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관련하여 썼던 글 몇 편

(생명이 약동하는 봄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동안 ‘죽음’을 두고 썼던 오래된 글들을 뒤적여 한 자리에 모으는 ‘짓’을 한다. 청승일까? 생의 시작에서는 한참 멀어져 이제는 훌쩍 가까워져 버린 죽음이 무의식 속에서 두려워서일까? 세상은 참 스마트해져서 이런 검색도 가능하고, 이런 모음도 가능한데, 이렇게 항상 죽음을 달고 살면서도 무서운 줄 모르고, 죽는 날까지 생의 정산定算을 미루고 또 미루다가 스마트하지 않게 어리석게 죽고 만다. *이미지-구글)

***

삼가 명복을 빌며

아무래도 써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써야만 할 것 같다.

지난 7월 5일이었다. 그날은 비가 무척 퍼부어 대던 그런 날이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샤워하고 부랴부랴 서울 해방촌 성당으로 향했다. 15년 전 7월 5일은 나의 첫 미사를 드렸던 날이었는데, 그래서 오붓하게 공동체와 이런저런 축하라도 받을 날이었는데, 그런데 15년이 지난 뒤 7월 5일은 마음 아프게도 며칠 전까지도 나의 홈페이지에 자주 방문하던 오랜 친구 같은 한 사람의 장례미사를 드리러 가느라고 그렇게 아침부터 설쳐대야만 했던 것이다. 소위 교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미사도 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억울하고도 슬픈 죽음의 장례식을 지내러 다녀와야만 했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사람, 남들 다니기 어려운 일류대학교를 버젓이 졸업하고, 남들 부러워하는 일류기업에 노른자위라는 인사부장도 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주변머리 없고 지지리도 못나게 이곳저곳 이사 가며 살아야 했던 사람, 어지간한 신부 수녀보다 교회 책을 더 많이 읽었던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영세시키고 싶어 이 책 저 책 원 없이 사다 뿌리던 사람, 아직 다 크지 않은 딸 하나 아들 하나 두고 부인과 티격태격 속상할 때마다 나를 찾아오던 사람, 그럴 때는 자기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 한 병씩을 들고 나타나던 사람, 술도 담배도 못 하던 사람, IMF 그 어려운 와중에 명퇴하고 1억 5천인가 하는 몫돈을 겨우 쥐고서는 뱃속 편하게 장사 좀 해 보려고 그런다던 사람, 장사 좀 되나 싶었더니 세 든 건물이 다른 이에게 팔리는 바람에 가게의 몫돈이던 권리금을 푼돈의 위로금으로 되받을 처지에 놓였던 사람, 나는 그를 정확히 15년 전 내가 갓 신부 되었을 때, 어려운 청소년들과 사느라 고생하던 시절에 든든한 후원자로 만났었다. 그는 7월 3일 밤에 나에게 간다고 나섰다는데 나와 연락이 안 된 탓이었든지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갔고, 4일 하루를 돌아다니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던 길에 천안에서 내게 가져다준다고 차 트렁크 뒤에 얼마 전에 실어 놓았다던 양주 두 병 중에서 한 병을 거의 다 먹고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나는 이번 나의 7월 5일 첫 미사 날을 그렇게 마음 아프고 슬픈 그런 날로 지내야만 했었다. 착하기만 했고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그런 사람이 살기에는 정말이지 너무나 어려운 세상이다. 우리나라 상법으로는 절대 보장이 안 된다는 이른바 권리금이라는 이유로 자기 돈 현금으로 버젓이 내놓고는 자기 온 생애의 전부일 것 같은 재산을 날린 사람이나 날릴 처지에 놓인 사람이 이 땅에 어디 한둘일까마는 그래도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고 억울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20010709)

