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헌 생활은 궁극적으로 세상에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삶이다.
하는 일을 통해서 뭔가를 보여주려 하면 백발백중 실패이고 어쭙잖다. 무엇을 하든 그 일에 임하는 태도와 마음을 보여주려 할 때 성공이다.
*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15)
함께 모여 사는 집단생활을 보여주려 하면 우습기 짝이 없다. 어려움 속에서도 존중과 신뢰, 성숙으로 사는 공동체 생활을 보여주려 할 때 멋있다.
일상에서 교회 밥을 축내거나 얻어먹고 사는 모습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려 하면 경멸의 대상이다. 한없는 통회의 눈물 속에서도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심을 믿어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할 때 경이로움이다.(20210210*이미지 출처-영문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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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ecrated life
Consecrated life is ultimately a life in which we have to show the world something.
If you wanted to show who the consecrated are, through the work they are doing it would be a perfect fiasco! But, whatever consecrated persons do is a success when they try to show the attitude and heart with which they do this work.
* you have no idea what your life will be like tomorrow. You are a puff of smoke that appears briefly and then disappears.…you should say, “If the Lord wills it, we shall live to do this or that.”(James 4,14-15)
If you try to show a plausible life to gathered groups, we make everyone laugh. But, it is nice to show the life of the community which, despite the difficulties, tries to show a community life made of respect, trust and maturity.
If the religious try to show a life that consumes only the bread of the Church, or they live begging it, they are people of contempt. But, it is wonderful when they try to show, even amidst the tears of repentance, to adore God with faith, because he alone is the Sav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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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축성) 생활 안에서 사소한 듯하면서도 결코 사소하지 않은 생각해 볼 10가지 낱말을 10계명을 꼽아 보듯이 다시 생각해보기
① 고독: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연결을 요구하고 우선시하는 시대, 이미 수도원 울타리는 세상과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아마도 전원이 꺼진 전화기가 우리 울타리를 대신하는 사회이고, 묵상 시간에도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하며 산만하고, 날씨를 알려면 커튼을 젖혀 밖을 보는 대신 일기예보 앱을 보는 시대이다. 신성한 언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침묵, 고요함, 내적 침잠임을 잊지 말고 인터넷이나 휴대폰 등 매체의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② 공동생활: 우리는 클럽이나 협회도 아니고 협동조합이나 집단생활도 아닌 공동생활을 산다. 대부분 외동으로 자란 세대, 개인 침실과 개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시대, 그런 배경에서 자란 젊은 세대와 옛 시대가 함께 사는 우리 공동체이다. 자칫하면 공동식사, 정해진 시간, 수도원만의 고유한 언어와 관습이 외부 사람들이나 수도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혹은 오려고 하는 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정말 이상한 별세상이나 마치 다른 행성에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우리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선택했고, 함께 하느님 찬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공동체이다. ③ 노동과 수작업: 육체적인 수작업이나 노동에 어떻게든 참여해야 하는 생활이다. 재미없고 반복적인 일을 조용히 해야 하고, 함께 일하며 함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수도생활이 기도생활과 사목생활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도생활과 사목생활을 균형 잡아주는 것은 바로 허드렛일이나 잡일이라고 부르면서 나눠서 함께 하는 일들이다. 사목과 기도를 핑계로 함께 하는 잡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④ 충실함: 평생을 헌신하다는 것이 이상한 세상이다. 급격한 변화의 세상이고 부부간에도 맘에 안 맞으면 참지 못하고 즉시 헤어지는 세상이다 보니, 수도생활 안에서도 혹시라도 하는 가변성의 여지를 두고 남모르는 곗돈이라도 부으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나 불안을 살아갈 수 있다. 