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insegnare<in+signum: 방향을 가리키는 신호 / educare: 끌어내다
2. “무엇을 찾느냐?”
공생활 시작의 예수님의 제1성→부활하신 주님의 제1성 “누구?”
“무엇”에서 “누구”에로 가는 여정
3.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매력에 이끌리는 삶, 사랑의 시작, 삶에 동참하려는 원의
4. “와서 보아라”
발과 눈이 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동작
‘보다’, ‘눈여겨보다’
가다→보다→믿다
내가 가고 내가 보아 참여하는 예수님의 신비
“묵었다”: 머무르다, 함께 지내다, stay, remain(요한 15,4-10)
5. “오후, 네 시쯤”
강렬한 사랑의 첫 순간, 기억
6.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형제가 함께 찾던 메시아, 우정, 케파(=베드로, 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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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세례 축일 다음에 맞는 주일인 오늘 전례력은 제4복음서에 따라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과 만나신 내용을 전해준다. 전례력은 요한 1,35-42에서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와 안드레아),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에게 알리고 형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부분(42절)을 전례 복음으로 취하지만, 다음날 필립보와 나타나엘에게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첫 제자 그룹 전체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50절까지를 읽는 것도 유익하다.
1. “(세례자) 요한이…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부분(요한 1,19-2,12)에 있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었던…”(요한 1,19) 사건 이후 이틀이 지나는 시점에서 세례자 “요한이 그의 제자 두 사람과 함께…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았다.”(요한 1,35)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하고 선언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종이시며, 당신 백성을 해방하실 파스카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을 소개하는 참되고도 정확한 표현이다.
진정한 스승이며 라삐인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의미있는 신호를 주어 가르치면서(* 통속 라틴어에서 ‘가르치다’에 해당하는 insignāre라는 말은 in-signō, 곧 전치사 in과 ‘신호’를 뜻하는 signō<signum, 영어의 mark에 해당하는 말로 이루어졌다. 그런 뜻으로 가르치는 것은 어원상 ‘방향을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을 담았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신호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았고, 자기에게 얽매이게도 하지 않으면서, 메시아 쪽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교육’이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의 educare 역시 ‘밖으로 끌어낸다’는 뜻이다) 세례자는 함께 있던 두 제자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선언하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과 맺어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즉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그분의 자취를 따라)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7)
2. “무엇을 찾느냐?…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와서 보아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신다.”(요한 1,38) “무엇을 찾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나에게 가장 깊은 바람은 과연 무엇인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듣는 바로 이 질문은 제4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듣는 예수님의 목소리(제1성第一聲)이다. 제4복음서의 끝자락에서는 빈 무덤 앞에서 울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하는 질문을 듣는데, 요한복음 1장에서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하시던 예수님의 또 다른 물음이다. 마리아는 그때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놀랍게도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무엇을 찾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결국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으로 마감된다. 그리스도인의 추구 역시 대부분 “무엇?”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 “누구?”로 끝나야만 한다.
“무엇을 찾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길만한 어떤 선포나 선언이 아니라 ‘질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을 따르는 것이 단순한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나 어떤 소속을 선택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진정 ‘무엇’을 찾고 ‘누구’를 찾는지 알지 못하면 잘못된 길이 될 수 있다. 베네딕토 성규에서 베네딕토 성인(St. Benedict of Nursia, 480~547년)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 하느님의 일과 순명과 모욕을 (참아 받는 데에) 열성을 다하는지(58-7)』 알지 못하고, 내 삶의 모든 안전장치를 풀어 헤쳐놓아 하느님의 은총에 나를 맡기어 내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다. ‘찾는다’는 것은 저 깊은 곳 나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지녀야만 할 태도이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나의 작업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라는 질문으로 대답한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메노μένω(méno)’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는 ‘묵다’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stay 혹은 remain’이며 특별히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어 중 하나이다.(참고. 요한 15,4-10) 제자들은 예수님을 “라삐”, 곧 스승님이요 지도자로 부르면서 그분의 거처를 알고 싶어 하고 그분의 거처에서 함께 머무르고 싶은 속내를 드러낸다. 이는 단순히 어떤 가르침을 받자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에 참여하고, 함께 머무르고 싶은 원의 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하게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압박하여 당신께 오도록 하지 않으신다. 또한 그저 그런 관계로 남기를 원하시지도 않았다. 어떤 교의적인 가르침이나 지켜야 할 계명을 주고자 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와서 보아라.”하신다. “와서 보아라.”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결정적인 대답이다. 제자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2,11) 할 것이다.
