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막바지인 사순 제5주일에는 이른바 ‘표징의 책’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부(1-12장) 중 맨 마지막 장의 한 대목을 듣는다. 예수님 공생활에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마지막 활동인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고, 그곳 라자로의 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며, 최고 의회가 예수님과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를 한 뒤이다. 이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 가운데 드러나지 않게 다니시고 광야가 가까운 에프라임이라는 곳에서 제자들과 머무셨는데, 파스카 축제가 다가오던 시점에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성전에 모여 예수님께서 과연 성전에 나타나실지를 두고 수군거린다.(참조. 요한 11,1-57) 대사제 직에 있던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더 낫다는 사실”(요한 11,50)을 적시하며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다.
1.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임박하던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외치면서 맞아들인다.(참조. 요한 12,12-14) 대대적인 예수님 환영 인파를 보게 된 바리사이들은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ὁ κόσμος, ho kósmos)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소.”(요한 12,19) 하며 실망한다. “온 세상”을 얘기하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요한 12,20)라는 오늘 복음의 시작 절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군중 가운데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일으키시는 분이시고 권위 있는 스승이시며 예언자라고 생각하여 그분과 말씀을 나누고자) 갈릴래아의 (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요한 12.21)
“갈릴래아의 벳사이다”라 하는데, 벳사이다는 예수의 제자 중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으로(요한 1,44;12,21) 당시 많은 그리스인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 카파르나움과 코라진과 더불어 이곳 벳사이다에서 복음 전파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 이 세 마을에 대하여 불행을 선언하신 적이 있다.(마태 11,20-24 루카 10,13-15) 필립보는 예수님의 첫 번째 4제자의 부르심에서 “와서 보시오!”라는 말로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이다.(요한 1,46 참조) 그리스인들이 필립보를 ‘선생님’이라 하면서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한다. 예수님을 뵙고 싶은 것은 우리 모든 인간의 소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뵙겠다고 찾아온 그리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하는 대표인 셈이다. 주님께서는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시고,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이라 하셨으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다. 과연 우리가 보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인지, 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났던가 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과연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얼마나, 주님을 뵙고 싶은 열망을 발원하였는가?’ 또 ‘과연 누구를 보았는가?’를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성경의 마지막은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묵시 22,3)이라고 전한다. 우리가 만날 수 없는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로 만난다. 그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하고 작은 이들 안에 내 얼굴이 있다 하시고, 형제들이 너를 통하여 나를 보게 하라’ 하신다.
한편,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여러 사람의 다리가 있었음도 본다. 예수님 편에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분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우리를 그분께 데려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 사건, 상황, 사물마다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표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2. “영광스럽게 될 때…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죽으면”
그리스인들을 만나는 일은 이방인들을 만나는 상황이므로 율법과 정결에 관한 규칙으로 볼 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익히 알고 있던 필립보는 예수님을 따랐던 첫 번째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아(참조. 요한 1,37-40)에게 가서 일단 상의하고, 둘이서 결정한 뒤에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요한 12,22) 드린다. 제4복음서는 이에 관해 예수님의 직접적인 대답 대신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3-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이 당신과 만나고 싶어 하는 요청을 두고 이것이 바로 결정적으로 다가온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될 때”의 표징이라고 선포하신다. 요한복음의 서두에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신의 어머니에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고 말씀하셨고, 이어지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장차 그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었다.(참조. 요한 4,21-23;5,25;7,30;8,20) 이제 이방인들의 면담 요청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 “때가 왔다”(요한 12,23) 하시면서 당신의 죽음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참된 생명의 원천이 되며, 당신의 영광이 아버지의 영광이 될 것을 아시고 이를 알리시고자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하는 “밀알 하나”를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 열매를 맺듯이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시면서 그 죽음을 거쳐 당신의 생명이 부활하고 많은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신다.
