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극」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


‘7죄종과 네 가지 종말’-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 히에로니무스 보쉬BOSCH Hieronymus(1450~1516년)의 이 작품(이미지 출처-위키백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apollonkim&logNo=221434712410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 공동의 질문

「칠극七克」은 인간이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일곱 가지 죄악을 극복하는 방법을 논한 서양 윤리 수양서의 이름이다. 중국인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한 목적에서, 1614년 스페인 선교사 판토하(Diego de Pantoja, 1571~1618년, 중국명 방적아龐迪我가 한문으로 펴냈다. 원어 제목은 De Septem Victoriis로, 일곱 가지 죄악과의 전투에서 끝내 승리를 얻는 데 긴요한 처방을 담았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은 왜 같은 잘못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가? 어떻게 해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죄악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행실을 본받아야 할까? ‘지어지선’(止於至善), 곧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한 뒤에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 수는 없을까?

유학에서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七情)을 사단(四端)의 단서로 제어할 것을 말하였고, 불교에서는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 곧 그칠 줄 모르는 탐욕(貪慾)과 진에(瞋恚, 노여움), 우치(愚癡, 어리석음)로 말미암은 모든 번뇌를 다스릴 수 있어야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근대 천주교와 아시아의 소통

처음 중국에 진출한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천당과 지옥에 관한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자, 중국인들은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 여겨 그다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억압을 피하고 포교의 편의를 제공받고자 중국 관리, 지식인들과의 교감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그들은 탁월한 어학 능력과 암기법을 바탕으로 중국어뿐 아니라 문언문인 한문까지 빠르게 익혀 중국 지식인들과 진지한 대화를 이어 갔다.(왼편은 ‘칠극’의 저자 디에고 판토하-이미지 출처, 구글 검색)

현지화의 적응을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마태오 리치가 지은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으로 쓰인 서학서들이 간행되기 시작했고, 이들 책을 읽으면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학의 가르침에 조금씩 눈길을 주게 되있다. 특별히 「칠극」은 지금 읽어 보더라도 마음에 교훈을 주는 묵직한 가르침이 가득한데다, 드러내 놓고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은 채 서양 현인들의 잠언풍 어록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마치 제자백가서를 읽는 느낌을 주었으므로 중국 상층 지식인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주제별로 구분하여 전달하는 의미가 명쾌하고 논리의 체계도 정연했다. 다른 중국 고전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선한 전달방식이었다.

「칠극」은 간행 이후 그 체재와 내용의 참신성으로 중국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서도 오랜 기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였다. 조선에서도 일반 신자들의 영성 교육을 위해 한글로 번역되어 필사본 형태로 널리 읽혔다.

겉으로 보기에 이 책은 사서삼경류의 유가 경전과 형식상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논어」만 하더라도 매 항목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어서, 장절로 구분되는 사유의 체계를 찾기가 어렵고, 대단히 느슨하고 산만한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仁)과 같은 중심 개념을 살피려고 하면 전체 텍스트에서 ‘인’이 들어간 문장을 다 뽑아서 하나하나 살펴야 했다.

그런데 이 책 「칠극」은 장과 절로 구분하여 주요 개념별로 나누어 집중적으로 설명해서,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 개념뿐 아니라 생생하고 흥미로운 예화까지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 귀납적 방식의 동양적 사유에 익숙했던 중국 지식인들에게 서양의 연역적 방식의 지식 전달 체계가 대단히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던 셈이다.

책의 구성

「칠극」은 전 7권에 한자로 8만 2,590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논어」의 7배, 「맹자」의 2.7배쯤 된다. 「칠극」에서는 인간이 쉬 빠지는 7죄종(罪宗), 곧 일곱 가지 죄악으로 교만과 질투, 탐욕과 분노, 식탐과 음란, 나태를 꼽았다. 이를 막으려면 이에 맞서는 일곱 가지 덕목으로 눌러 이겨야 하는데 바로 7추덕(樞德)이다. 교만에 맞서는 겸손, 질투를 이기는 용서, 탐욕을 지우는 은혜, 분노를 가라앉히는 인내, 식탐을 누르는 절제, 음란의 불길을 식히는 정결, 나태를 깨우는 근면이 그것이다.

