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 관한 여러 이름과 뒷이야기

*1994년 헨리 나웬Henri Nouwen(1936~1996년) 신부는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A Story of Homecoming>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모스크바에서 자동차로 두어 시간 떨어진 에르미타쥐Hermitage 박물관에 소장된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년)의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그림을 따라가며 루카복음 15,11-32의 비유를 설명하는 책이다. 그림은 렘브란트 생애 말기 작품으로서 262cm × 205cm의 큰 그림이다. 친구의 방문에 걸린 이 그림의 포스터를 보고 매료되어 러시아까지 가서 이 그림을 묵상하고 썼던 헨리 나웬 신부님의 저서를 통해 온 세상이 이 그림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늘날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헨리 나웬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전 신부님께서 거주하시던 토론토의 데이브레이크 공동체 서점에서 이 그림의 원본 크기 복사본을 구입하여 한국에 가져올 때 크기가 크고 애매해서 애를 먹었으며, 나도 기어이 에르미타쥐까지 실제 그 그림을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이 그림은 이미 작가로서 유명했던 헨리 나웬 신부였지만 앞서 언급한 저서 때문에 다시 한번 유명세를 치렀고, 이에 네덜란드 방송국으로부터 렘브란트 다큐멘터리 제작을 동행해 달라는 제의를 받아 동행하던 중 사망하게 된다는 사연도 겹쳐 있다.

비유의 이름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잃음과 되찾음의 비유들,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두 아들의 비유, 사랑에 눈먼 아버지에 관한 비유, 아들 바보, 탕자의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비유에는 여러 이름이 있다. 옛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루카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세 비유의 소제목들을 “잃었던 양 한 마리”, “잃었던 은전”, “잃었던 아들”이라 하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은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고 칭한다. 현대 영어 번역 역시 “The Parable of Lost Sheep”, “The Parable of Lost Coin”, “The Parable of Lost Son”이라 하는 것을 보면 이 비유들은 분명 ‘잃음과 되찾음의 비유들’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의 비유인 ‘잃었다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두고는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이 있다. 바로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년) 교황님이시다. 교황님께서는 벌써 오래전인 1999년 9월 8일의 일반 알현에서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비유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고 불려야만 합니다.』 하신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비유가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루카 15,11)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하여 ‘두 아들의 비유’라고 칭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이 문장으로 비유를 시작하시자마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즉시 ‘카인과 아벨’(창세 4장), ‘이스마엘(창세 16-17장)과 이사악(창세 21장)’, ‘에사오와 야곱’(창세 25장)이라는 구약의 두 아들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구약의 이 아들들은 같은 패턴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동생은 항상 착한 쪽이거나 좋은 쪽이 되고, 형 쪽은 어떤 형태로든 못되었거나 부정적인 상황에 부닥친다. 예를 들어 카인은 살인자가 되고, 이스마엘은 배다른 어머니 사라에게서 상속을 거부당하며(참조. 창세 21,10-12), 에사오는 붉은 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넘기고 만다.(참조. 창세 25,29-34)

예수님의 말씀에서 늘 반전이 있는 것처럼 루카복음 15장의 ‘두 아들 비유’에서도 반전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작은아들은 의로운 아벨도 아니고, 순명하는 이사악도 아니며, 영리한 야곱도 아니면서 못된 자식이요 방탕(prodigal)한 자식이다. 비유의 뒷부분에서는 큰아들마저 아버지께 대드는 아들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이들에게는 고전적인 ‘두 아들’의 패턴을 벗어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사랑에 눈먼 아버지에 관한 비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한 셈이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이제나저제나 오매불망 기다리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고, 돌아오는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으며, 아들이 옛날 한 지붕 밑에 한 가족으로 살았던 단란한 시절을 상기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나름대로 세심하게 준비한 발언을 입 밖에 낼 수조차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즉시 하인들에게 명하여 처참한 몰골로 돌아온 아들을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로 치장하였으며,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잊고 살진 송아지로 큰 잔치까지 베풀었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도 전에 이미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된 아버지였고, 집 나간 뒤의 걱정으로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던 아버지였으며,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서 살아 생전에 자기 목숨줄 같은 유산을 떼어 나누어줄 만큼 그 아들을 사랑했던 ‘아들 바보’였다.

