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교敎

우리가 흔히 ‘교教’라고 아는 글자는 ‘가르칠 교敎’이다. 이는 생김새나 의미가 오묘하고 깊다. 풀어 헤쳐보면,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 더하기 ‘아들 자子’ 더하기 ‘칠 복/글월 문攵’이라는 세 글자의 합이다. 그래서 이 셋의 생김새와 의미, 그리고 내력을 각각 따져보아야 한다.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는 나뭇가지 두 개가 가로 겹쳐 교차하는 모양이거나 악수하는 모양이다. 우리 역사 안에서 나무막대를 세로로 놓거나 가로로 놓아서 숫자를 표시하면서 사칙연산을 하거나 점을 치는 상황에서 사용하였다는 소위 ‘산가지’의 모양이다. 지금은 없어지다시피 한 성냥개비들의 놀이를 생각하면 쉽다. 그렇게 생긴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는 ‘사귀다, 본받다(=效), 가로 긋다, 엇걸리다, 수효數爻, 육효六爻(=역易의 괘卦를 이룬 가로획)’ 등을 떠나 ‘변變하다, 흐리다, 지우다, 말소抹消하다’라는 뜻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악수하는 모습에서 ‘사귈 효’가 된다.

‘가르칠 교敎’에서 ‘사귈 효/가로 그을 효爻’ 밑에 있는 ‘아들 자子’는 원래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가로 그은 획을 땅으로 보면서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이라느니, 혹은 가로 그은 획이 남성에게만 있는 두 개의 불알로 보아서 ‘아들 자’라느니, 껍질을 뜻하는 ‘ㄱ’과 새싹을 뜻하는 ‘十’이 결합하여 새싹을 품고 있는 씨앗이라는 의미를 새겨야 한다고도 한다. 남성성과 어린 녀석이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 담겨있다 하겠다.

칠 복/글월 문攵’은 ‘복攴’과 같은 글자이다. 이 글자는 오른손을 나타내는 ‘또 우又’와 막대기나 무기를 나타내는 모양인 동시에 소리를 나타내는 ‘점 복卜’을 합하여 손에 막대기와 같은 것을 들고 북과 같은 것을 둥둥 때리고 쳐서 소리가 나게 하는 상황이다. 다리 달린 받침대 위에 북을 놓고 두들기는 형상이라 해도 의미는 같다. 이를 ‘(등)글월 문’이라고도 하는 것은, 등을 돌리고 있는 모양새인 ‘글월 문文’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를 뿐이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여 ‘가르칠 교敎’를 보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자식을 나뭇가지나 회초리로 치거나 때려서 가르쳐 배우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지녀온 ‘교육’이라는 패러다임을 인간이 덜되고 안 된 어린 것들을 억지로라도 훈육하고 만들어가는 전근대적인 교육과,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완성된 인간인 아이들 하나하나에 담긴 고유한 조물주의 섭리를 깨우치고 발견해나가는 근대적 교육으로 본다면, 스페인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Francisco Ferrer(1859~1909년)의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자는 전근대적인 교육이다.

근대적인 교육의 흐름에서 ‘가르칠 교敎’를 글자를 써나가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풀어서 『선생과 아이가 서로 사귀어 함께 손을 잡고 동행하는 것, 아이가 신이 나서 손을 들고 기뻐하는 것, 북을 치며 춤추듯이 음악과 리듬에 맞추어 선생과 아이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가르칠 교敎’이다. (2023년 오늘 다이내믹 코리아는 선생과 아이가 ‘함께’ 이루어야 하는 ‘敎’를 그동안 둘로 나누어 아이의 인권만을 거론하다가 놓친 선생의 교권이라는 다른 한편을 메꾸느라 아프게 홍역을 치르고 있다.)

선생과 아이가 함께 이루는 교육을 근대적인 교육 패러다임이라 했지만, 사실 이것은 기원전 고대 유가儒家의 오경五經 중 ‘예기禮記’로부터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서로 돕는 것’이라 했던 오래된 미래였다. 사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간 하느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몸소 피조물인 사람이 되시고 사람과 동고동락하신 역사가 아니던가 말이다.(20180508 *이미지-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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