“와서 보아라.” 하는 말씀은 인간의 지체인 발과 눈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동작을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 최고 가치의 길로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가다’ 그리고 ‘보다’라는 두 동사는 ‘믿다’라는 하나의 동사가 된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의 통교가 된다. 그리스도인이 ‘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간다’는 것이며, 또한 ‘본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무엇인가를 ‘다르게’ ‘그리스도의 눈매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보다’는 마지막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고, 분명한 중심에 가 닿는 것이며, 원천에 도달하는 것이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다. 36절에서 요한 세자도 예수님을 눈여겨 “보았고”, 예수님을 “보라!” 하며, 예수님께서도 “보아라.” 하시고, 42절에서 베드로를 “눈여겨보았다” 하신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보다”라는 말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비에 점차 깊이 함께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이고 결국 믿음이다.(Seeing is believing.)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초대하신다. 우리에게도 “와서 보아라.” 하신다. 당신과의 만남을 허락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고 당신과 대화하게 하신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도록, 우리를 조금씩 당신 신비로 이끌어 가시도록, 마음과 정신이 그분과 하나 되도록,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마음을 알아”(1코린 2,1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우리가 간직하도록 하시게끔 하여야 한다. “와서 보시오.” 하셨으니,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독자적인 체험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스스로 바라보아야 한다. 바라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제자들 처지에서는 그분께로 ‘가면 그분과의 삶을 체험하고 결국 그분께서 드러내시는 영광’(참조. 요한 2,11)으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하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일어난다. 그 만남이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사건이 일어난 때를 두고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고 머무르기 시작한 새로운 삶의 결정적인 시작을 정확히 강조하여 기술하려는 의도이다. 정확한 시간의 기억은 대단히 사적私的인 추억이며 또한 강한 사랑의 순간을 기억함이다. 제자들이 생명을 얻어 비로소 살게 된 순간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요한복음을 나이 들어 기록했음을 생각할 때, 요한은 이 일화를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젊었을 때의 분명한 기억으로 전한다.
예수님의 이 첫 번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요한 1,40)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이름이 직접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의 전통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3,23;19,26;20,2;21,7.20)이며, 아마도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사도 요한이자 복음사가 요한일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복음은 첫 제자들의 부르심이 세례자 요한의 중재로 이루어졌다고 묘사하는 데 반해, 공관복음은 오늘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의 부르심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예수님께서 그들에게…‘나를 따라오너라.’…그들은 곧바로…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그들은…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6-20) 하며 예수님의 직접 부르심으로 전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 주위에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제자들이 끝까지 남아 당신과 함께 살도록 하셨으며, 일련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증언에서는 일치한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익명의 제자인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 밑,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 예언적인 표징으로 남을 모든 제자의 모델이 된다.(참조. 요한 19,26;21,22)
3.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나를 따라라…와서 보시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 중 하나로서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1,41) 한다. 안드레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자기 형제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맨 먼저 했다. 그리고 동생 안드레아가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42) 하셨다 한다. 동생 안드레아가 형 시몬을 주저함이 없이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의 오심을 이야기함에 따라 두 형제가 그분을 함께 찾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제 그들의 기다림과 찾음이 끝나고 긍정적인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에서 ‘우리’라는 복수 주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 이미 예수님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이 드러나고, 이제 이 순간으로부터 바야흐로 요한복음 전체에 메시아를 만난 신앙고백과 증언이 들어차게 될 것이다.
제4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시몬 베드로는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저 분명하게 듣는 것으로만 드러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듯이(요한 1,35) 예수님께서도 시몬을 “눈여겨보며”(요한 1,42) “케파(=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시몬의 소명과 임무, 역할을 말씀하신다. “눈여겨봄”은 그저 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내면의 시선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요한 1,42) 하시며 시몬이 “케파라고 불릴 것”을 말씀하시는데, 안드레아의 형제인 그를 두고 “요한의 아들”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이구나.’라는 말씀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볼 뿐이다.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몬을 공동체 안에서 곧바로 권위 있는 반석으로서 자리매김하시니, 그는 장차 열두 사도의 대변자요 대표자가 될 것이고(참조. 요한 6,67-69),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목자가 될 것(요한 21,15-18)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시느냐고, 어디에 묵고 계시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이가 대답하기를 온 세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한데,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느냐고 답하자, 또 다른 어떤 이가 대답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그 바보 같은 인간 중에 들어오시라고 초대하는 곳에만 들어가 묵으신다.’(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년)』 아멘!
초대!?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