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9,2-10(사순 제2주일 ‘나’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사진 by Christian Weiss(unsplash.com)

사순절 둘째 주일은 통상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내용을 복음으로 듣는데, 이는 예수님의 유혹을 들었던 지난주 사순 첫 번째 주일의 복음과 대비를 이룬다. 금년에는 ‘나’해로서 마르코복음이 전해주는 변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공관복음과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 독특함이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복음을 읽어나갈 것이다.

복음이 위치한 맥락으로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중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마르 8,27)라고 물으신 적이 있었고, 제자들의 이런저런 대답 끝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한 뒤이다. 예수님의 신분이 메시아로서 처음 밝혀진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르 8,30) 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ἤρξατο, érxato)’하셨다.”(마르 8,31)라는 사실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강조하듯이 기록한다. 이른바 첫 번째 수난 예고이다.

1. “높은 산에 오르셨다…모습이 변하셨다”

첫 번째 수난 예고 뒤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라는 예수님의 굳은 약속이 뒤따른다. 당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다소 수수께끼 같은 말씀으로 들었을 법하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도 좀 의아스럽게 다가온다. 오늘 복음의 첫마디는 “엿새 뒤에”(마르 9,2)라고 하는데, 베드로의 고백,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예고,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라는 약속들이 있고 난 “엿새 뒤”, 이때 오늘 복음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이루어진 셈이다. 여섯째 날은 사람이 창조된 날(참조. 창세 1,26-31)이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도 여섯째 날에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라고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제자들이 “들어야” 하는 아들로 계시되신다. 그렇게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마르 9,2)

예수님께서는 자유로이,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권을 행사하시는 분으로서 열두 사도 중에서 세 제자만 특별하고도 독특한 체험을 하도록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이 세 제자만의 이러한 체험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마르 5,37-43)에도 이미 있었고, 겟세마니의 기도 때(마르 14,32-42)에도 이어진다. 세 제자의 독특한 체험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시고자 하던 때 예수님과 함께 고독을 공유하며 예수님과의 삶을 이어가면서 주어진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모습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 어깨에 지시고 높은 산,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곳으로 오르시는 것처럼 보인다. 오랜 교회의 전승은 “높은 산”을 타보르Tabor 산으로 알려준다. ‘타보르’라는 말은 ‘높은’ 혹은 ‘빛에 가까운’이라는 뜻과 함께 ‘선택choice, 결백purity, 치열한bruising’이라는 뜻을 지닌다. 타보르 산을 어떤 이들은 헤르몬, 혹은 카르멜 산이라고도 한다.

오르셨다” 하는데,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도 “올라가시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우리의 인생도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르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예루살렘과 산에 오르는 여정이니 가파르게 숨이 차는 여정이고, 가끔은 희열(관상)을 맛보는 여정이기도 하며, 어떨 때는 안주하고 싶은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 하신 말씀을 상기하고 그분의 말씀만 들으면서(들음) 끝까지 올라야 할 등정의 여정이다. 예수님의 여정이 광야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듯이 광야와 예루살렘 사이에는 올라야 할 산이 있다. 약속된 땅에 이르기 위한 고독한 여정이 사막과 광야였듯이 에 올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도달할 수 있는 약속의 땅이 우리 앞에 있다. 구약의 모리야(1독서), 시나이(탈출 24,18;34,28)=호렙(1열왕 19,1-8), 네보, 카르멜(1열왕 18,20 2열왕 2,5), 길보아, 그리짐(판관 9,7 신명 11,29 여호 8,33 등등), 타볼, 헤르몬(신명 3,8 여호 11,3.17;13,5 1역대 5,23 시편 42,6 집회 24,13), 시온(2열왕 19,31 시편 2,6;20,2;48,2.11;50,2 이사 4,5;8,18;10,12 등), 또 신약의 산상설교의 산(마태 5-7장), 올리브(루카 22,39), 골고타(요한 19,17) 등등, 성경의 산들은 모두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였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장소이다. 구약성경의 산들은 대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약의 산, 축복의 산, 승리의 산, 생명의 산이었지만, 예수님께 산은 고뇌의 산, 기도의 산, 유혹의 산, 설교의 산, 변모의 산, 십자가의 산이다.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마르 9,2)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면서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하고, 루카가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라고 묘사하는 것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 하면서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듯이 강조하여 하느님의 행위로 묘사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설명하거나 해설할 수 없는, 그저 놀라 찬미할 수밖에 없는 신비에 맞닥뜨린다.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소명을 받을 때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이사 6,1) 하면서 “큰일 났구나, 나는 망했다.…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하고 고백하는 장면과 비슷한 상황이다.

