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신비 앞에서

중증 장애나 병을 얻어 고통 받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을 “작은 영웅들”이라고 부르신 교황님께서 한 아이를 안아주고 계신다. (사진-교황청 공보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교황 즉위 2년여를 넘겨 가던 2015년 5월 29일 저녁나절에 당신의 숙소인 ‘마르타의 집’ 경당에서 심각한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아래는 그때 함께 나누셨던 교황님의 말씀 영어본과 그 번역문이다. 솔직하고 소박한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생사와 세상사에서 다가오는 ‘고통의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엿보게 된다. 이는 중증으로(혹은 태생적으로) 고통에 시달리게 된 아이들과 그들을 동반하고 있는 부모들의 몇몇 이야기를 먼저 들은 다음에 교황님께서 답으로 주신 말씀이다.

***

좋은 저녁입니다. 앉으세요, 앉으세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합시다.

교리수업 시간에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배웠는데, 그때 선생님들은 성부와 성자, 성령 3위가 계시지만, 나뉠 수 없는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설명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고, 분명한 사실이라는 증거나 물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를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물증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우리가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이 빵 조각, 성체 조각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이 사실임을 우리 모두 압니다만 어떻게 그렇다는 것이죠? 어떻게 그런다는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 사실은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님 그분이 여기 계십니다. 이것을 신비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교리에서 다른 질문들을 마주하면서 깊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증거가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교리수업 시간에 설명되지 않는 다른 질문도 있습니다. 저 자신이, 그리고 여러분 중 많은 이, 많은 사람이 “왜 (죄도 없는) 어린이들이 고통을 받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것 역시 신비입니다. 저는 그저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왜?”라고 묻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당신의 아드님께서 왜 거기 계십니까, 왜죠?” 하고 물을 뿐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상처투성이요 침을 뱉어 더럽고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된 당신 아드님을 성모님께 건넸을 때 이를 받아 안으신 우리 성모님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때 우리 성모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어디 다른 곳으로 모셔갔습니까?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그저 끌어안으시고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때 우리 성모님께서도 이해하실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천사가 당신에게 했던 말,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고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33)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기억하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고통하며 죽은 아들 예수님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성모님께서는 속으로 분명 천사를 향해 “거짓말쟁이! 나는 속았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성모님께도 답이 없었습니다.

애들이 커가면서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시기, 대략 두세 살을 넘기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애들은 “아빠, 왜? 엄마, 왜? 이것은 왜죠?”라는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그때 아빠나 엄마가 (나름대로) 설명을 시작하지만, 애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곧바로 여기저기 또 다른 “왜?”들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 애들은 실제로 설명을 듣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애들은 그때 그저 “왜?”라는 질문으로 엄마나 아빠의 주의를 끌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주님, 왜죠? 왜 애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죠? 왜 하필이면 이 아이가…?” 하고 질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 시선이 우리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주님께 여쭤보고 때로는 대드는 것으로 느껴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도대체 왜 그러해야 합니까?”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아무런 대답이 없을지 모르지만, (말없이 지켜보시는) 아버지 주님의 눈길이 앞으로 계속 살아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형제가 말한 (아픈 아이를 둔 아버지의 증언을 언급하면서) 평상시와는 다르고 이상한 느낌을 얻게 되었다는 이중 체험처럼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여러분 자녀에 대하여 갖게 된 이러한 부드러움의 느낌이 주님의 한 대답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길은 부드러움이니까요. 주님께 “왜?” 하며 여쭙고, “왜?”라고 대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마음이 아버지 주님의 눈길을 받도록 항상 열려있기를 빕니다. 아버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대답이 “내 아들도 고통을 받았다.” 하는 말씀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대답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아버지의 시선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에 찬 시선, 바로 거기에 여러분이 살아나가야 할 힘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를 두고) 여러분이 “아니, 그렇게 많은 신학을 공부해놓고도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 기껏 그것밖에 없습니까?” 하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없습니다. 삼위일체, 성체성사, 하느님의 은총, 어린아이들의 고통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실 때만 그 신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강인함과 용기에 감탄하면서 저로서는 솔직히 여러분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의사로부터) 낙태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아닙니다. 태어나게 합시다. 그는 살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었습니다. 한 인격체를 제거한다는 것이 절대로, 절대로 문제의 해결책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문제가 있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지…….”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마피아 규칙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로서는 제 모습 그대로, 제가 느끼는 대로 여러분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느끼는 이 안타까움은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말고요. 저로서는 제 마음으로 여러분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 제가 여러분을 돕는다기보다 오히려 여러분이 저를 도와주실 그 길에 여러분들과 동행합니다. 여러분의 모범이 저에게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용기를 내주셔서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생애에 저는 여러 번 비겁했습니다. 이러한 제게 여러분의 모범은 참 좋고, 또 좋습니다. 애들이 왜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이것은 신비입니다. 애들이 자꾸 “왜?” “왜?” 하면서 자기 아빠를 부르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불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주의를 끌 수 있고, 그래야 하느님께서는 “내 아들을 보아라. 내 아들도 그랬다.” 하는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쓰고 던져 버리는 문화, (불편하고) 쉽지 않은 것은 치워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상황과) 조건을 잘 견뎌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두고 그저 입에 발린 소리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제 마음을 다해 여러분이 영웅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작은 영웅들이십니다. 저는 “내 아들이, 혹은 내 딸이 인생에서 혼자가 아니고 외롭지 않기를” 하는 큰 걱정을 지닌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습니다. 이는 여러분도 분명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식이 인생에서 외롭지 않도록 부모로서 주님께서 나보다 자식을 먼저 거두어 가주시라고 청하는, 어쩌면 이런 기막힌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모범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얘기들이 저에게 너무나도 감동을 주어서 솔직히 뭘 더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드릴)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교황이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하잖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에는 아버지 하느님의 눈길밖에 답이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이 아이들을 위해, 우리 형제가 말해준 것에 대해 기쁨과 슬픔이 범벅이 된 이 느낌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통을 달래주시는 특별한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필요하든 여러분 각자에게 올바른 위로를 주시는 주님을 청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참조. 고통과 악에 관하여http://benjikim.com/?p=7001)