그래서 「칠극」 7책은 권마다 복오(伏傲), 평투(平妬), 해탐(解貪), 식분(息忿), 색도(塞饕), 방음(坊淫), 책태(責怠)라는 제목을 달아 그 구체적인 처방을 단계별로 제시했다.

‘복오’는 교만을 겸손으로 복종시킨다는 뜻이다. 교만을 죄종의 으뜸으로 내세운 것이 흥미롭다. ‘평투’는 질투를 용서로 가라앉히는 것을 말한다. 남의 잘못을 따져 헤아리기를 좋아하는 습성,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기를 경계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해탐’은 은혜로 탐욕에서 벗어나는 처방을 담았다. 한번 불붙은 인간의 욕망은 끝 간 데를 알지 못하므로, 베풂과 은혜의 덕을 통해 탐욕의 열기를 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식분’은 성냄, 곧 분노의 불길을 인내로 차분히 가라앉혀 꺼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색도’는 절제를 통해 식탐을 누르는 방법을 설명하고, ‘방음’은 정결로 음란함을 막는 길을 각종 예시를 통해 가르친다. 마지막 ‘책태’는 근면으로 나태를 채찍질하는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책의 서문에서 판토하는 자신이 책을 집필한 의도와 구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는 묵은 악업을 없애고 새로 덕업을 쌓는다는 의미인 ‘소구적신’(消舊積新)의 네 글자를 전체 책의 키워드로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악이 욕심 때문에 생기는데, 욕심이 죄와 허물을 만들어서 마음에 악의 뿌리를 내린다고 보았다. 악의 뿌리에서 다시 세 개의 큰 줄기가 움터 난다. 그것은 부(富)와 귀(貴), 그리고 일락(逸樂, 달아날 일)이라고 했다.(이미지-A tree of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ir fruits, 출처-https://medieval.ox.ac.uk/ 영문 wikipedia에서 Tree of virtues and tree of vices라는 항목으로 검색하면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세 줄기의 끝에서 다시 가지가 돋아난다. 첫 번째 ‘부’의 줄기에서는 탐욕의 가지가 돋고, 두 번째 ‘귀’의 줄기에서는 교만의 가지가 돋아나며, 세 번째 ‘일락’의 줄기에서는 식탐과 음란과 나태의 가지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여기에 더해 세 개의 줄기와 내가 만나는 관계 양상에 따라 질투와 분노의 두 가지가 더 돋아난다. 결국 세 개의 줄기와 일곱 개 가지의 악으로 이루어진 죄악의 나무가 우리 마음속에서 나날이 자라게 된다. 그 일곱 가지 끝에는 온갖 죄와 허물들, 그리고 불의한 언행이 열매와 잎으로 변해 주렁주렁 달린다.

이러한 죄악의 나무야말로 지옥의 불길을 지피는 땔감이 된다고 판토하는 설명했다. 우리가 지옥 불을 끄려면 결국 이 일곱 죄악을 온전히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멋모르고 먹은 죄악의 열매는 세상의 질병과 온갖 근심, 그리고 환난을 빚어낸다.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이 죄악의 나무를 우리 마음속에서 뿌리째 뽑아 버려야만 한다.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요인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제힘으로 얻은 줄로 알아 교만에 빠진다. 뜻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고 부귀영화 같은 세상의 복락에만 관심을 기울여 욕망을 기르기도 한다. 간혹 바로잡을 마음이 있더라도 낡은 집을 허물려면 지붕부터 기둥까지 차례를 지켜 허물어야 하는데, 한꺼번에 이루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무너진 집 더미 아래에 깔리기도 한다.

