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예수 성심聖心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내 예수 성심 경당 앞모습

살레시오회의 영성 안에서 예수 성심을 기리는 전통은 그 뿌리가 대단히 깊다. 발도코에 있는 돈 보스코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 들어가면 왼편에 자리 잡은 첫 번째 경당이 바로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다. 사진에서 보는 경당 입구의 위에 보이는 흰 대리석상은 성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년)이다. 경당 안쪽으로는 멀리 예수 성심을 그린 성화가 보인다. 이 경당은 1890년 돈 보스코의 첫 번째 후계자였던 돈 루아(1827~1910년)께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기려 이 경당을 다시 봉헌할 때까지 원래 두 번째 자리에 모셔져 있었고, 1954년 이 경당이 다시 한번 성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년)에게 봉헌되면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 봉헌된 경당은 오늘날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 경당이 이렇게 살레시오회의 역사 안에서 거듭 봉헌되는 것에서 보듯이 예수 성심을 향한 살레시안들의 사랑은 역설적으로 예수 성심께서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이 당신께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돈 루아는 새로운 100년의 시작에 앞선 1899년 12월 31일 살레시오회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였고, 살레시오회의 양성소들과 수련자들이 예수 성심 공경에 헌신하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예수 성심 경당 내의 예수 성심 성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모든 마음의 임금이시여, 지극히 사랑하올 예수의 감미로우신 마음을 통하여 당신께 간절히 청하옵나니, 모든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흠숭케 하시며, 성령께로부터 오는 당신의 전능하신 은총으로써, 나의 영혼과,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의 영혼에 생기가 돌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온갖 감정과 애정을 번제물로 하느님의 착하심에 바치게 하소서.…(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애론, 변기영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6년, 22쪽)』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유명한 저서 <신애론>을 예수 성심께 봉헌한다.

성경에서 보는 예수 성심

예수 성심을 기리는 신심의 기본이 되는 성경적 배경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 깊이가 깊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에게 특별히 제4복음서는 “생명의 샘”(시편 36,10)이신 분으로서 예수 성심을 제시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이다. 시몬 베드로는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여쭈어보게” 한다.(요한 13,22-25) 이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라는 사실은 하느님의 인간 구원에 관한 경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생명의 샘”이요 구원의 샘으로서 이미지가 된다. 그러한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은 예수님께서 몸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라고 선언하신 대목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절대 명제가 된다.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예수 성심

보나벤뚜라Bonaventura(1220~1274년), 메히틸다Mechtilde of Hackeborn(1241~1299년), 젤뚜르다Gertrude the Great(1256~1302년)와 같은 성인들이 예수 성심을 공경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세 시대에 특별히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설교 안에서 예수 성심을 기리는 신심은 십자가 위 예수님의 다섯 상처, 그중에서도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관한 내용이 중요한 축을 이룬다. 17세기에 들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심을 보여주시기로 선택하신 방문 수녀회의 성녀 마리아 마아가렛 알라코크St. Margaret Mary Alacoque에게 주어진 70회에 이르는 환시를 통해 예수 성심은 직접적이고도 분명하게 계시되었고, 예수 성심 공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신심으로 자리를 잡는다. 동정 마리아께서 당신의 사촌 언니를 방문(참조. 루카 1,39-56)하신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고유한 영성의 기초로 삼는 방문 수녀회(The Visitation Order)의 수녀님들은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지니신 가장 고귀한 예수 성심의 두 가지 덕목인 “온유”와 “겸손”을 본받으려 노력한다.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연결하게 하는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전통은 『한 마음과 한 영혼』임을 서로 확인하고, 수녀회의 공동 창립자가 되었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t. Francis de Sales(1567~1622년)와 성녀 쟌 프란시스 드 샹탈St. Jane Francis de Chantal(1572~1641년)이라는 두 성인의 강렬한 영적인 유대 안에서도 발견된다.

방문수녀회 문장紋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께서는 1611년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성녀 프란치스코 드 샹탈에게 『사랑하올 수녀님, 수녀님께서 저와 한마음이시라면, 수녀님께서도 가시관으로 에워싸여 두 개의 화살로 꿰찔린 심장을 우리 수녀회의 문장紋章으로 선택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거룩한 이름들이 새겨질 십자가가 위에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거룩한 마음을 열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라고 쓴다.