————————

한 형제의 죽음

주어진 시간과 날들은 소리 없이 간다. 누가 훔쳐 간 것도 아니고 몰래 어디에 숨겨둔 것도 아닌데 흔적도 없이 그렇게 가고 만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는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고, 밥을 먹을 때는 밥그릇 위로 지나가고, 멍하니 가만히 있으면 빤히 뜬 눈 앞으로 지나가고, 온몸으로 가로막으면 나를 훌쩍 뛰어넘어 내 위로 지나가고, 잠자리에 누우면 내 옆을 돌아 내 옆으로 지나간다.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한 형제가 죽었다. 우리 수도자들은 핏줄, 출신, 성장 배경이 다른 채로 만나, 서로 형제라 고백하고, 매일 한솥밥을 먹으며 평생을 공동체라는 이름 안에 인생을 함께 동반한다. 이번에 돌아가신 형제는 일흔을 앞두고 소위 아홉수를 넘기지 못하면서 4년여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죽음에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는 보편성,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대체 불가능성,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불가피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도 한 형제의 죽음을 아주 가까이서 동행해야 했던 체험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맞는 첫 번째 주제어는 품위와 자존심이다. 특별히 오랜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형제는 유달리 기저귀를 차기 싫어했다. 기저귀를 차야 한다는 내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에 기저귀는 아니더라도 그 소재로 된 조각들을 잘라 한쪽에 숨겨두면서 아무도 모르니까 써보라는 말을 하고, 자신이 몇 번 체험한 뒤에야, 그리고 그 기저귀라는 것을 가져다드리면서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나와 당신만이 아는 일이고 여기 침대 밑에 숨겨놓았다는 식의 공개된 거짓말 끝에야 그 기저귀라는 것을 차고 얼마간을 지내다가 그렇게 그 형제는 돌아가셨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바지 끈을 누군가가 내려줘야 되는 상황이 가장 처절한 비참함을 맛보는 순간이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형제의 이런 모습들은 마지막 자기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해보려는 안간힘인 것 같았다.

죽음의 두 번째 화두는 아마도 두려움이다. 형제는 마지막 날까지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무척 두려웠던 것 같다. 죽음이나 준비 같은 마지막에 관한 말을 서로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이대로 죽으면 축복이지.’ 했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아직은 조금 더 살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고 하면서 눈을 흘기기도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거의 의식이 뚜렷해야 하는 잔인한 병인 암이었기에, 형제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임을 절절히 목격하였기에, 말 그대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말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보았기에, 형제는 생의 인연을 놓기가 그렇게 두려웠고, 고통이 두려웠으며, 또 이 생生을 떠나 다른 생으로 옮겨가 맞닥뜨려야 하는 미지未知가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일까 하고 되짚어 본다.

죽음이 갖는 세 번째 특성은 일치라고 하는 속성이다. 가족 누군가가 아프거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할 때 모두는 쉽게 서로 한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 형제의 주위에 똑같은 마음을 지니고 모여들어 같은 눈물을 흘린다. 죽음은 혼자의 것이지만 동시에 주변에 있는 모든 이의 것이다. 가족 내에서 누가 아프다는 것은 그에게 가족들의 일치된 애정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왔다는 것이겠고, 형제의 죽음 주위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죽음이나 인생살이가 철저히 혼자만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모든 이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며, 본질에서 우리가 모두 같고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항구에서 어떤 배가 점점 멀어져가다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듯, 그렇게 한 형제의 죽음으로 그 형제를 이제는 더는 예전의 모습으로 볼 수 없게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수평선 너머 다른 포구에서는 점점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저 너머 다른 포구를 생각할 수 있기에, 그리고 아무것도 확실히 아는 바는 없지만 뭔가를 나름대로 믿을 수는 있기에, 형제를 오래도록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경향신문, 20060804)

————————

생명의 사람들

아침에 나를 아는 어떤 이가 전화를 해서 간밤의 꿈에 내가 죽어 장례를 치른다기에 슬프게 울었다면서 어찌 지내냐는 문안 전화를 해 왔다. 꿈속에서나마 내가 당사자가 되어 죽었다는 소리는 기분이 참 묘했다. 꿈속에서의 죽음은 삶 속에서의 죽음을 경계하라는 계시일까? 생명이 약동하는 세상이요, 세상이 아름답고 살만하다고 믿으며 살아가고들 있지만, 눈만 뜨고 나면 끔찍한 죽음의 소식들 천지이다.

