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방房’은 뜻을 나타내는 ‘지게 호戶’, 그리고 소릿값이면서 ‘곁’, 혹은 ‘네모’라는 뜻을 가진 ‘모 방方’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두 짝이 달린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볼 때, 외짝 문(戶)을 달아 집 안의 곁에 벽 같은 것으로 칸을 막아 분리 배치한, 대개는 네모난 작은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방은 제작에 들어가는 물질이나 재료로 구분하든지, 위치나 용도로 구분한다. 그러나 위치와 용도를 가리는 방은 가진 자들의 어휘일 뿐, 가난한 이들과 시인의 방은 언제나 꾀죄죄하고 옹색하며 궁핍하다.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 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김사인, 지상의 방 한 칸)』 가난해야 한다는 수도생활은 대개 죽을 때까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방 한 칸은 넉넉히 보장된 삶이니 그마저도 보장받지 못하고 사는 이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이다. 죽은 다음에도 ‘기념’이라는 허울로 방 한 칸을 차지하여 다른 이의 눈요기가 되는 것은 그런 이들에게 자칫 죄악이다.
방은 함께 공유하는 이가 없을 때, 내가 사는 동안은 나만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나는 나를 만들고, 채우고, 표현하고, 심지어는 방 자체가 내가 되어 내 존재 이유가 된다. 그래서 방 앞에는 나의 이름을 새기고, 설령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내 방인 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무엇으로 어떻게 그 방을 채울 것이고, 아무리 문을 닫아 놓는다고 해도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는 나의 취향이고 선택이다. 허접한 쓰레기만을 축적하는 동물인 인간이 문득 아무것도 채울 것이 없는 나만의 공간 안에 앉을 때는 곧잘 허무이고 슬픔이다. 그런 방일지라도 그 방이 누군가, 무엇으로부터 침해를 받는다 싶으면 기분 나쁘고 속상해하며 내 안에 숨어 있던 발톱들이 기어 나온다.
인사 명령이나 소임 이동을 따라 매번 방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 수도생활이다. 누군가 살았고 살아갈 방에 내가 들어간다. 어쩌면 내가 들어있는 내 ‘몸’만이 진정한 나의 방일지도 모르지만, 방은 정갈해야 한다. 인간사야 모르는 일이지만, 문득 이 방이 이번 생애에 내가 마지막 배정받는 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러 생각을 오가게 한다.
성경에서 ‘房’은 노아의 ‘방주方舟’로부터 시작한다. 노아는 3층의 네모난 배를 만들고 그 배에 작은 방들을 만들어 생물들과 가족을 모으고 홍수 동안 견딜 수 있는 양식을 쌓았다.(창세 6-7장 참조) 그러던 ‘방’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연관되면서 큰 의미를 담는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6)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마르 14,14)인 “큰 이 층 방”(루카 22,12), 예수님의 승천 후에 사도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던 예루살렘 성 안의 “위층 방”(사도 1,13),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문을 잠가 놓고 있는 중에 오시어 가운데에 서셨던 방(참조. 요한 20,19 이하),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젊은이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떨어져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던 등불이 많이 켜져 있던 방(사도 20,7-12)……, 생명의 방, 기도의 공간, 예수님 최후의 만찬과 그 만찬의 재현을 위한 방,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있는 사랑의 자리…… 적어도 성경의 배경 안에서 수도자들의 방은 이러한 의미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