 율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될 것이었다.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탈출 13,2)라는 구약의 율법으로 정결례를 치러 거룩해지는 분이 아니라,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루카 1,35)이라고 천사가 선언한 대로 이미 거룩한 분이시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한 구약 마지막 예언서의 옛 예언대로 갓 태어나신 주님께서 당신 성전에 들어오신다.

2. “시메온…”

성전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시메온과 한나가 맞는다. “의인”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루카 2,25)였고, “예언자” 한나는 “나이가 매우 많은…과부로 지내며…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루카 2,37) 이였다. 모두 진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던 ‘주님의 가난한 이들’(아나윔)이었으니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스바 3,12-13) 하던 사람들이었다.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하느님을 찬미”(루카 2,27-28) 한다. 그 유명한 ‘시메온의 찬가’이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매일 밤 이 기도문으로 하루의 끝기도를 바친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4) 하셨는데, 시메온은 이를 이미 보아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이어서 시메온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도 장차 “내가…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지금 여기에서 당장 어느 쪽인가를 결정해야만 하고,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하듯이 당신 빛으로 우리 인생의 어둠을 비추시는 빛이신 그분을 맞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결정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루카는 시메온의 찬미가 다음에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라는 말을 통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모순을 묘사한다. 참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거짓의 유혹에 빠지는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평화와 빛이지만 칼과 고통이고, 구원이실 뿐 아니라 심판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드러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스스로 어떠한 모습인지 드러난다. 루카는 빛과 고통의 긴장 사이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의 삶을 예언한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고통에 동참할 것이고, 그분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 2,35) 이다.

『시메온이 아기를 안고 하느님을 찬미했을 때, 그는 손으로는 사제직을, 입술로는 예언직을 그분께 바쳤습니다. 사제직은 시메온이 의롭고 깨끗하게 살았으므로 항상 그의 손에 있었고, 그가 계시를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입술에는 예언직이 있었습니다. 예언직과 사제직이 자기들의 주님을 보자, 사제직과 예언직, 왕권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 안으로 옮겨 갔습니다.(시리아의 성 에프렘, 306~373년)』

3. “한나…”

성전에는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56-57) 하느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을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일생을 준비하였던 한나는 믿음의 지성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마침내 왔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렇게 한나는 인생의 황혼에서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복음사가 루카에 의하면 한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로서 예수님께서 장차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실 “기쁜 소식, 해방, 은혜로운 해”를 앞당겨 선포(참조. 루카 4,15-21 이사 61,1-2)하고 옛 예언을 성취하는 사명을 수행하였으니, 한나는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온갖 죄의 구속과 종살이로부터 해방과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빛으로 온갖 인간사가 구체적으로 변하리라는 것을 선포하였다.(참조. 루카 9,1-2)

시메온의롭고 경건한 남자로 묘사되는 데 비해 한나는 “예언자”로 불린다. 루카는 자기가 이해하는 믿음이 결코 남자만으로 표현될 수 없으므로, 남자의 건너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의 다른 측면을 표현하는 여자를 항상 배치한다. 루카는 남자를 “의롭고 독실”하다고 서술하고, 여자는 그녀가 살아온 삶의 역사와 현재의 태도로 묘사한다. 한나는 여성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인생의 모든 단계를 다 거쳤다. 처녀, 결혼한 아내, 과부, 기도하는 여성, 늘 성전에 머무르는 여성, 예언자이다. 한나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깊은 눈이 있다. 예수님에게서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이 갈망하는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될 것을 본다. 사람들은 종살이와 소외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생각하셨던 그 모습대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을 본다.

나이가 많았던 두 예언자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들만을 위해 이 기쁨을 간직하지는 않는다. 아기 예수를 통해서 자기들이 만났던 계시를 모든 사람과 공유하려고 하는 데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린다. 자신을 버리면서 더욱 가난한 자가 되어 더 큰 해방을 맛본 이들로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자기 삶으로 살아 선명하고도 단순하게 원하는 이 누구에게나 나누어 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누리는 독특한 기쁨을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과 이를 나눈다. 시메온과 한나가 그랬듯이 복음을 ① 받아들이고 이 복음이라는 주님의 공짜 선물을 ② 나누는 삶의 모습으로 시메온과 한나가 누렸던 엄청난 보상은 우리가 모두 ③ 누려야 할 기쁨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빛(진리)”과 “구원”, 그리고 인간 자체를 구원해 주실 분으로 만나 알아 모시기 위해서 두 노인 시메온과 한나처럼 영으로 가난하고, 증거하는 삶으로 항구하게 기다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부모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놓아 순명함도 본다. 이들은 “산 제물”과 “합당한 예배”의 표상이다. 이들은 우리가 살아서 만나고 죽어서 만나야 할 우리 행복의 표상이다. 우리가 오늘 이미 만났으나 우리의 죽음 후에 결정적으로 다시 뵙게 될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 일생의 염원을 표현하는 길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믿음을 두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이들, 구원을 본 사람들, 지상에 살았으나 하늘 본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사람들, 믿음으로 봉헌하고 그 믿음을 다시 돌려받은 이들이다. 예수님과 시메온, 그리고 한나의 만남은 아기와 어르신의 만남, 신약과 구약의 만남, 메시아와 세상의 만남, 약속의 성취와 예언의 만남이다. 시메온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사람의 전형이고, 한나는 여생을 평온하게 이야기하면서 마감하는 전형이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을 떠날 때 시메온처럼 고백해야 하고 한나처럼 여생을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다가 만난 기쁨을 노래하고, 예수께서 부모님 손에 들려 성전에서 봉헌되신 것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우리 부모들 손으로 우리 자녀들을 봉헌해야 한다. 또한 우리도 주님의 두 손에 들려지는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은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루카 2,39) 한다. 주님과 그의 가족들이 고향과 일상으로 돌아간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30여 년을 평범한 시골 가정에 계시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신 다음에야, 곧 ‘가족’과 ‘고향’이라는 준비 이후에야 당신의 공생활을 다시 시작하신다.

이제 갓 태어나 말도 할 수 없었던 아기 예수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사랑의 계획이 인간의 역사 안에 그려진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2) 하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살게 해준다. 이 은총이 우리 인생 여정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하느님께서 원하신 대로 살게 한다. 이 은총이 우리를 가르쳐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 형제자매들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우리의 죽음마저도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해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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