한 해에 몇백만의 태아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는 것이라든가 자랑스럽지 않은 세계 1위의 자살률이니 자살동호회니 하는 이 땅의 죽음 이야기를 비롯하여, 먼 나라여서 다행이고 우리하고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이상한 안도감으로 위로를 삼는 다른 나라의 죽음 이야기, 바로 우리 이웃에 있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사람들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은 소식들이 계속된다. 끔찍하고 잔인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묘사가 되지 않는 소식들이며 다시는 차마 입에 담아서 안 될 것 같은 소식도 아닌 소식들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 수십 명이 순식간에 총을 맞아 죽었다는 소식, 어머니의 목을 가방에 담아 와서 태연스레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자수했다는 어떤 자식의 소식, 귀갓길에 집 앞에서 사라졌던 사랑스러운 딸이 몇십일이 지나 이웃 담장 밑에서 비닐봉지에 쌓여 발견되었다는 소식, 어렵게 먹여주고 키워 준 친할머니를 흉기로 살해했다는 중학생의 소식, 전쟁터에서 매일같이 죽어가는 한쪽 국민의 숫자만을 세다가 지쳐서 이제 그 숫자 세기가 더는 의미 없이 되었다는 소식, 몸에 폭탄을 두르고 스스로 몸을 던져 다른 사람들과 무더기로 죽어갔다는 소식, 급기야는 살아있는 동물을 ‘퍼포먼스’라는 이름 아래 여럿이 모여 처참하게 죽이고 좋아하며 손뼉을 쳤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도대체 이래도 되는 것일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싶어지며 문득 인간의 본성이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생명의 세상에 죽음의 소식이 넘쳐나고, 감히 문화일 수도 없는 죽음의 문화가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의 세상에 죽음의 문화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소비주의 때문이다. 돈이 되고 장사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설령 인간의 생명까지도 사고팔며 이용과 폐기처분이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불치의 병을 고친다는 연구와 노력마저 국가적 기밀이고 산업이 되면서 급기야 기술로까지 전락하게 한다. 죽음의 사람들이 절대자의 영역을 침범하여 이를 조작하려 들고 이를 통해 장사꾼의 돈벌이를 하려 드는 것이다.

죽음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와 쾌락주의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 이는 나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타인의 생명까지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동반한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그 행복의 추구가 자아실현의 과정이라지만 그 자아실현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은 참으로 위험하다. 여기에는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고, 윤리와 공동선의 원리, 그리고 나눔과 이른바 연대(solidarity)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죽음의 문화는 우리의 주변과 관계에 철저히 의존하는 소위 사회적 강박관념,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는 끊임없이, 그리고 점점 더 주변에 매달려 다른 이들의 평가와 시선에 급급하고 누가 내게 우호적인지 아닌지 하는 염려로 주변에 종속되면서 그런 강박관념을 벗어나기 위해서 미움과 시기, 조작, 권모술수, 사기, 질투, 사욕을 거침없이 일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생명의 사람들은 죽음, 허탈, 공허, 어둠, 슬픔에 대한 기억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생명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불신에 대한 믿음의 승리,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 미움과 죄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꿈꾸는 것으로 오늘을 산다. 생명의 사람들은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살며, 너와 내가 어우러져 비로소 내 삶이 완성된다는 믿음 안에 살며, 사회적 강박관념이라는 두려움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간다.(경향신문, 20070616)

————————

신부님의 장례식과 죽음의 의미

옛날 어려웠던 시절 선교사로 오셔서 외국의 원조를 끌어다가 이렇게 저렇게 이바지하셨던 분이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분들이 뒷주머니에 몰래 가져온 달러 덕분에 이제껏 공부하고 성장한 셈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하지만, 피땀 흘린 노동자들의 수고와 함께 신부님 같은 분들이 알게 모르게 이 땅에 뿌려 준 달러의 힘이 제 몫을 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만 한다.