일부 주석가들은 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할 때 이미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네 번째 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지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 요구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실제로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요구하였거나 적어도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한 셈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또 다른 주석가들은 작은아들이 실제로 아버지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 않았느냐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요구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며 반드시 죄도 아니고 단지 슬기롭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요구를 나무라지 않고 그대로 받아준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아마도, 작은아들을 태어날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아버지로서는 아직 혼자 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음에도 집을 나가겠다고 결정하고 떼를 부리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오는 작은아들의 마음을 당시로서는 돌릴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로서는 아직 어리고 어리석은 작은아들이 이 모습으로 집을 나가면 결과가 뻔하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버지로서는 아들의 요청에 동조하면서 오히려 그 아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것에 동의한 셈도 된다. 그렇지만 아버지로서는 재산이 없어지고 설령 아들이 그렇게 망가지고 집안에 누累가 되며 아버지의 명예마저도 실추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아들이 끝까지 자기 아들이며 그 아들이 몰고 올 파장과 죄책감이나 수치심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한 셈이기도 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비유는 분명 ‘탕자蕩子(탕아蕩兒)의 비유’라는 말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탕자’는 무엇을 뜻할까?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루카 15,13ㄴ)라고 표현되는 내용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는 과도하게 낭비벽이 심하고 사치를 즐기며 방탕放蕩함(놓을 방, 쓸어버릴 탕)을 말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희랍어 말은 아소토스ἀσώτως, ásōstos(영어. wastefully, prodigally, with prodigal living, a debauched, profligate lifestyle)이다. 라틴어로는 dissipavit이라 번역되고 이는 영어로 dissipated나 혹은 loose이다. 일부 번역에서는 이를 작은아들이 구원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가 버렸다는 뜻으로 영어로 ‘살릴 수 없는, 구조할 수 없는(unsalvageable)’이나 ‘잃어버린(lost)’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다소 문제가 있으며, ‘아소토스’가 다른 맥락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에페 5,18)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티토 1,6) “지난날 여러분은 오랫동안 이교인들이 즐기는 것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방탕, 욕정, 주정, 흥청대는 술잔치, 폭음, 불경스러운 우상 숭배에 빠져 살아왔습니다.”(1베드 4,3) 등에서 사용되면서 술에 취하고 흥청망청 낭비하고 먹어대면서 해이해져 살아가는 정도를 뜻하는 것으로 이것이 작은아들이 처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원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라고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작은아들의 그다음 이야기

(두 번째 가출과 반복된 방탕, 신발-선포·파견·소명-하느님 자비의 나눔을 위하여, 두 번째의 귀향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하느님 자비의 증거들-신성한 계획의 일부였던 지난날, 당치도 않은 사제-아버지가 되라는 소명)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집에 들어가 함께 기뻐하고 즐기자며 간곡히 큰아들을 타이른 아버지였고, 이에 큰아들이 아버지의 말대로 집에 들어갔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비유가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모여 한 지붕 밑에 살게 된 아버지와 아들들이 단란하게 우애하며 가정을 이루게 되었는지도 비유는 말해주지 않는다. 큰아들이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저 자식 꼴도 보기 싫다’라면서 행여 집을 나가지나 않았는지, 적어도 옆 동네에 집을 얻어 나갔는지도 우리는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한 아들을 얻고 다른 아들을 다시 잃은 아버지였을 것이니 아버지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비유는 비유대로 열린 결말로 놓아두고 이야기를 약간 비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은아들의 두 번째 가출이라는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한없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진실한 포옹으로 감동한 작은아들이었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안정과 편안함 속에서 수치스러운 과거를 미화하고 나태하게 하면서 다시 옛 죄의 습성을 떨칠 수가 없게 하고 반복하게 유혹하는 마력을 지녀서 어느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챙길 것은 다시 챙겼다고 생각한 작은아들은 다시 아버지의 품을 떠나고 만다. 두 번째 “먼 고장”에로의 가출이었다.……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어도 이야기는 극적이고 반전이지만, 거꾸로 거듭 아버지를 배반하여 자기처럼 비참한 돼지 우리의 삶을 다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눈물로 호소하고 전달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또다시 돌아간다면……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반전이지 않을까.

