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주교 학자 기념일(8월 28일)

성인은 19세이던 373년부터 28세인 382년까지 방황의 시기를 지내다가 30세가 되던 384년에 성 암브로시오(340?년~397년)를 만나면서 회심의 길로 들어서고, 32세가 되던 386년에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자신을 두고 말씀하시는 로마 13,13-14를 읽는다. 33세가 된 387년에 세례를 받았고, 비로소 지성의 회심에서 의지의 회심으로 나아가는 시기를 산다. 다음은 <고백록Confessiones, 성염 역, 경세원, 2016년>의 몇 대목이다. 괄호로 삽입되어 있는 내용은 성염 선생님의 각주를 옮겨 놓은 것이다.(*이미지-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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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속세의 짐에, 마치 꿈결처럼 달콤하게 짓눌려 있었습니다.…일어날 시간이 닥쳐옴에도 마지못한 척 졸음이 사람을 기분 좋게 사로잡는 법입니다. 저도 제 자신을 정욕에 밀리기보다는 당신의 사랑에 밀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나는 사랑이란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향유하려는 정신의 움직임이고 정욕이란 하느님 때문이 아닌 동기에서 자신과 이웃과 무슨 물체든 향유하려는 정신의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그리스도교 교양 3,10,16)…기껏 한다는 소리가 잠꼬대처럼 느릿한 말로 ‘금방’, ‘예, 금방’, ‘조금만 놔두십시오’ 였습니다.(‘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sed noli modo.’와 더불어 솔직한 글귀로 꼽힌다) 하지만 그놈의 ‘금방 또 금방’은 아예 대중이 없었고 ‘조금만 놔두십시오’는 오래도 갔습니다.(제8권 5.12)

주님, 당신께서는 그가 얘기하는 사이사이에 저를 제 앞에 돌이켜 마주 세우셨습니다. 제가 저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싫어서 지금까지 저를 제 등 뒤에다 놓아두었는데 당신은 저를 제 등에서 떼네어 제 얼굴 앞에다 마주 세워 놓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추한지, 얼마나 비뚤어지고 더러운지, 얼마나 때 묻고, 종기투성이인지를 정면으로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저를 보고 제가 소스라쳤는데 저 자신을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도망갈 곳이 없었습니다. 또 제가 저한테서 시선을 돌리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 사람은 하던 이야기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고, 또 당신께서는 여전히 저한테 저를 마주 세워 놓고 계셨으며, 제 눈앞으로 저를 떠밀고 계셨습니다. 저더러 제 사악함에 눈 뜨고 미워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알았으면서도 모른 체했고 억눌렸고 잊어버리려 했습니다.(제8권 7.16)

제가 저한테 발가벗겨졌고 저의 양심이 제 속에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혀는 어디 갔는가?(입이 달렸거든 말해보라!)…당신의 뒤를 따르겠다며 무진 애를 쓰면서 저의 영혼더러 저를 따라오라고 채찍질할 적에 얼마나 그럴듯한 명언을 들이대면서 매질했겠습니까?…습관의 물결에 죽음에 쓸려가면서도 행여 그 물결에서 끌려 나오는 것을 죽을 만큼이나 겁내고 있었습니다.(제8권 8.18)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자기를 바로잡는 일을 두고 “그대가 하는 ‘내일 내일cras cras’은 까마귀 소리다. 비둘기처럼 울고 그대 가슴을 두드리라.-Sermones 82,11,14)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저의 추접을 끝내지 않으십니까?”(제8권 12.28)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sero te amavi)! 이토록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게 하셨나이다.(Late have I loved you, O Beauty ever ancient, ever new, late have I loved you. You called, you shouted and you shattered my deafness.-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념일 성무일도 성모 후렴)』 또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안에 계셨고 저는 밖에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당신을 찾고 있었고, 당신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제가 추루하게 쑤시고 들어갔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 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들이 저를 당신께로부터 멀리 붙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부르시고 소리 지르시고 저의 어두운 귀를 뚫어놓으셨고, 당신께서 비추시고 밝히시어 제 맹목을 몰아내셨으며, 당신께서 향기를 풍기셨으므로 저는 숨을 깊이 들이켜고서 당신이 그리워 숨 가쁘며, 맛보고 나니까 주리고 목이 마르며(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감성sensus spiritales’을 신체의 감성으로 견주어 표현하는 데 능숙하다. ‘그래도 제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저의 내면 인간의 빛, 소리, 향기, 음식, 포옹을 사랑합니다. 거기서는 공간이 담지 못하는 무엇이 제 영혼에게 반짝하고, 시간이 붙들지 못하는 무엇이 소리를 내고, 숨결이 흩어 보내지 못하는 무엇이 향내를 풍기고, 실컷 먹어도 줄지 않는 무엇이 맛을 내고, 흡족하고도 풀려버리지 않는 무엇이 사로잡고 있습니다. 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제가 사랑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고백록 10권 6.8), 당신께서 저를 만져 주시고 나니까 저는 당신의 평화가 그리워 불타올랐습니다.(본서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다음 기도 참조 : ‘주 하느님, 저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저희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으니 정묵靜默의 평화, 안식일의 평화, 저녁 없는 평화를 주십시오.’-고백록 13권 35.50)(제10권 27.38)