돈 보스코 성인과도 관련이 깊은 교황 비오 9세께서 1856년에 예수 성심 공경을 권장하면서 예수 성심 축일이 교회 전례력에 들어왔고, 축일 설정 100주년인 1956년 교황 비오 12세가 예수 성심 공경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회칙(Haurietis aquas)을 발표함으로써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은 더욱 구체화한다. 비오 12세는 회칙에서 『예수 성심 공경은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신앙고백 그 전부이다.』라고 한다. 예수 성심 축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예수 성심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내렸음을 믿었고, 예수 성심을 성령과 함께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으로 보면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탄생했듯이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옆구리, 곧 심장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했다고 고백한다. 성 보나벤뚜라(1221~1274년)는 『생명의 나무인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생겨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9,37)라는 성서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聖意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옆구리를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다.』 한다.

예수 성심 경당 내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시선(부분화)

부활의 신비에 이르는 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에게 예수 성심은 부활의 신비 전체로 들어가는 지점이다. 이러한 영성은 돈 루아께서 1896년에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 비치하고자 엔리코 레포Enrico Reffo(1831~1917년)라는 화가에게 의뢰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성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림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시선은 영적인 담화를 기록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옆구리 상처,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셨으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렇게 당신 사랑을 지금 우리에게까지 나누어 주고 계시는 당신 사랑의 영원한 자국에 고정되어 있다.

예수 성심을 향한 살레시오 성인의 신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예수 성심에 관한 묵상은 『세세 대대로 영원히 아버지의 품에 계시는 분께서 어머니의 품에서 죽을 인간이 되신다.』 하는 강생의 신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성심을 전하고자 하는 성령의 힘에 온전히 열려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어우러지고 통교하는지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해 이를 묵상하려고 한다. 그는 먼저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의 두 본성을 마치 신랑 신부가 만나 하나의 몸이 되는 것처럼 혼인의 입맞춤으로 표현하고, 하느님의 본성과 인간이 만나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면서 이러한 합일(consummation)과 일치가 사랑하시는 분이신 하느님과 사랑받으시는 분(예수님의 인간성)이 몸이라는 침상에서 하나되어 완성을 이루신다고 말하고, 그리스도 인성의 마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신성한 마음은 곧 ‘살아있는 물의 샘’, 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요 이슬과도 같은 것이며, 하느님의 마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뜨겁고 힘 있는 사랑의 불’이라 묘사한다.

성인은 또한 사람이신 예수님의 마음 안에 계시어 하느님의 마음이 맺으시는 풍요의 결실을 두고는 “이제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며, 야곱의 샘(우물)에는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리라. 오곡과 술이 나는 땅에는 그 위의 하늘이 이슬비를 내려주리라.”(공동번역. 신명 33,28 참조. 요한 4,6) ‘살아 있는 야곱의 샘’이라 하면서 하느님의 마음은 생명의 원천(자궁)이며 먹이시고 기르시는 젖가슴(유방)으로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근본의 힘이라 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은 인간성에 충만한 생명을 채우며, 사랑을 향하여 가도록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시어, 마침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선하심에 깊고도 진한 일치를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에게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적으로 두 가지 역할을 하신다. 하느님이시면서 영적인 탄생과 자양분으로 길러주시는 역할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마음에 다가가게 하는 수단이며 길이 되시는 역할이다.

온유와 겸손 : 본질적인 덕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겸손이라는 인간적 미덕을 갖추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깊고 밀접한 일치가 결코 불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성인은 겸손의 실천은 사랑을 받기 위해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며,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놓인 이웃을 위한 온유함은 자비(mercy)의 실천이라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mercy라는 말마디 자체가 어원적으로 라틴어 misericordia에서 나오는데, 이 말마디 miseri-cor-dia의 한가운데에 cor, 곧 마음이 담겼다는 것이다. 성인에게 자비는 다른 이가 나에게 가해오는 상처에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나를 다스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이는 우리 이웃의 불완전함을 참아 견뎌내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사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고, 부서지고 찔리신 예수 성심은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까지 포함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한 부드러움 그 자체라 한다.