역설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하시면서 그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신다. 목숨에 대한 집착이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한 생명 자체를 방해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인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바치고 줄 수 있는 생명을 또 다른 생명을 낳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의 생명에 갇혀 내어놓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참된 생명은 자기를 내어주는 과정의 정점이다. “밀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분을 따르고 섬기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그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될 종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내다보며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품속에 당신을 온전히 묻으신 것이었다. 밀알의 비유에는 죽음을 통한 부활이 담겨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결실을 보기 위하여 땅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이 되기 위하여 사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에 떨어진 씨앗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삶의 땅에 녹아 들어가 열매를 맺는다. 씨앗이 묻히는 것은 그 씨앗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함이고, 그 씨앗이 지닌 생명력을 터뜨리기 위함이다. 씨앗이 묻히고 죽어 열매를 맺는 것은 인간의 계획과 이해 밖의 일이다. 햇빛과 시간과 땅의 은총이 열매를 맺게 한다. 씨앗은 단순하게 땅속에 존재해야 한다. 땅속에 존재함은 자기중심적 생각과 계획, 다시 말하여 에고를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라 2,20) 과정이다. 씨앗이 땅속에 존재함은 열매 맺음에 대한 깊은 희망이다. 이 희망은 인간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은총의 선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씨앗이었다. 좋은 씨앗이었던 예수님께서 죽고 땅속에 묻히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생명을 얻는 열매를 맺었으니. 이것이 바로 씨앗이 땅에 묻혀 열매를 맺는 신비이고 과정이며 씨앗의 비밀이다. 씨앗의 비밀은 죽음에서 생명을 보는 눈을 지닌 사람만이 풀 수가 있다. 눈으로 보아 알게 된 믿음의 사람들만이 씨앗의 비밀을 풀 수 있다. 씨앗의 비밀은 시간(인내)으로 풀어야 한다. 씨앗을 심어놓고 얼마나 자랐는지 매일 그 씨앗을 꺼내어보고 다시 심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은 결국 빛을 향해 그 생명을 뻗는다. 독버섯은 어둠 속에서 자라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은 빛 속에서 자란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이었던 그리스 사람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땅에 떨어짐”과 “영광스럽게 되심”,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말씀하신 셈이다. 제자들은 유다인이건 다른 민족에서 오는 이들이건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이들이다. 제자들은 항구함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분을 따르면서 그분의 수치스러운 죽음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광임을 관상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는 제4복음서가 알려주는 바에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때 모든 이를 당신께로 이끄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엿보게 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주어진 계시가 이민족들에게도 주어질 것을 알렸고, “이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요한 11,52)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이제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실 것이다.
3.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하늘에서…소리가”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체포로 이어지는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 고뇌를 묘사한 것처럼(참조. 마르 14,32-42와 그 병행구) 예수님의 마음을 묘사하는 대목으로 복음이 이어진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7-28) 하신다. 임박한 예수님 죽음의 때에 관한 겟세마니 장면(마르 14,32-42 참조)을 요한 복음사가가 독특하게 묘사한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참조. 요한 11,33-35) 이제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산란해지신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가 그분 가시는 길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 유혹이 다가왔지만, 아버지의 뜻을 간직함으로써 그 유혹을 극복하신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전해주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게 죽음 앞에 선 예수님의 유혹을 전해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을 벗어나려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당신의 사명에 충실하신다. 폭력과 힘, 그리고 지배가 아닌 겸손과 가난, 그리고 온유의 길을 고수하신다. 아버지와 당신이 함께 아버지의 뜻을 당신 안에 이루고자 하신다.
공관복음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묘사하고, 요한복음은 내적 번뇌와 투쟁을 시사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시지만, 공관복음의 겟세마니에서는 근심에 차 기도하신다.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라는 표현은 오빠 죽음을 두고 우는 마리아와 유다인들 때문에(11,33), 그리고 유다가 배반할 것을 예고하는 장면(13,21)에 등장한다. 예수님의 “때(시간)”는 어두운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될 때(23절)”, 곧 영광의 시간이므로 이 시간을 모면하게 해달라는 간청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때”를 예견했고, 이 “때”는 예수님을 기다렸다. 역시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다.(마르 14,35-36 참조)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는 아버지로부터 제시된 “때”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순종의 뜻이 담긴 청원기도이다.(마태 6,9=루카 11,2 참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아들의 모습, 곧 아버지와 일치된 아들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사랑을 선택할 “때”만이 존재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요한 12,28) 처음부터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으로 인정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분을 두고 다시 한번 영광의 “때”를 알리시는 하늘의 소리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장면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εὐλάβεια, eulábeia = holy caution, godly respect, reverent submission)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라고 묘사한다. 이때 “경외심”이라고 번역하는 말은 타협할 수 없는 복종이 아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요한 3,16) 아버지의 뜻을 깊이 헤아리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요한 3,14, 민수 21-4-9)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1-32) 하고 외치신다. 이제 바야흐로 “때”, 예수님의 “때”가 왔다. 이 “때”는 세상이 악한 행실로 심판을 받게 될 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 어둠의 왕자, 인간과 하느님의 원수가 내쳐지게 되는 때이다. 십자가 위에 높이 계신 예수님께서는 원수들, 악마, 거짓의 아버지, 하느님을 거슬러 어두운 세상의 승리자였던 이를 물리치신 승리자이시다.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인…명패”(요한 19,19.20) 그분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난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들을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 참조. 묵시 1,7) 하는 말씀대로,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 참조. 즈카 12,10) 하는 말씀대로, 유다인들과 그리스인, 그리고 로마인들이 모두 바라볼 그분께서는 그 모든 이를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고독과 은둔 중에,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아픔과 죽음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감동적이다. 인생을 살면서 어느 때 예수님을 따름에 오직 고통과 삭막함, 그리고 누군가의 내침과 거부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밀알”을 유심히 바라보고 더 깊이 묵상해야만 한다. 그리고 『예수님과 내가 함께 살고 있다!』라고 외치면서 믿음의 숨을 더 깊이 내쉬어야만 한다. 아멘!
온전히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를 배웁니다.
깊은 숨을 들이키며, “예수님과 내가 함께 살고 있다” 마음 깊이 외치며 기운찬 하루를 시작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