돌아가신 신부님을 황망 중에 땅에 묻던 날,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무슨 일을 하였고 무슨 직책과 소임을 맡아왔건, 무슨 업적을 남겼든 말았든 그 모든 것이 그저 허망할 뿐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바로 어제까지 그 노인 신부님이 자기만 아는 것 같아 얄미웠고, 불쌍했었으며, 귀찮기도 했었고, 심지어 아웅다웅 신경전마저 벌이곤 했었는데, 그렇게 한순간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동안의 모든 논리와 생각들이 부질없었다는 생각, 허무하고 또 허무할 뿐인데 뭘 어쩌자는 것이었던가를 묻게 되면서 죽음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이런 허무함 중에서 ‘의미’라는 단어 하나를 추켜들었다.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내 삶이 죽은 다음에는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하는 것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신부님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으니 당신 믿었던 하느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을 가름하고 의미를 가름하리라.

신부님의 초상을 치르면서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두려움이었다. 내게도 언젠가 닥쳐올 죽음과 그 순간에 있을지도 모르는 고통이 두려웠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 삶과 나를 아는 수많은 사람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과 어느 순간 졸지에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며, 내가 믿어 살아가는 하느님 앞에 나서기에는 너무 죄 많은 몸이어서 두려웠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필경 보이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만의 비밀이 낱낱이 공개되고 서로서로 알게 될 것만 같아 그때 저승에서 만나게 될 이승의 인연들이 두려웠다.

신부님을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해진다.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특별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깊이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 신부님의 죽음 앞에서는 왜 이렇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나보다 먼저 죽어가는 사람들의 죽음에 별다른 이유 없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님의 죽음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어머님께 죄송스럽고 미안했었다는 생각이 계속된다. 아마도 앞선 분들이 마친 생명의 연장을 살아가는 나로서 그 생명 값을 다 못하고 살아간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경향신문, 20080419)

————————

나를 버려야 한다

나치들은 유럽 전역에서 끌고 온 유대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너희들만이 살아갈 아름다운 고장이 보장되어 있다”라면서 최소 필수품만을 소지하고 기차에 오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기차는 곧장 가스실의 대량 학살이 기다리고 있는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죽음의 열차였다. 기차가 달리는 도중 몇몇 선지자와 같은 분들은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기차임을 직감하였고, 할 수 있는 대로 기차에서 내려 탈출해야 한다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이를 간과하였지만 이 말을 새겨들은 이들은 간간이 기차가 멈추어 설 때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세상살이도 이런 기차 위의 삶과 같다고 생각을 해 본다. 복잡다단한 아우성 속에서 허황된 말마디와 단편적인 사실만을 믿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라며 애써 자위하고 죽음을 향해 가다가 끝나고 마는 기차 위 같은 인생. 우리 인생이 그러한 죽음으로 모든 것을 가름 짓고 만다면 인생은 너무 공허하다.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가 아니기 위해서는, 달리고 있는 기차 위에서 뛰어내리듯 인생의 행로에서 뛰어내려 가끔이라도 우리는 우리가 잡고 있다가 놓았던 것, 구하고 찾았던 것보다 버린 것을 헤아려보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 많은 이들이 손에 쥔 것만을 헤아리는 습성에 젖어 있고, 그것이 우리의 우둔한 인생이라지만, 내가 가장 괜찮다고 믿는 길을 버리고 어느 순간 나의 철로 위에서 뛰어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선각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던가 말이다. 살아왔던 날들이 그저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하고 얻으려 한 삶의 연속이었음을 간파해 내고,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요체가 아니라 덜어내고 잃어가는 것, 그래서 점점 더 단출한 삶이 되어가도록 하는 것이 세월 가고 나이 먹어가는 것임을 깨우쳐야 한다.