판토하는 이 책 「칠극」에서, 욕심의 한 뿌리에서 나온 부와 귀, 일락이라는 세 줄기와 각각의 줄기에서 움튼 탐욕, 교만, 식탐, 음란, 나태, 질투, 분노의 일곱 개 죄악의 가지를 본원을 생각하고 지향을 바로 하며 절차에 따르는 세 가지 원칙을 지켜서 차례차례 격파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세에 따라서 처방약을 내놓는 것과 같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단계별로 죄악의 성격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 대해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초기 교회의 「칠극」 영성과 그 영향, 7죄종론의 구조와 권별 주요 내용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겠다.(정민, 경향잡지, 2023년 1월호, 통권 1859호)

오력吳歷의 칠극송七克頌

이 글에서는 청나라 초기 중국인 신부 어산(漁山) 오력(1632~1718년)이 지은 ‘칠극송’을 소개할까 한다. 5언 율시로 칠죄종 극복 방법을 노래한 일곱 수의 한시로, 「칠극」에 대한 독후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한시집인 「삼파집」(三巴集)에 실렸다.

오력은 유명한 화가였다.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유럽을 여행할 결심으로 마카오로 왔다가 1682년 예수회에 입회해 1688년 신부가 되었고 상해와 가정(嘉定)에서 오래 사목했다.

첫 수 ‘극오’(克傲)는 교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설명했다. 「칠극」 1권, ‘복오’(伏傲)의 내용을 요약했다.

교만이란 죄악은 무엇과 같나? 傲惡知何似

교만한 사자 길들일 수 없음과 같네. 驕獅不可馴

뻗대며 재물 있음 자랑하면서 雄心誇有物

내려보아 눈에 뵈는 사람 없구나. 俯目視無人

고작 며칠 구름 위로 솟던 기세가 幾日凌雲氣

천 년간 땅 먼지로 내던져지리. 千秋委地塵

어이해야 부지런히 자신을 이겨 爭如勤自克

모든 덕 겸손으로 참되게 할까? 萬德一謙真

교만은 제힘만 믿고 날뛰는 사자와 같다. 제 가진 것을 뻐기며 안하무인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기세는 얼마 못 가 스러지고 티끌 먼지가 되고 말 것이다. 무엇으로 교만을 꺾을까? 자신을 낮추는 겸손만이 그를 거듭나도록 이끌 수 있다.

2권 ‘평투’(平妬)를 노래한 한시는 제목이 ‘극투’(克妬)이다.

질투란 죄악은 무엇과 같나? 妬惡知何似

잔잔한 물 갑작스레 파도 이는 듯 平流忽起波

혼자만 높은 재주 지녀야 하고 高才容我獨

남 좋은 일 많은 것은 싫어한다네. 好事恨人多

혀를 차며 모질게 핍박을 하고 咄咄偏相逼

눈 흘겨 째려본들 어찌하겠나. 眀眀奈若何

어이해야 부지런히 자신을 이겨 爭如勤自克

한결같은 관용뿐 다른 것 없네. 一恕百無他

질투는 파도처럼 들이닥쳐 내면의 평정을 뒤흔든다. 혼자 높아야 직성이 풀리고, 남 좋은 일은 죽어도 못 본다. 트집을 잡아 남을 괴롭히고 눈을 흘겨 해코지한다. 이 버릇을 어찌 고칠까? 서(恕), 곧 관용의 마음을 품어 넉넉해지는 것밖에 답이 없다.

다음은 3권, ‘해탐’(解貪)을 노래한 ‘극린’(克吝)이다.

탐욕이란 죄악은 무엇과 같나? 貪惡知何似

바보 같은 원숭이가 움켜쥠 같네 癡猴握固然

돈 꺼낼 땐 눈썹 먼저 찌푸려지고 解囊眉早皺

받을 때는 고운 낯빛 앞을 다투네. 拜賜色爭姸

한평생 천 번 넘게 헤아려 본들 卒世饒千算

죽을 때는 그저 텅 빈 두 손뿐이지. 終期但兩舉

어이해야 부지런히 자신을 이겨 爭如勤自克

은혜로 인색함을 깸만 하리오. 心惠破慳鍵

원숭이는 병 속 물건을 꼭 쥔 채 놓을 줄 몰라 끝내 손을 빼지 못한다. 인간의 탐욕이 이와 같다. 베풀기는 싫고, 채우는 것만 좋다. 아등바등 보태도 죽을 때는 빈손뿐이다. 은혜로 인색함과 탐욕의 병통을 통쾌하게 깨뜨림만 못하다.

