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신 제4복음서의 내용을 전한다.
1.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복음은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요한 2,13)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년 봄, 이스라엘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을 창조하셨고,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구원의 업적을 기리는 축제이다. 이 축제를 위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한 2,13)라는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향후 두 번 더 언급된다.(참조. 요한 6,4;11,55) 첫 번째 상경으로부터 두 번째, 세 번째에 이르면서 이는 점점 더 특별하고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 축제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더욱 완전한 의미를 더하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이고도 우주적인 구원의 파스카 축제 전야에 죽임을 당하시는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계시한다.
오늘 복음에서 이 파스카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이에론ἱερόν, ierón)”- 여기 성전은 ‘건물’을 뜻하고 다른 곳에 나오는 ‘나오스ναός’는 건물이 아니라 ‘몸’으로서의 성전이다. – 에 들어가셨다. 여기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 지성소가 있는 곳, 땅 위에 하느님의 현존(쉐키나)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수님은 그 “성전”이 본래의 목적대로 존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신다.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자리가 장터가 되고 돈이라는 우상이 판을 치는 “환전꾼”들의 돈 놀이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산헤드린으로 대표되는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수입을 챙겼고, 특히 대사제 카야파의 가문은 로마인들과 결탁하여 봉헌 제물의 수익을 독점하였었다. 이사야 예언자가 “나에게 기도하는 집…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사 56,7)이라 했던 곳, 예레미야 예언자가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예레 7,11)라고 한탄했던 성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일부 성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과거 제물로 바쳐지던 동물의 장바닥이 이른바 ‘성물聖物’과 현란한 외침으로 대체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사고팔며, 종교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외모를 갖추는 데만 급급할 뿐, 참된 믿음의 장소가 되지는 못한다.
하느님 지으신 원래 인간의 자리요 하느님의 거룩한 자리인 우리의 마음 성전도 시장 바닥이 되지나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각자의 고유성과 개성마저 장사꾼처럼 교묘하게 다른 이와 거래하고, 우리의 내면에 “양과 소” “환전”으로 상징되는 온갖 혼잡함, 온순함을 가장하였으나 목자의 휘파람 소리나 방울 소리에 그저 떼지어 몰려다니는 양과 같은 습성, 우직함과 근면함으로 치장하였으나 힘과 고집불통인 소와 같은 공격성, 이해타산과 계산으로만 관계를 설정하려는 환전상 같은 세속적 처세들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 안에 뿌리가 내린 나쁜 모든 것, 곧 죄와 동물적 충동, 소유욕, 다른 사람과의 비교…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쏟아 버리시고 엎어 버리시고자” 하신다.
2. “내 아버지의 집”
당시 성전의 장터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나아가려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으며 특별히 사제 계급이나 성전의 일을 맡아보던 이들뿐만 아니라 성도聖都라고 알려지는 예루살렘 전체에도 막대한 부를 제공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은 성전세 등을 위해서 공용 화폐인 로마 화폐를 가져와 현지 화폐로 환전을 해야 했으며, 적절한 봉헌을 위해 희생 제물을 준비해야 했다. 이런 현실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요한 2,14-16)
예수님께서 행동하시고 표징을 이루시며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릇된 예배를 거부하는 예언자로 자신을 드러내시며, 당시 상황을 직시하시고, 지금까지 모두가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집이라고 여겨왔던 곳을 폐기하시며, 주님의 집에 합당하지 않은 관습을 종료하게 하시고, “그날에는 말방울에도 ‘주님께 성별된 것’이라고 새겨지고, 주님의 집에 있는 솥들은 제단 앞에 있는 그릇들처럼 될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주님께 성별된 것이 되어, 제물을 바치려는 이들이 모두 와서, 그 솥들을 가져다가 고기를 삶을 것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0-21) 하는 즈카르야의 마지막 날 주님 집의 정화에 관한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다.
“내가 모든 형제를, 곧 에프라임 후손을 모두 쫓아낸 것처럼 너희를 내 앞에서 쫓아내겠다.”(예레 7,15) 하였던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의 이름을 들어 요구하는 그릇된 종교적 행실을 쫓아내시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하시면서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하고 시편이 일러준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정화자요 심판관으로서 당신이 곧 하느님의 아드님, 메시아이심을 밝히신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종교인들에게 적잖게 물의를 일으킬만한 내용이었다. 그들의 역할과 권위에 도전하는 이러한 행동 앞에서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왔다는 이 예수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18)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에 사용할 제물을 쫓아내셨으므로 당시 율법에 따라 지내려던 파스카 축제를 지내지 못하게 하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축제 자체를 거부하신 셈이 된다. 이러한 고발과 비난에 직면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대드는 이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그러나 그들이 지닌 진실의 범주에서는 결코 알아듣지 못할 예언으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일으켜, 부활시켜) 세우겠다.”(요한 2,19) 하고 답하신다. 이 문장에 나오는 “성전”이라는 말은 앞서 설명한 ‘나오스ναός’이다. 요한복음은 친절하게도 이를 두고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1)라는 설명을 붙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성전”과 당신 “몸”, 그리고 하느님께서 거하셨던 광야의 지성소인 천막(쉐키나)과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사실 여기서 예수님께 대들었던 예수님의 원수들은 예수님을 제압하는 데 성공할 것이고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사흘 만에” 당신 몸인 하느님 현존의 천막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돌로 지어진 성전만을 보고 있는 유다인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요?”(요한 2,20) 하며 예수님께 대든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일으키시고, 하느님의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침묵하신다. “보라,…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이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1-2.23) 하는 예언에 따라 새로운 엘리야요 예언자로 왔던 세례자 요한마저 알아보지 못했던 유다인들은 아드님으로서 마땅히 아버지의 집이요 당신의 집에 오신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모셔야 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도 않았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과 말씀에도 불구하고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곧바로, 정확하게, 예수님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러분이 바로 이 성전(성당)에 들어온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아를의 체사레우스 주교, 469/470~542년 활동)』 『성전에서 기도하려 한다면 너 자신이 성전이니 너 자신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너 스스로 그 성전의 주인이시고 너의 기도를 들어주실 분이신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만 한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