무엇인가 말로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복음사가들이 시종일관 ‘번쩍이고 빛나며 하얗다’라고 공통으로 묘사하는 내용을 두고 훗날 교회의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창조되지 않는 하느님의 에너지’라는 은유적인 해석을 하지만, 하나의 해석일뿐 그 깊은 신비를 정확히 묘사할 길은 없다. ‘하얗다’는 것은 빛의 색이고,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다니 7,9)에서 보듯이 천상의 색이며, 열린 하늘의 색이고, 지상의 어떤 것도 범접하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색이다. 천상의 피조물인 천사들이 빛나고 새하얀 옷을 입었다고 했으며, 빛이신 주님과 만나 이야기했다는 모세만이 얼굴의 살갗이 빛났다고 했다.(참조. 탈출 34,29-35)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빛을 반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랑하는 아들(아드님)”로서 스스로 빛을 발하신다.

이러한 묵시적 환시 속에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제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4) 말라키 예언자가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라고 기록한 엘리야, 신명기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나는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줄 것이다.”(신명 18,15.18)라고 기록한 모세가 예수님의 증인들이 된다. 엘리야는 예언의 대표이고 모세는 율법의 대표로서 예수님 안에서 예언과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증언한다. 예수님은 다시 온 엘리야도 아니고(참조. 마르 6,15) 모세도 아니며 예언자 중 하나도 아니지만, 하늘의 소리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라고 선포한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우리가 들어야 할 분이시다. 엘리야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예언자가 예언해준 그분을 보고,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탈출 33,18) 하고 청했던 모세는 마침내 그 청원이 이루어졌음을 안다. 예수님과 엘리야, 그리고 모세가 나눈 이야기는 일치, 수렴, 그리고 성취의 대화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대화의 내용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이었다고 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대화의 내용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믿음의 연속성,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의 계약, 예언의 성취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대화의 내용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마르 9,31)이고 세 제자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으므로”(마르 9,32) 분명 “영광”과 관련이 있다.

2.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초막 셋”

여기서 베드로가 다른 두 제자까지도 대표하듯이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33) 하면서 모세와 엘리야라는 두 증인과 함께 있는 이 상황이 아름다움이며 행복이라 말씀드린다.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을 연장하려는 듯이 열정적으로 자기나 다른 두 제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위해 기꺼이 “초막 셋”을 짓겠다고 나선다. 이렇게 나서는 베드로는 과연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보는 계시와 환시를 순간적으로 체험한 것이었을까?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겁에 질려”(마르 9,6) 현세적 초막을 지으려 한다. 베드로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왜 그것이 좋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를 마르코 복음사가의 복음 배치에 따라 분석하면서 이 변모 직전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듣고 난 뒤(마르 8,31-33)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베드로가 했던 말이라고 본다면, 베드로의 발언은 예수님의 행보를 거스르는 유혹의 발언이었다. 우리도 가끔 현세적 초막에 안주하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 초막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고 영원의 초막을 꿈꾼다.

3.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세 제자)을 덮는다.”(마르 9,7)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항상 하느님의 현존이자 처소이며 영광의 표징이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던 시나이 산을 덮었던 구름, 그리고 하느님의 처소로 알려진 예루살렘 성전을 가득 메웠던 구름이 이제 아드님의 영광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며 세 제자에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참조. 시편 2,7 창세 22,2 신명 18,18) 하는 소리를 알린다. “구름이…덮더니”에서처럼 우리의 부끄러운 욕망, 수치스러운 이율배반, 혼란스러운 번민과 갈등, 그리고 괴로움들을 말씀의 구름으로, 은총의 구름으로 덮어야 한다. 참 빛이시고 참 태양이신 예수님의 빛으로 어둡기만 한 온 세상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기를, 그리고 우리의 영혼도 새하얗게 빛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렸던 하늘의 소리(참조. 마르 1,11)가 오직 예수님만을 위한 소리였다면, 이제 이곳에서 들리는 하늘의 소리는 세 제자를 위한 소리이다. 예수님은 진정 하느님의 유일하고도 사랑받는 아드님이시니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들어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곧 ‘쉐마 이스라엘!’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을 들으라고 하던 초대가 여기서 이제 예수님을 들으라는 초대가 된다. 예수님을 듣는다는 것은 나의 두려움을 듣는 것도 아니고, 나의 소망을 듣는 것도 아니며, 나의 상상을 듣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 덮어씌운 나의 투사投射를 듣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성경’(모세와 엘리야)을 들어야만 한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14)라는 제4복음서에 따를 때 ‘성경’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곧 우리 예수님이다.