4권 ‘식분’(息忿)을 요약한 ‘극분’(克忿)은 이렇다.

분노란 악 무엇과 비슷하던가? 忿惡知何似

미친 바람 불길이 타오름 같네 風狂火擧標

뜬금없이 조금만 부딪친대도 無端纔有觸

죽기를 맹세해도 시원치 않지. 誓死不相饒

어이해 삼척동자 우습게 볼까 豈是輕三尺

갑작스레 하루아침 근심 닥치리. 居然患一朝

어이해야 부지런히 자신을 이겨 爭如勤自克

언제나 큰 평화에 젖음만 할까? 常用太和撓

분노는 미친바람 앞의 불길처럼 나를 태운다. 길 가다가 몸이 슬쩍 부딪쳐도 죽기를 맹세하고 싸운다. 상대를 우습게 보고 날뛰다가 생각지 못한 큰 근심과 맞닥뜨린다. 인내로 자신을 이겨 내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

5권 ‘색도’(塞饕)를 노래한 ‘극도’(克饕)는 이렇다. 식탐을 경계한 내용이다.

식탐의 죄악은 무엇 같은가? 饕惡知何似

큰 바다가 뭇 강물을 삼킴과 같네. 溟墟吸衆流

비싼 음식 수저 대기 어렵다지만 萬錢難下箸

한번 웃곤 그릇 바닥 들어 보이지. 一笑爲擎甌

더 이상 못 먹게 됨 기다려서야 直待腹相負

몸뚱이가 원수임을 그제야 아네. 方知軀是仇

어이해야 부지런히 자신을 이겨 爭如勤自克

절제를 달게 여겨 덕과 짝할까. 甘節德之儔

식탐도 병이다.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워 바닥을 봐야 끝난다. 마침내 이 때문에 성인병에 걸려 건강을 잃는다. 진작에 절제할 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6권 ‘방음’(坊淫)을 노래한 ‘극음’(克淫)을 읽어 보자.

음탕한 악 그 무엇과 비슷하던가? 淫惡知何似

정욕은 둑 터진 시내와 같네. 流情水決溪

잠깐만 더럽혀도 얼굴이 붉고 乍汚顔尙赧

놓아두면 뜻이 온통 미혹된다네. 稍縱意全迷

짐승 행실 손가락질 많이 받거늘 獸行叢多指

신의 감독 어둔 방도 환히 비추리. 神監逼暗閨

어이해야 부지런히 자신을 이겨 爭如勤自克

곧은 덕으로 무쇠 제방 삼음만 하리. 貞德是金隄

정욕은 봇물이 터진 제방처럼 걷잡을 수가 없다. 부끄러움도 잊고 불나방처럼 불 속에 뛰어든다.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 앞에 서면 그 죄를 감출 수가 없다. 우리가 정결함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 7권 ‘책태’(責怠)를 노래한 내용은 ‘극태’(克怠)이다.

나태라는 악은 무엇과 비슷하던가? 怠惡知何似

노둔한 말 주인 은혜 등짐과 같네. 駑駘負主恩

몸 있어도 길러 줌만 편안히 여겨 有軀豢安養

내달리기 바라기는 뜻 아예 없네. 無志望騫騰

주님 사업 정돈함 기약이 없고 神業難期頓

흐르는 세월만 달려가누나. 流光欲若奔

어이해야 부지런히 자신을 이겨 爭如勤自克

채찍 떨쳐 수행 문에 듦만 같으랴. 振策入修門

나태는 노둔한 말과 같다. 정성껏 먹여 길러도 음식이나 축낼 뿐 달릴 뜻이 없다. 밥만 먹고 하는 일이 없으니, 근면의 채찍질을 가함이 어떠한가?

‘칠극송’은 당시 중국인들에게 「칠극」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살필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다음 회부터 책의 내용을 차례로 소개하겠다.(정민, 경향잡지, 2023년 2월호, 통권 18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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