인생길을 과감하게 수정하는 것은 애초에 조물주가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다던 내 위에, 살아가면서 내가 덧씌워 놓았고 그릇된 허물과 부질없는 집착으로 내가 덕지덕지 누벼놓았던 나 위의 나를 벗어버리고, 고고학의 정성스러운 복원작업처럼 원래의 나를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물주가 하신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달리해 놓았던 것들을 버려야 하고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만이고 인색함이며, 색정色情이고 분노이며, 탐욕이고 질투이며 게으름이다. 그런 의미로 나를 버린다는 것은 혐오스럽고 지저분하고 형편없다는 자괴지심에 빠질 수도 있게 하는 나 자신과 직면하는 길이다. 이를 겁내지 않고 맞대면하는 것은 실제의 나를 보지 않으려는 외면과 핑계, 애써 피하고 싶은 강박관념,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대로만 나를 보려는 잘못된 태도를 직면하는 길이다.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버리는 길은 궁극적으로 누군가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버리는 길이 될 때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세상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가깝게 우리의 가족 누군가가 지금의 나를 위해 자신을 버려주었고, 아무도 모르는 이를 위해 자신을 버린 이들이 있었으며, 철저히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완성하여 갔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세상은 그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것이고, 희망을 지녀 살아갈 만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불확실로 보이는 미지를 향해 나를 던지는 것, 지금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것들, 익숙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 미지의 앞날에 손을 내밀어 나를 내가 모르는 힘과 섭리가 이끌어 가도록 놓아두는 것, 그래서 내 존재의 신비를 깨우치고 나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진정으로 나를 버릴 수 없다면 공허한 인생의 허상과 실존의 그늘이 만들어 놓은 어둠에 홀로 남아 고립이라는 참담함을 맛볼 수밖에 없다. 나를 버리고, 정신 차려, 내가 짊어져야 할 내 몫을 내 어깨에 스스로 져야 한다.(경향신문, 20081025)

————————

죽음 앞에서

신자 수가 몇 천이 넘는 성당에 살다 보면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돌아가시는 분을 자주 만나야 하는 경우이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얘기하고 알고 지내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을 때는 인간적으로 무척 어렵다. 얼마 전에는 그렇게도 무덥고 변덕스러운 날씨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줄초상이 났다. 주간의 셋째 날인 수요일이 채 가기도 전에 무려 다섯 번째 부음을 접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 다섯 번의 장례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죽음 앞에서는 우선 인간이 하염없이 무력하고 인생이 허망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많아서 소위 호상이면 뭐하고 호상이 아니면 뭣할까 싶고, 그 인생이 어떠한 내용의 삶을 살았든 남은 자의 몫일 뿐인 후일담도 그저 얼마간이면 지나갈 일일 텐데 그것이 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싶다. 인생은 애초에 홀로 출발했고 홀로 마감지어야 하는 철저한 혼자임이 틀림없다. 살았어도 또 죽었어도 그것이 순간이고 백지 한 장의 두께만큼도 아닌 이쪽저쪽일 뿐이다.

나의 죽음도 금방일 것만 같아서 잠자리에 누울 때 혹시 내일 아침 일어나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정갈하고 바른 모습으로라도 누워야 되는 것은 아닌가 싶고, 침실의 구석구석을 정리라도 해 놓아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엄습하는가 하면, 외출을 해야 할 때도 한순간의 실수가 모든 것을 가름하지나 않을까 싶어 나가기가 겁나고, ‘운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채우며 조바심이 스치기도 한다.