여러분이 이미 만났던 특별한 요안니스 신부(그룹을 인솔했던 교황님의 두 개인 비서 중 하나)가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주도록 제안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여러분이 주님을 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아이가 놀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3층 창문을 통해 그 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놀이터에 지장을 주는 큰 바위를 한쪽으로 치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위가 너무 무거워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영리한 아이는 쇠로 만든 지렛대 비슷한 것을 가져와 다시 시도했지만, 여전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다시 친구들을 불러 함께 힘을 합쳐 바위를 옮겨보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창밖을 내다보던 아빠가 마침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큰 쇠막대로 바위를 밀어 다른 쪽으로 치웠습니다. 아이가 불평하듯 아빠에게 “아니, 아빠! 계속 보고 계셨던 거예요?” 하였습니다. 아빠가 “그랬지!” 하고 대답하자 아이가 “그럼 좀 빨리 내려와 도와주시지, 왜 안 그랬어요?” 하자, 아빠는 “네가 나를 부르지 않았었잖아!”하고 대답했습니다.」

주님 부르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떻게 오실지, 언제 오실지 아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우리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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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TING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WITH A GROUP OF GRAVELY ILL CHILDREN AND THEIR FAMILIES

Chapel of the Domus Sanctae Marthae

Friday, 29 May 2015

Good evening everyone.

Take a seat, take a seat.

Let us begin with a prayer to the Lord [recitation of the Our Father].

When, during catechism class, we were taught about the Most Holy Trinity, they spoke to us of a mystery: that yes, there is the Father, the Son, the Holy Spirit, but it could not be entirely understood. It’s true, we have evidence that it is true, but understanding it is another thing. Evidence we have. Here too, if we look at Jesus, the Eucharist, Jesus is there in that piece of bread, it’s true. But how is it so? I don’t grasp how it could be… but it’s true, it is He. This is a mystery, we say. And in the same way, if we ask some other questions about the catechesis, they can’t be understood in depth, but we have proof.

There is also a question, whose explanation one does not learn in a catechesis. It is a question I frequently ask myself and many of you, many people ask: “Why do children suffer?”. And there are no answers. This too is a mystery. I just look to God and ask: “But why?”. And looking at the Cross: “Why is your Son there? Why?”. It is the mystery of the Cross.

I often think of Our Lady, when they handed down to her the dead body of her Son, covered with wounds, spat on, bloodied and soiled. And what did Our Lady do? “Did she carry him away?”. No, she embraced him, she caressed him. Our Lady, too, did not understand. Because she, in that moment, remembered what the Angel had said to her: “He will be King, he will be great, he will be a prophet…”; and inside, surely, with that wounded body lying in her arms, that body that suffered so before dying, inside surely she wanted to say to the Angel: “Liar! I was deceived.” She, too, had no answers.