저의 전부를 바쳐 당신께 의탁하고 나면 제게는 어디로도 고통과 수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의 목숨은 산목숨, 당신으로 가득 찬 목숨일 것입니다.…제 기쁨, 그것을 두고 슬퍼해야 마땅하고, 제 슬픔, 그것을 두고 기뻐해야 마땅한데,…제 악한 슬픔이 선한 즐거움과 겨루고 있는데 여기서도 어느 편에 승리가 올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욥기의 ‘유혹’이라는 말은 결투를 하는 경기장을 의미한다. 거기서 사람은 이기거나 아니면 진다.-Adnotationes in Iob 7)…당신은 가련하게 보는 마음이시고 저는 가련합니다.(misricors es, miser sum-제가 절감하는 것은 그 상처가 이제는 더 이상 저를 아리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당신에 의해서 그 상처가 낫는다는 사실입니다.-고백록 10권 39.64)…저도 역경 중에서 순경을 바라고 순경 중에서는 역경이 두렵습니다. 이 둘 사이에, 인생은 시험이 아니라고 할 만한 중간 지역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순경이라는 것도 저주스러운 것이니 역경에 대한 두려움이 한 가지 저주요 기쁨의 무상함이 두 번째 저주입니다. 또 세상의 역경이라는 것도 저주스러운 것이니 순경에 대한 소망 때문에 한 가지 저주요 그 곤경이 지속하기 때문에 두 번째 저주요 인내심을 꺾어 버릴까 하는 것 때문에 세 번째 저주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땅 위에서 쉴 새 없는 시련 아니고 무엇입니까?(욥기 7,1 참조)(제10권 28.39)

명하시는 바를 베풀어주시고 원하시는 바를 명하십시오!(da quod iubes et iube quod vis-펠라기우스 논쟁에 자주 인용될 이 명구는, 인간 본성의 나약함과 은총의 필요성을 한데 간추려, ‘은총을 베푸셔서 당신께서 명하시는 바를 실천할 힘과 실천하는 기쁨을 얻게 해주신 다음에 원하시는 대로 명을 내리십시오.’라는 명구로 풀이된다)(제10권 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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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마니교라는 헛된 망상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그는 어느 날 밀라노의 정원에서 『잡아, 읽어라!(take up and read!(Latin : Tolle et lege!)』라는 어린이들의 동요같은 노래를 듣고 달려가 성서를 읽고 묵상한다. 그것이 저 유명한 로마서 13,13-14절이다. 그때부터 성인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그분을 선포하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봉헌하려고 노력한다.

성인이 25세에, 자신의 표현대로 먼저 머리로 회개할 때, 『주님 저를 착하게 만들어 주시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Lord, make me a good and chaste Christian, but not yet.』 하고 기도하였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성인은 386년에야 비로소 마음으로 회개하였고, 삶을 전적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17세 때부터의 방황을 거쳐 지성과 윤리생활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 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성인의 여정을 보면, 어쩌면 마음이라는 것이 먼저 머리의 인도를 받아야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머리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 몸으로 알고 마음으로 알기 위해 머리가 깨우치도록 공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부의 단순한 첩경은 앞서간 이에 대한 경청이요 독서뿐이다.

성인은 『지식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다.Knowledge can’t save us.』라는 말을 화두로 삼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삶에 주석을 달아나갔다. 그렇게 43세에 시작하여 4년 만에 ‘고백록’을 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돌아보며, 『주여, 당신 위해 저희를 지으셨으니, 저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Lord, and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you.』라는 문장으로 자신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과연 회심은 어느 한순간에 오는 것일까? 아니면, 평생을 두고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하며 미적대며 살다가 죽는 날에나 눈물로 한숨을 지으며(그것도 운이 좋아서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저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일까?

*간략연보

354년 11월 13일 현재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생, 아버지 파트리키우스, 어머니 모니카 / 371년(17세) 수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 유학, 아버지 사망, 동거생활 시작-14년간, 이듬해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 출생, 아들은 389년 18세로 사망 / 373년(19세) ~382년(9년간) 온갖 욕정, 호리고 홀리고, 속고, 속이며 / 381년(27세) 마니교 떠나 신플라톤주의에 심취 / 386년(32세) 밀라노의 정원, “집어라, 읽어라!” 하는 동요, 로마 13,13-14 / 387년(33세) 4월 24일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 주교에게서 세례성사, 11월 13일 어머니 사망(아우구스티누스의 만 33세 생일) / 388년(34세) 북아프리카에서 수도생활 시작 / 391년(37세) 히포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서품 / 395년(41세) 주교서품 / 397년(43세) 고백록 집필 시작 / 401년(47세) 고백록 집필 마감 / 430년(76세) 8월 28일 시편 7장을 읽으면서 열병으로 사망

One thought on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주교 학자 기념일(8월 28일)

  1. 흔히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삶을 방탕한 삶에서 회개하여 주님 품으로 돌아온 탕자의 삶으로 말하지만 세상 속의 방탕이 아니라 진리를 찾기위한 치열한 삶의 요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엇을 찾기위해 갈팡지팡하는 삶인지 되돌아보며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하느님의 자비로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회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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