하늘의 소리를 들은 세 제자가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 예수님의 변모를 전해주던 복음이 ‘갑자기’ 끝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 자기들이 알았던 예수님, 항상 보았고 그들의 스승이었으며 그들이 따랐던 예언자이신 온전한 인간이신 예수님만을 본다. 제자들은 평상시의 예수님 모습 외에 아무것도 다시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증인이 되어 보고 들었던 예수님의 변모는 그들의 마음 안에 내내 수수께끼처럼 남을 것이었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신비로 남을 것이었다. 훗날 베드로는 이를 두고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라고 기록한다.

지난 사순 제1주일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는 내용을 묵상한 뒤 지혜롭고 슬기로운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우리는 이번 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변모하신 내용을 묵상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수난 전날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의 괴로운 고통을 기억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도 준비하게 된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도 그분과 함께 항상 깨어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 온갖 흔들림과 유혹 중에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우리에게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적어도 들으려고만 한다면,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머무르실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서 타볼 산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심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당신 자신이 벙어리가 되시고(더 새로이 계시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오직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듣기만 원하시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들 자신만을 듣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예수님을 들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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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만

주님의 변모에 관한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의미를 농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요약한다. 당시의 제자들이나 오늘날의 신앙인들까지도 인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감히 헤아릴 길이 없다.

빛의 영광과 하늘의 소리, 그리고 제자들 곁에 계시는 예수님이 교차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구절, 세상 그 누구도 하얗게 할 수 없는 빛나는 영광과 함께 구름 속에서 들려온 소리가 있고 난 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라고 기록한 구절이 어떤 의미에서는 변모를 알려주는 가장 핵심 절일 것이다.

변모의 높은 산 위에 예수님께서 홀로 계시고, 제자들 곁에 홀로 계신다. 모든 영광중에 예수님께서 홀로 계셨고, 제자들 곁에 제자들과 똑같은 인성으로 예수님께서 홀로 계신다. 가만히 보면 조용하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앞에서 보이는 베드로의 반응은 자못 감동적이다. 베드로가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한다. “여기에서 지내고,…여기에서 짓고” 한다. 베드로에게 눈앞의 계시가 참이라면, 타볼 산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완성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도 그 높은 산 위에 그대로 머물러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만을 믿어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기에서 좋겠습니다” 한다.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한다. 유혹이다. 예수님의 신비를 과거 역사의 논리적 타당성과 종교라는 견고한 틀 안에 가두고 봉인하여 더는 나아가지 못하도록 설정한 결론 안에서 소진되게 하려는 유혹이다.

이는 크나큰 유혹이다. 모든 성인成人 교우들이 겪는 유혹이다. 이미 결론이 지어졌고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 안에 예수님을 가두어 봉인하고 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서 빚어지는 유혹이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움직이지 않으려는 이유, 초막에 피신하여 예수님의 인성이라는 조건이 지닌 전격성, 곧 위험에 노출되고 고통받으며 모욕과 죽음에까지 이르려는 여정을 회피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총애하는 제자들마저 피하지 못한 유혹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베드로의 인식은 이미 다 왔다고 생각하여 더는 나아가지 않으려는 우리의 유혹이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는 안전성, 고정성, 붙박이가 되어 움직이지 않으려는 욕구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개인으로나 교회로나 역사에 지었던 크나큰 죄이다. 인간적이고도 영적인 복지부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십자가의 적敵으로 만든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는 진정한 예수님 변모의 장소가 더는 높은 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인간적인 조건에 한없이 낮아지신 곳임을 말한다. 변모의 공간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당신을 낮추신 인간 육신의 겸손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여정도 “예수님만” 보이는 바늘귀, 종교라는 모델과 얼개에 예수님을 가두지 않는 예수님 인성의 실체를 통과해야만 한다.

변모의 위대한 신비는 예수님의 인성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살아있는 지렛대이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가련한 인성이 변모를 기다리며 간청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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