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로 phylloxera(필록세라)라고 하는 이 말은 우리말로 ‘포도나무 뿌리 진디’이다. 북미주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해충으로 1863년 와인의 본 고장인 프랑스 남부에서 이 벌레가 처음 보고된 후, 급기야 1879년부터는 이탈리아로도 급속히 퍼졌고, 1880년에는 프랑스 와인 산지 전체를 초토화하였으며, 와인 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세계 술의 역사 자체를 바꾸어 놓은 끔찍한 재앙의 벌레였다. 돈 보스코의 고장인 피에몬테 역시 와인 농사를 주로 하던 곳이었으므로 돈 보스코는 이에 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참조. 술의 역사를 바꾼 벌레 한 마리 https://www.c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85
1876년 10월 1일부터 7일까지 돈 보스코는 토리노의 란쪼에서 형제 회원들의 연례 피정을 주관하고 있었다. 돈 보스코는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당연히 고민하고 있었고, 이때 꿈 하나를 꾸게 된다. 일명 ‘필로세라(La filossera)’라고 알려지는 꿈이다.
***
돈 보스코는 다양한 수도회에 속한 남녀 수도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아주 큰 방에 들어서고 있는 듯했다. 돈 보스코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돈 보스코에게로 쏠렸다. 돈 보스코는 그들 중 어떤 이상한 사람이 머리에는 붕대를 칭칭 두르고 몸은 홑이불을 두른 듯이 있는 것을 보았다. 돈 보스코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는데, 그가 바로 (꿈을 꾸고 있는) 돈 보스코 자신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많은 수도자들이 돈 보스코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그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돈 보스코가 침묵을 깼다.
“왜 그렇게 웃는 것이죠? 거의 날 조롱하고 있는 듯한데요?” “조롱한다고요?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웃는 것은 당신께서 이곳으로 인도되신 까닭을 짐작하기 때문이랍니다. 당신께서는 란쪼 피정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를 찾느라고 여기 오셨지요.”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여러분이 좀 가르쳐줄래요?” “저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로세라를 조심하라는 내용 한 가지만을 제안합니다. 필로세라를 멀리하게 되면 당신의 수도회가 오래 살아남을 것이며 번성하여 영혼들에게 아주 큰 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필로세라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필로세라는 많은 수도회를 파멸에 이르게 할 재앙이며 그들이 품은 아주 높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이러한 경고는 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이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이상한 일을 저희는 설명할 길이 없으니 어떤 분이 오셔서 잘 설명해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돈 보스코는 군중을 헤치고 어떤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누군지 자세히 보았지만, 금방 알아보지는 못하면서도 몹시 낯이 익은 것으로 보아 오래된 지인인 듯싶었다. 마침내 그가 가까이 오자마자 돈 보스코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필로세라라는 주제를 연중 피정의 결론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이 사람들의 제안을 이해하지 못해서 난처했는데, 당신이 마침 이런 상황을 해결해 주려고 오셨군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돈 보스코께서도 이를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이 필로세라와 맞서 싸우고, 당신의 자녀들에게도 이 필로세라와 제대로 싸워 이겨야만 한다고 가르친다면 당신의 수도회는 번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필로세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무에 들러붙어 피해를 주고 나무를 죽게 하는 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병의 원인이 무엇이죠?” “이 병은 나무를 점령하는 수많은 해충害蟲에서 생겨납니다.” “(오염된 나무와) 가까이 있는 나무를 구하는 법을 아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필로세라는 맨 처음에 한 나무에서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이 있는 모든 나무로 옮겨갑니다. 어떤 포도밭에 이 병이 나타났다 싶으면 금방 빠르게 퍼져 기대와 달리 온 포도밭의 열매와 나무를 망가트리고 맙니다. 필로세라가 어떻게 퍼지는지 압니까? (나무들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심었으므로 그 해충이 다른 나무에 옮겨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싶지만 그게 아닙니다. 어떤 가지에 붙어 있는 해충을 바람이 날려 다른 건강한 가지로 옮겨가게 합니다. 이것은 순식간입니다. 불평불만이라는 바람(il vento della mormorazione)이 불순명이라는 필로세라(la filossera della disobbedienza)를 멀리 퍼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타고 퍼지는 이러한 필로세라가 끼치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번성하는 집에서 먼저 상호 애덕, 나아가 영혼 구원을 향한 열성을 약화하면서 게으름을 낳고, 다른 신앙의 덕목을 빼앗아가며, 마지막으로는 물의를 일으켜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게 하고 맙니다. 못된 이들 그룹이 다른 그룹으로 넘어갈 필요조차 없습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면 충분합니다. 잘 새겨들으십시오! 이것이 일련의 수도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 엄청난 불행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어설픈 반쪽 짜리 치유책이 아니라 아주 극단적인 처방을 생각해야 합니다. 필로세라라는 해충의 감염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감염된 나무에 강한 독성을 지닌 유황이나 다른 강력한 소독약과 같은 여러 방법을 사용해보았지만. 단 한 나무만 감염되더라도 포도밭 전체를 황폐화하고 마는 필로세라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한 포도밭에서 다른 포도밭으로, 결국에는 온 나라로까지 번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감염이 번지는 것을 시작부터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싶습니까? 한 나무에서 필로세라를 발견하면 조심스럽게 그 나무를 잘라내야 합니다. 그 나무뿐만 아니라 혹시 모를 주변 나무까지도 잘라내서 불에 태워야 합니다. 오직 불(火)만이 비슷한 감염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집에서 장상의 뜻을 거스르거나, 공동생활 규칙을 소홀히 하는 필로세라, 공동체 생활의 의무를 무시하는 필로세라가 나타나면 망설이지 말고 그 집의 기초부터 뿌리를 뽑으십시오. 어떤 집뿐만 아니라 개개인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어떨 때는 격리하여 따로 두면 치유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너무 심하게 대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며, 그가 지닌 어떤 능력이나 뛰어남 때문에 수도회 전체로 보아서 손해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이런 이들은 쉽게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의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주 힘들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도회 안에 머물게 하면서 선으로 나아가도록 관용을 베푸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한 가정 자체가 타당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주님의 포도밭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하면서 이런 교만한 이를 붙잡아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보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을 잘 기억했다가 필요할 때 단호하게 실행에 옮기십시오. 이를 피정에 참석하고 있는 원장들에게 해줄 강의의 내용으로 삼고, 피정의 마감 주제로 삼으십시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중에 자명종이 울렸고, 돈 보스코는 잠에서 깨어났다.(La fillossera-La mormorazione, 1876년, MB XII, 475-4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