죽음을 가까이 자주 목격하며 피부로 느껴 살아가라고 하느님께서 나를 이런 자리에 보내셨다 싶어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감사에 버금가는 정돈된 삶의 모습이지 못한 채 머리로 알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해야 할 바들을 은근히 미뤄놓고 못 본 척 외면하며 살아가려는 내면의 끈질긴 나태의 속성이 어찌 그리 질긴가 하며 놀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나는 괜찮을 거야’ 혹은 ‘오늘은, 아직은…’ 하며 속삭여 오는 악마의 힘이 훨씬 더 강한 것인지, 죽음의 두려움을 애써 잊으려는 삶의 외면인지, 생명의 활력이 너무 강하여 감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 생명 안에 파고들지 못하는 것인지?

죽음 앞에서는 문득 그 죽음을 맞이하는 의례들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인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주검을 어떤 절차와 방식으로 모셔야 하고 우리가 무슨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심지어는 얼마간을 울어야 하는지까지 나름대로 규칙과 방식을 갖는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는 정해진 틀이 없이는 결코 그 죽음을 맞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고학에서는 유물, 유적, 유골을 놓고 인간의 흔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마지막 기준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유한 습성이나 의례, 규칙성 같은 것이 보이는지 아닌지로 한다고 했던가?

죽음 앞에서는 뒤늦은 후회와 고인에 대한 미안함이 범벅된 고인과 나와의 인연으로 엮였던 수많은 기억이 눈물 속에 지나간다. 또한 ‘법 없이도 살 만한 사람들이 항상 안타깝게도 먼저 간다’라는 것이 죽음 앞에 선 남아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정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먼저 가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그저 사랑이 된다. 이런 기억들이 고인과 함께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며 애틋하게 살아왔던 소위 ‘사랑’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랑의 실체는 기억일까?

혼수상태에서 한없이 잠만 자다가 이승을 이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죽음이 연습이요,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하루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면서 영원한 수면을 연습하고, 죽음이 임박해서는 잠자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한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수면에 빠진다. 잠의 연습처럼 삶의 마디와 매듭들을 의미 있게 지나도록 부단히 연습하다 보면 죽음의 통과의례가 조금은 더 쉽고 의미 있어지는 것일까?(경향신문, 20090801)

————————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아직 채 50도 되지 않은 한참 나이의 후배 하나가 저세상으로 갔다. 의사이기까지 한 후배였는데 자기 몸에 그렇게 몹쓸 암 덩어리가 온몸을 잠식해 오는 동안에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정말이지 어이없게도 그렇게 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정말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허무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엄습해 왔다. 암이라는 병은 정말 지독한 녀석이고 대단한 녀석임에 틀림이 없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를 마지막 하나까지 깡그리 다 먹어 치운 다음에야, 그것도 환자의 의식을 최후의 순간까지 또렷하게 유지해가면서 그렇게 자기도 죽어가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후배를 마지막 만난 것은 죽기 5일 전이었다. 이미 몸에는 복수가 차 올라와 배가 풍선만 하여 졌으며, 간간이 복수를 빼낼 때는 복수에 피까지 섞여 나오는 상황이었고, 눈에는 황달이 역력했으며, 몸은 거의 가죽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직 의식은 모든 부분에서 뚜렷했고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였으므로(그때 후배는 어머니께서 오실 것이라며 누나가 매만져 주는 대로 머리도 빗었고, 심지어 얼굴에 팩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배의 부고를 접하는 순간 ‘아니 벌써?’ 하는 내심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렇지! 사실 그때 몸의 상태로 봐서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사람은 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자기 죽음을 예감하지는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본인이 의사였으므로 수도 없이 죽어가는 환자들의 마지막 단계가 어떨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학습하였을 터임에도, 본인의 몸에 다가온 그 상황은 필연적으로 나에게만은 예외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면 너무 영리한 친구였으므로 본인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을 주변에는 애써 숨기려 했던 것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의 작은 체험을 바탕으로 보면 인간은 자기 죽음의 순간을 결코 예감하거나 예견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예외일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몇 년 전 어떤 선배 하나가 돌아가시기 전 불과 몇 시간 전에 둘이서만 한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에도 그랬다. 서로 속말을 주고받을만한 처지였으므로 둘이서만 있는 자리에서 아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신음을 하고 있던 그 선배에게 내가 물었다. ‘죽을 것 같아?’ 엄청난 양의 진통제로 간신히 숨과 신음을 내뱉고 있던 위암의 그 선배도 그런 나의 질문에 똑똑하고 분명한 어조로 ‘아직,… 아니야.’라고 두 번에 끊어서 대답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도 ‘조금은 시간이 남았나 보다’ 생각하고 잠깐 외출했고, 선배는 야속하게도 그 시간 동안에 운명을 하고 말았다.