소임이 계속 바뀌어도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파도 위를 미끄러져 가듯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서 주변을 관찰하며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분도 성인은 그것을 정주定住라고 부른다. 하루를 살아도 천 년 만년 살 듯 살아야 하고, 당장 내일 떠나더라도 평생 살 집처럼 내 집으로 마음 붙여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이지만 종신여시(終愼如始)하라(한명회)」⑤ 사목활동: 우리의 사목은 수도회의 사명에 따라 수도회가 위임하는 공동체의 사목이다. 새 소임에서 전임자가 했던 것을 변경하거나 평가하려면 지구의 종말이 당장 내일이 아니라면 적어도 일정 기간을 지켜보고 나서 해야 한다. 맡은 소임에 몰두하지 못하고 동시에 여러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불안한 무능력을 발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나의 태만이나 게으름을 피하자고 쓸데없는 일을 장상의 허락이나 공동체의 합의 없이 개인적으로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⑥ 독서(렉시오 디비나)와 기도: 인터넷의 영향이 막강한 인터넷 강국에 사는 우리이다. 책을 읽는 경험을 잃어가는 세상이다. 잘 읽지 않고 대충 읽으면서 영구적인 주의력 결핍이나 산만 상태, 혹은 찢어진 백과사전처럼 안다고 착각하면서 모르는 채 산다. 사색, 암기, 반복을 통해 세속적 지식이나 유식함을 위해서가 아닌 성경과 교회의 고전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고, 내가 읽는 말씀이 나를 읽도록 기도하며 읽는 것이 우리의 독서이다. 그러한 독서만이 우리의 지적인 진동을 일으킨다. 속독을 자제하고 속도를 늦춰 읽어야 한다. 어떨 때는 조용히 소리 내어 읽으면서 내가 읽는 텍스트가 두 번째 경로인 청각을 통해서도 인식되도록 읽어야 한다. 사목상의 바쁨이 의무 기도를 건너뛰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⑦ 청빈: 함께 절약하고 함께 일하면서 대부분 우리는 이미 보유한 공동 재산을 어떤 형태로든 줄여가며 살지는 않는다. 교회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시기를 넘어, 이제는 가난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시대를 산다. 가난을 산다고 하더라도 사시사철 세 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밥 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며 아프면 병원에도 데려가 주는 보장된 삶이다. 우리는 청빈한가를 묻지 않고, 과연 우리가 청빈하였던 적이 있는가를 셈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음을 명심하고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⑧ 정결: 독신이나 성생활이 없는 것만이 정결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정결/순결은 경건함이고 그에 반하는 죄와 반대말은 불경건함이다. 정결은 사람, 사물, 장소, 오락, 인생의 여러 단계, 그리고 성을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훼손하지 않도록 사용해야 하고, 자신의 추구를 위해 타인에게 언어적, 비언어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까지를 아우른다. 도덕적, 생리적, 정서적, 미적, 성적 경계를 넘지 않는 방식으로 타인이나 주변과 관계를 정갈하게 맺어야 한다. 나의 조급함, 불경건, 이기심으로 나와 이웃을 위해 주어진 은총의 선물을 깨끗하게 보존하지 못함을 경계해야 한다. 두려움과 억압이 아닌 성숙함으로 관계를 살아야 한다. 교부들은 기도 없는 정결이나 독신이 어느 지점에 있든 결코 불가능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⑨ 진실함과 투명성: 인터넷은 진실을 잘게 쪼개놓으면서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게 한다. 진리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두루 좋은 게 좋다고 보게 만드는 것이 상대주의이다. 이를 경계해야 한다. 확실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고, 긍정으로 돌아올 답이 아니라면 대답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강한 세대이다. 사람들은, 혹 우리도 형제자매들 간에 대답하지 않으려다가 꼭 대답해야 할 때는 ‘아마도’나 ‘가끔은’ 하고 단서에 따라 이리도 빠져나가고 저리도 빠져나갈 수 있는 대답을 하며 공개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감출 수 있다. 영적 진보를 위한 대화에서 말하는 이는 솔직하고 투명해야 하며, 듣는 이는 수용과 긍정의 태도를 지니면서 비밀을 보장하는 상호 신뢰가 중요하다. ⑩ 신앙: 우리 주변의 많은 이는 무신론과 하느님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문화, 영원성이나 초월성을 아랑곳하지 않는 죄의식의 상실이나 부재 상황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엄격한 도덕의식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인간 각자에게 주신 하느님의 인장이요 내적 존엄성인 양심을 기반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이러한 요소들을 양성 받았거나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평생 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죽는 날까지 이러한 요소들을 관리해야 하고, ‘상호 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잘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참조. 축성 생활과 양성 https://benjikim.com/?p=13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