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ementor #10095

루카 3,1-6(대림 제2주일 ‘다’해)

복음사가 루카는 복음 선포를 세례자 요한의 부르심과 사명으로 시작한다. 루카가 “요한은…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루카 3,18)라고 기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단테 알뤼기에리(1265~1321년)가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기술한 복음사가(Scribe manuetidinis Christi=scribe of the gentleness of Christ)’라고 불렀던 루카는 오늘 복음에서 구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또한 구약의 여러 예언자가 부르심을 받았던 형태로 꾸며, 세례자 요한의 부르심을 통하여

나그네, 군사 려/여旅

여객旅客, 여행旅行, 여정旅程, 여관旅館, 여권旅券 등에 쓰이는 ‘旅’라는 글자는 ‘나그네 려/여’ 혹은 ‘군사 려/여’라고 한다. 옛날 글자는 ‘𣃨’로서 깃발이 나부끼는 상황에서 깃발 아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이를 ‘나부낄 언㫃’이라는 글자와 ‘좇을 종从’이라는 글자가 합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 ‘나부낄 언㫃’을 ‘방향 방方’과 ‘사람 인人’의 결합으로 보아서 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깃발 신호라고 보면

루카 21,25-28.34-36(대림 제1주일 ‘다’해)

전례력으로 새로운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이다.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인 대림절待臨節(기다릴 대·임할 림/임, 대림시기)을 영어로는 Advent라 한다. 전례력을 따라 매주 주일을 거듭하면서 교회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간의 끝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온 생애에 담겨있는 구원의 역동성을 거행하고 기념한다. 새로이 맞은 이 ‘다’해에는 루카복음을 따라갈 것이다. 루카복음은 우리 가운데에 오신

자기비하적인 믿음

*「자기비하(self-deprecation)는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belittling), 저평가(undervaluing), 경멸(disparaging)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비난(reprimanding)하는 행동, 혹은 과도하게 겸손한, (겸손 아닌 겸손의) 행동을 말한다.」(위키백과) *** 자신과 화목하지 못한 믿음이 있다. 그런 믿음의 소유자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 대치하려 한다. 이런 믿음에서 하느님은 부족한 자존감을 메꿔주는 이(로 전락하고 만다.) 자신을 보잘것없고 하찮다고 여기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에 대한

요한 18,33ㄴ-37(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나’해)

우리는 전례력을 따라서 마르코복음을 들었던 ‘나’해의 마지막 주일에 도달했다. 지난 주일에 마지막으로 들은 마르코복음의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심에 관한 선포는(참조. 마르 13,26)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주님께서 영광중에 어서 다시 오시기를 우리가 간절히 희망하고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기리면서 ‘나’해를 마감하는 전례 복음으로서 네 번째 복음, 그중에서도 나자렛 사람 예수의

맘마 마르게리타의 일상

맘마는 은인이 가져다준 감자를 한 솥 삶으려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올려놓고 젖은 손으로 숨 가쁘게 방에 들어왔다. 맘마가 앉은 자리 양옆에는 바느질감이 수북이 쌓여있는 의자들이 있다. 함께 방에 들어온 덩치 큰 아이 하나가 고개를 떨군다. 전에는 그리도 착하고 유순하던 아이가 어찌 이리 변덕스럽고 산만하기 짝이 없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싶은 맘마가 부드럽고도 자상하게 묻는다. “너 전에는

쌍을 이루는 말들

인간사와 세상사 안에서 특별히 영적인 주요 원리를 드러내 주는 개념이나 말마디들은 언제나 쌍을 이룬다. 선과 악, 하느님과 인간, 평화와 전쟁,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선생과 제자, 영혼과 육체, 강과 약, 하늘과 땅, 섬김과 지배, 높음과 낮음, 천사와 악마, 권능과 무력함, 아름다움과 추함, 순응과 추구, 열정과 냉담, 친숙한 것과 뜻밖의 것, 살아야 할 것들과 피해야 할

시편 11편과 돈 보스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두 팔 “주님께서는 의로우시어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리라.”(시편 11/10,7) 이 시편을 기도하는 이는 정의로 구원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한다. 돈 보스코에게 정의(벌罰, 제재制裁)는 본질에서 자비(용서)로 대체된다. 돈 보스코는 그의 초기 저술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께서는 때때로 정의를 행사하지만, 이는 오직 죄인을 바로잡아

마르 13,24-32(연중 제33주일 ‘나’해)

오늘 복음으로 ‘나’해의 전례에서 마르코복음 낭독을 마감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예고문’ 형식인 13장의 마지막으로서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 수난과 죽음이 임박한 중에 가르침과 위로 및 당부를 하시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13장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마르 13,1) 성전이 대단하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하시며 성전이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고

11월

11월은 기분이 가라앉고 다소 우울하듯 처지는 달이다. 많이 쓸 수 없는 달이다. 눈에 띄게 낮이 짧아지고 공기가 차가워지며 일교차가 커지고 나뭇잎들이 떨어져 바람 따라 이리저리 어지럽다. 수선스러운 산만함 속에 언뜻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겨울의 동면冬眠을 위해 모든 것이 움츠러드는 것만 같고 을씨년스러워진다. 엄벙덤벙 하루가 후딱 간다. 곱다 싶었더니 짧기만 한 단풍이 어느새 생기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