다소의 예외는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는 부정 속에서, 아니면 전혀 실감하지 못한 채로 죽어간다. 실로 삶과 죽음의 이쪽저쪽이 순간이고 찰나인데 그것도 짐작 못 하는 우둔한 만물의 영장이 바로 인간이다. 아니 인간의 우둔함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결코 깨우치지 못하는 죽음의 신비이다. 인간들은 평생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종말이 가져다주는 증세들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서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죽음만큼은 예견할 수 없는 존재가 틀림없기에 죽음의 문제는 정말 신비이고 아이러니이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에게도 닥칠 죽음의 그 순간에 나도 그렇게 죽어갈 것이 뻔하기에, 아직까지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하느님 앞에 갈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나 자신의 후생이 걱정스럽고 두렵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우화대로 동굴의 위에서는 맹수가 으르렁거리고, 아래에서는 또 다른 맹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 간신히 중간의 나무에 매달려서 팔의 힘은 빠져 가는데, 그 와중에 낮과 밤이라는 흰 쥐와 검은 쥐가 나무를 갉아 먹어 들어오는, 다급하다 못해 처절한 상황에서조차도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에 흘러내리는 꿀을 핥으려고 혀를 내밀고 눈을 돌린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 했던가? 마지막 날을 위해 정갈하게 준비하고 떠날 수 있는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고 자위하면서, 그러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억지 아닌 억지를 쓰는 심정으로 오늘 하루를 또 넘긴다. 잠은 죽음의 연습이라는데, 나는 그 죽음을 다시 한번 연습해 보겠다고 또 잠자리에 든다.(20100117)

————————

, 세월호!

이럴 수는 없다 싶었다. 말도 안 된다 싶었다. 죽지 않을 수 있는 축복을 얻었음에도 늙어가지 않는 축복을 함께 청하지 못해, 오는 세월 속에 하염없이 늙어만 가는 잔인함을 언제까지고 살아야 하는, 그래서 시인의 말 그대로 ‘잔인한 4월’이었다. 아니다. 젊음을 유지하지 않아도 좋고, 어디 한 구석이 망가져도 좋으며, 속절없이 늙어만 갈지라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바램 속에 거친 바다를 언제까지나 바라다보아야만 하는, 그래서 우리의 4월은 더더욱 잔인하였다. 봄바람이 스산하여 왠지 모르게 불안 불안한 채로 그렇게 가까스로 4월을 절반 갓 넘겼을 때, 그렇게 우리의 잔인한 4월은 몰아쳤다.

그날 아침, 10시 17분 아이의 마지막 말은 ‘기다리래!’라는 순진한 네 글자였다. 그렇게 아이들의 마지막 기다림을 어른들은 여지없이, 무참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잔인하게 무찔러버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순진함 앞에서 돈 되는 일이면 그 무엇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물질만능주의, 그 누구도 상관없이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 인간은 경험으로 생명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동물이어서 수도 없이 많은 경험 속에 이제는 배웠을 법도 한데 그때그때 차곡차곡 교훈을 얻지 못하고 막연한 방관으로 지나쳐버렸던 임기응변과 무지몽매無知蒙昧함, 나 하나가 뭘 어떻게 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동조하거나 포기하며 쌓아간, 그래서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거대한 힘의 횡포요 사회적 구조악이라는 올가미, 이런 것이 한데 어우러져 난장을 피웠다.