3. “당신 집을 향한 열정”
제4복음서는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이른바 ‘성전 정화’ 사건을 카나 혼인 잔치 바로 뒤에 배치하면서 혼인 잔치가 있었던 카나에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과 함께 왔던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해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폭력적이라고 볼지 모르지만, 그 누구에게도 상해를 입히지는 않으면서도 성전과 사제라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민중에게 굴레를 씌워서 벌이는 위선적 종교 시스템을 극명하게 비판하시고, 이를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그 옛날 엘리야처럼 충만한 열정을 드러내시는(참조. 1열왕 19,10.14) 분을 본다. 그래서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시편 69,10) 하며 기도로 자주 노래 불렀던 구절을 떠 올린다. 시편의 구절에서는 ‘떨어졌다’하고 과거형으로 표현되는 것을 요한복음은 “집어삼킬 것입니다” 하며 미래형으로 제자들의 반응을 묘사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열정”이 당신의 죽음, 곧 스스로 파스카의 희생양이 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열정”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당신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요한 13,1) 가는 사랑이다. 이때 사용하는 “끝까지”라는 말 ‘εις τελος(에이스 텔로스eis télos)’는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말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가지만, “끝까지”라고 해서 실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코 죽을 수 없고 소멸할 수 없는 사랑이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뒤에야” 그때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당신 몸naós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1) 돌로 세운 성전은 파괴된 후에 결코 다시 세워질 수 없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몸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실 것이다.
하느님과 만나는 곳은 예수님의 몸이고, 하느님을 향한 참된 경배는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훗날 필립보와 토마스 앞에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6.9) 하신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아 참된 희생 제물이 되셨으므로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례 의식과 예배는 영원히 끝난다. 이에 따라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우리 몸을 바치는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촉구한다. 하느님의 현존이 건축물에 있지 않고 예수님 자신이며,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콜로 2,9)라는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알려진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 자체가 하느님의 성전이므로(참조. 1코린 3,16-17) 그리스도의 몸(참조. 1코린 12,12-29)인 교회에 주님의 현존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계시되며, 하느님께서 성령의 친교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우리 몸 안에 사신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식별할 수 없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식별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2코린 13,5) 하고 준엄하게 우리를 꾸짖던 바오로 사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이익이나 관심거리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 인생을 살지 말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교회가 하느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태도를 보이면 몹시 해롭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거처인 우리 영혼이…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보다, 우리의 이익이나 추구하며 살아서 장사하는 곳이 되려는 위험에서 벗어나고 이를 물리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개인, 시민 공동체,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실제로, 비록 불법은 아니더라도, 때때로 개인적인 이득을 위하여, 또 의무나 임무라는 명분으로 선행을 이용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을 도구화하거나,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공경을 도구화하고, 당신의 모상인 인간에 대한 봉사를 도구화할 때 위험은 심각해집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3월 4일, 삼종기도)』
사막의 교부 중 한 분이었던 팜보 원장님께서 『당신이 주님의 지성소인 것을 압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몸 안에 살고 계시며 당신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당신을 사람들 가운데, 세상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고 한 형제에게 말씀하셨다. 아멘!
***
보시다
세 번 중 첫 번째 유월절을 맞는 예수님
좋은 마음으로 들어선 성전에서
동물을 사고파는 사람들, 환전상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대신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현존에 감동하는 대신 떠들썩한 장터의 현존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이를 보신 예수님
“보시고”, “쫓아내셨다”, “쏟아버리시고”, “엎어버리셨다”
“치워라”, “만들지 마라”, “이르셨다”
하느님을 이용하고
하느님의 집을 장터로 만드는 사람들을 나무라신다
제자들과 유다인들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이 아니라 예언자적인 행동으로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을 보는 제자들
다른 표징을 요구하며 어깃장, 조소, 비아냥, 따지고 덤비는 유다인들
“사흘 안에”, “마흔여섯”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는 계산, 수치에 갇히고 얽매이는 분이 아니라 하신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
예루살렘도, 교회도 아닌 부활하신 분의 지체인 우리들의 몸(1코린 3,17)
불가침의 지성소인 인간의 몸
시장, 경제, 이기심, 이익의 논리로 거래하고 더럽히며 착취하는 생명
아이들의 꿈을 금과 은으로 환산하여 팔아넘기는 사람들
거짓 우상을 위해 우리의 진실, 존엄, 자유를 팔아넘기는 사람들
마무리
우리 내면의 영적인 저항을 채찍질하고, 쫓아버리고, 엎어버리고, 치워야 한다
우리 삶을 장바닥에 내모는 사람들의 노점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을 비인간화하는 이들을 엄중히 꾸짖어야 한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아침에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오늘 강론은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의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 드리라고 당신을 사람들 가운데,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현존, 언제나 항상 내 영혼 안에 계신다. 이제 깨달았습니다. 오늘 말씀 안에 내 마음의 성전은 잘 가꾸어져 있는지 묵상하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하실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