인간을 위해 발가벗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묵상하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시면서 완전히 발가벗겨져 십자가 위에 내달리신 모습으로 우리 인간에게 인간적인 욕망을 벗어나 자기 포기와 함께 자기 의지를 오직 하느님의 뜻에 내어 맡기도록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성인이 볼 때 인간적인 욕망은 인간의 마음에 입혀진 일종의 ‘옷’이다. 발가벗겨진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의 아버지와 그분의 뜻만을 이루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다른 욕망이 없음을 계시하는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발가벗겨져 오로지 ‘사랑의 망토’로만 입혀져 있다.

성심의 부성父性과 모성母性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중심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성심이 지금까지도 연장되는 하느님 생명의 원천이자 일상생활의 일상적인 사건을 살아가도록 자양분을 주는 수단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성심은 거룩한 하느님의 마음이 지닌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이라는 양자적 특성을 모두 지닌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십자가 위의 예수 성심께서 훌륭하신 아버지요 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신다고 확언하면서 그러한 예수 성심의 사랑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 성심의 모성적 특성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저서들인 <신심 생활 입문>과 <신애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신심 생활 입문>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의 성심은 당신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영적인 요람, 포대기, 아기 띠, 유모를 비롯하여 여러분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모두 예비하셨습니다.』라고 기록한다. <신애론>에서도 성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심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통해 우리 인류를 위한 일반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사랑으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마련하시어 먹이셨습니다.』라고 강조한다.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예수 성심의 부성적인 사랑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교회 안의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성적인 성심의 자녀들』이라고 믿는다. 성인에게 예수님의 성심에서 부성적인 역할은 당신의 자녀들을 하느님의 섭리로 이끄시는 관문이 되신다. <신심 생활 입문>에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필로테아에게 『그러므로 그분의 팔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의탁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여 의탁할 때 당신을 안아줄 팔은 그분의 팔만 있을 뿐 그 외에 그 어떤 다른 팔도 없습니다.』 한다.

연인들의 산, 골고타

살레시오 성인의 신심에서 인간이며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에 관한 최종적인 표현은 궁극적으로 골고타산 위의 수난과 죽음에서 드러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성심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헤아릴 길 없는 사랑에 다가가 볼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이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골고타 산은 연인들의 산입니다. 구세주의 수난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사랑은 그 어떤 사랑도 어리석고 위험한 사랑입니다. 구세주의 사랑이 없는 죽음은 불행하고 구세주의 죽음이 없는 죽음도 불행합니다. 구세주의 수난에는 그분의 사랑과 죽음이 도저히 분리할 수 없도록 하나로 엉켜있어서 그 어느 한쪽이 없이 다른 한쪽을 우리 마음에 지닐 수가 없습니다.』라고 묘사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보는 마음은; 설레는 마음, 아기가 되어 오신 분을 만나는 기쁨. 사랑받는 마음, 자녀가 되었음을 느끼는 확신. 자비의 마음, 인간의 필요에 언제나 응답하시는 섭리. 용기가 나게하는 마음, 두려움을 깨끗이 떨쳐주시는 치유. 아픈 마음, 온 세상을 살펴보느라 찢어진 슬픔. 항구한 마음, 하느님 사랑에만 매달려 끝까지 가는 항구함, 산만한 마음, 사랑 안의 고통과 고통 안의 사랑이 오가는 분주함. 꿰찔리는 마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러야만 했던 값. 살아 있는 마음, 부활의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는 믿음.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당신의 마음 안에 당신의 죽음이 있고, 당신의 생명이 있습니다. 한없는 당신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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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와 바탕이 된 글이나 책 :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애론, 변기영 신부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6년 / FR. Mike Pace sdb, The Sacred Heart of Jesus in Salesian Spirituality / Fr. Thomas Daily, O.S.F.S, Behold this Heart. St. Francis de Sales and Devotion to the Sacred Heart, Sophia Institute Press, Manchester, New Hampshire. 2020 / John A. Abruzzese, Francis de Sales and the Heart of Jesus / http://hosted.desales.edu/files/salesian/library/Abruzzese-Heart.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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