As children grow, there comes a certain age when they don’t quite understand what the world is like, when they are about two years old, more or less. And they begin to ask questions: “Papa, why? Mama, why? Why this?”. When the father or mother begins to explain, they do not listen. They have another why this and why that?”. But they don’t really want to hear the explanation. With this “why?”, they are only drawing the attention of their mom and dad. We can ask the Lord: “Lord, why? Why do children suffer? Why this child?”. The Lord will not speak words to us, but we will feel his gaze upon us and this will give us strength.

Do not be afraid to ask, even to challenge, the Lord. “Why?”. Maybe no explanation will follow, but his fatherly gaze will give you the strength to go on. And he will also give you that strange thing about which this brother [referring to a testimony that was given by the father of one of the sick children] spoke in his double experience: a different feeling, a strange feeling. And perhaps this feeling of tenderness toward your sick child will be the answer, because that is the gaze of the Father. Do not be afraid to ask God: “Why?”, to challenge him: “Why?”, may you always have your heart open to receiving his fatherly gaze. The only answer that he could give you will be: “My Son also suffered”. That is the answer.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hat gaze. And your strength is there: the loving gaze of the Father.

You might ask, “but you, a bishop,” you have “studied so much theology, and you have nothing more to tell us?”. No. The Trinity, the Eucharist, the grace of God, the suffering of children are a mystery. And we can enter into the mystery only if the Father looks upon us with love. I honestly don’t know what to say to you because I have so much admiration for your strength, for you courage. You said that you were advised to abort. You said: “No, let him come, he has a right to live”. Never, never is a problem resolved by discarding a person. Never. This would be going by the Mafia rulebook: “There’s a problem, let’s just get rid of it…”. Never.

I accompany you thus as I am, as I feel. And, in truth, the compassion I feel is not fleeting, it’s not. I accompany you in my heart on this path, which is a path of courage, which is the path of the cross, and yet a path that will help me, your example helps me. And I thank you for being so courageous. Many times in my life I have been a coward, and your example has been good for me, it is good for me. Why do children suffer? It’s a mystery. We need to call on God as a child calls his dad and says: “Why? Why?”, to draw the gaze of God, which will tell us one thing: “Look at my Son, He too”.

The fact that in a world where it is routine to live according to the throw-away culture, what isn’t easy gets tossed out, you bear this condition so well, allow me to say it — I’m not flattering you, I mean it with all my heart — this is heroic. You are life’s little heroes. I have frequently heard the great concern of fathers and mothers like you and I am sure that it is the same with you: may [my son] not be alone in life, may [my daughter] not be alone in life. It may be perhaps the only occasion in which parents ask the Lord to take the child first, so that they not be left alone in life. This is love.

I thank you for your example. I don’t know what more to say, honestly, because these things touch me so deeply. I too have no answers. “But you are the Pope, you ought to know everything!”. No, there are no answers to these things, only the gaze of the Father. And then, what do I do? I pray, for you, for these children, for the feeling of joy, of sorrow, all mixed together, which our brother spoke about. And the Lord knows how to soothe this pain in a special way. Let Him be the One who gives the right consolation to each of you, whatever you need.

Thank you for this visit, thank you, thank you!

Fr Joannis [Msgr Gaid, one of the Pope’s two private secretaries, who accompanied the group], who is quite special, you met him, suggested that I tell you a story. Perhaps it will help you look to the Lord. There once was a boy who was playing. His dad was watching him from the third-story window and the boy was trying to move a big rock, but he couldn’t, it was very heavy. Then the smart boy went to get some iron tool to help him move it but he couldn’t. Then he called his playmates and wanted to move it as a group, and they couldn’t because it was a very heavy rock. And they wanted to move it in order to play there in that place and finally the father who was looking out from the window came down and with great strength and with an iron rod pushed away the rock. And the child admonished the father: “But dad, you saw that I couldn’t do it?” — “yes” — “and you didn’t come sooner?” — “because you didn’t call me.”

Don’t forget this: call on the Lord. He will know how to come, when to come, and this will be your consolation. Pray for me too. Thank you.

Let us pray to Our Lady: “Hail Mary…”

3 thoughts on “고통의 신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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