이런 식의 속편續編이 이어진다고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사실 루카복음 15장의 이 비유에는 이미 이런 암시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교부의 말씀도 있었다. 작은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면서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카 15,22) 한다. 오래전 성 암브로시오(339~397년)께서는 이 비유를 영적으로 읽어내면서 “신발”은 밖으로 나가 용서와 치유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준비의 상징이라고 해설한다. 오늘날의 로버트 배런Robert Barron(1959~) 주교는 파견되지 않는 하느님 체험이라는 것이 성경 안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고 감히 말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않은 소명은 있을 수 없고, 그 체험을 나누지 않는 소명도 있을 수 없다. 모세와 같은 인도자로부터 에제키엘과도 같은 예언자들에 이르기까지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계속해서 거듭거듭 파견을 받는다. 작은아들이 진정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했고, 자기가 만난 그 자비가 어떤 것이었는지 스스로 절감하면서, 그것을 다른 수많은 사람에게도 나누고 전달해야만 한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작은아들이 이렇게 “먼 고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있었던 그곳이 얼마나 먼 곳이었고, 얼마나 비참한 곳이었는가 하는 기억에서부터였을까? 하느님을 잊으며 살았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아들은 발길이 닿은 곳마다 하느님을 보고 만나며,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하느님 자비의 증거들을 찾아낸다. 그 여정은 하느님의 인내와 섭리, 그리고 은총을 노래하는 긴 승리의 랩이다. 작은아들은 먼 고장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 누구에게라도 미소를 전하며 자기가 되찾은 기쁨을 노래하고, 하느님께서 예언자 이사야에게 주신 “나는 눈먼 이들을 그들이 모르는 길에서 이끌고 그들이 모르는 행로에서 걷게 하며 그들 앞의 어둠을 빛으로,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들리라. 이것들이 내가 할 일 나는 그 일들을 포기하지 않으리라.”(이사 42,16) 하신 약속에 담긴 깊은 진리를 깨우치는 길을 간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둠을 빛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런 식의 회심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다. 보스턴의 로마누스 체사리오Romanus Cessario(1944~) 신부가 “오직 사랑스러운 섭리의 은혜로운 계획만이 죄의 공허와 허무로부터 우리 마음을 열어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현실과 목적으로 나아가게 한다.”라고 설파한 그대로이다. 작은아들이 자기의 또 다른 결심이요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떠나 먼 고장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이지만 그 여정은 걸음걸음마다 자기의 것이 아닌 신성한 계획의 일부였음을 깨우치며 걷는 길이다.

극적인 반전은 다시 한번 일어난다. 먼 고장에 다다르기까지 기나긴 여정 끝에 처참한 나락으로 떨어졌던 바로 그곳에서 작은아들은 자신이 사제로 서품될 것이라는 소명을 듣는다. 자기가 체험했던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가 아직도 예전의 자기처럼 살고 있는 더 많은 사람에게도 나누어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힘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18-19ㄱ) 하던 작은아들이 ‘아버지’가 되라는 부르심 앞에 선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9ㄴ) 하던 이가 “수확할 일꾼”(루카 10,2)이 되라는 소명을 듣는다. 이 소명은 오직 아버지의 찬란한 자비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시간을 뛰어넘으며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발휘로 이렇게 비유를 연장해본다 해도 감히 예수님의 비유에 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사제가 살아가고 있는 소명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07,1)(20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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