그리고 그 난장판에 오늘까지도 우리의 눈과 귀를 붙잡아두고 있는 언론도 너무했다. 아무리 언론이 근본적인 근원을 파헤치기보다 생태적으로 선정적이어야만 하고, 갈등의 양상과 과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지녔으며, 해결이나 조정에 나서기보다 갈등을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언론도 줏대 없는 춤을 여태껏 계속 추어대고 있다.

아만다 리플리라는 신문기자가 그랬다. 눈앞에 다가온 엄청난 재앙 앞에 선 인간은 맨 먼저 ‘거부(denial)’ 한다고. 물에 잠겨 숨이 막히고 손가락 마디들이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 우리 아이들도 거부하였을 것이고, 지금 남아 있는 우리도 결코 이건 우리에게 닥친 위험이 아니라고 거부하고 부정(否定)하고 있다. 그러다가 인간은 또 찬찬히 생각하게 되는 ‘숙고(deliberation)’의 과정을 거친다 했다. 애들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뒤집힌 것임을 생각했을 것이고, 이 상황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 속에 있으면서 소리를 질러대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눈이 짓무르게 바다만 바라보면서 남아 있는 우리도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또 머리를 떨구고 땅만 쳐다보다가, 어찌해야 살아남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기자는 계속하여 마침내 인간은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맞이한다고 했다. 우리 애들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는 거대함 앞에서 공황 상태가 되거나 마비가 와서 꼼짝도 못 하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았거나 아니면 버둥거리며 그 상황을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또 쓰다가, 그렇게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애들은 그렇게 죽어감으로 결정적인 상황을 맞이했지만, 죄 많은 우리는 살아남아, 물 밖에 있어서, 오늘도 하늘에 떠 있는 해의 밝은 빛 아래에서 ‘그다음’의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다. 우리도 뭔가를 결정해야 한다. 기자는 그 결정적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오로지 그 결정을 몸에 배게 하는 평상시의 훈련과 사회적 차원의 ‘교육’뿐이라고 했다.

우리도 남은 ‘세월’을 눈물만 흘리다가 말라비틀어져 애들처럼 죽어버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2014년 4월이 됐어야만 했던 원인 찾기, 나 아닌 너의 탓이었다고 변명하며 결국은 자신을 찔러대고 말, 탓하기를 넘어야 한다. 살아남은 비겁자요 방관자라는 죄책감 속에서,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며, 그나마 몇 명이라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구해진 자들로 대변되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그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이 모든 일의 증인으로 살아남아 주어 고맙다며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앞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말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말하겠다고,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죽어간 이들이 짧은 세월 동안 이 땅에 남긴 삶의 흔적을 그들의 이름으로 계속 이어가야만 한다.(2014년 5월, 4월 16일을 넘긴 다음 청소년의 달, 어버이날에)

One thought on “죽음과 관련하여 썼던 글 몇 편

  1. 죽음에 대한 다양한 경험 기록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남편을 간호했던 9년 전 제 모습도 기억납니다. 죽기 며칠 전에도 살고자 했던 그 모습이 애잔합니다. 전 어떻게 남편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이것저것 준비할 수 밖에 없던 그날들.
    많이 슬퍼하고 애도하고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단 하루만 생각합니다. 아. 오늘도 살았구나. 그러면서 주변정리를 해야겠다만 맴돕니다. 모든 게 번잡스럽게 느껴집니다.
    제발 갈 때는 가볍게. 가볍게.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4월은 슬픕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