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4.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da mihi…sed noli modo.) 당신께서 저의 기도를 당장 들어주실까 두려웠고 육욕의 질병을 즉시 낫게 해주실까 봐 겁났으니, 육욕이 꺼지기보다는 채워지기를 바랐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신성모독의 미신에 빠져 삿된 길을 갔고, 그것도 그 길에 확신이 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나는 그들에게 동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보자기로 그들이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언젠가는 나에게 열리리라고 여겼습니다.-De beata vita 1,4)(8-7.17)
3535. 제가 저한테 발가벗겨졌고 저의 양심이 제 속에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혀는 어디 갔는가?(입이 달렸거든 말해보라!)…당신의 뒤를 따르겠다며 무진 애를 쓰면서 저의 영혼더러 저를 따라오라고 채찍질할 적에 얼마나 그럴듯한 명언을 들이대면서 매질했겠습니까?…습관의 물결에 죽음에 쓸려가면서도 행여 그 물결에서 끌려 나오는 것을 죽을 만큼이나 겁내고 있었습니다.(8-8.18)
3536.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하늘을 빼앗아가는 마당에(마태 11,12 참조) 심장도 없는 우리네 학문을 끌어안고 우리가 정작 뒹구는 곳이라곤 살과 피 속이네, 그려.…그 결말을 당신께서는 알고 계셨지만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미쳐갔지만, 구원에 유익한 일이었고 죽을 지경이었지만 살아나기 위함이었습니다.(건강하게 병들어가고 생기있게 죽어 갔습니다.)…그리로 가는 일이야 배로 가거나 수레로 가거나 발로 가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저희가 앉아 있던 자리까지 걸어온 거리만큼도 멀지 않았습니다. 가는 일뿐만 아니고 거기 도달하는 일도 결국은 가고 싶은 마음 하나 외에 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반쯤 상처 입은 의지로 이리 기울었다가 저리 기울었다 해서는 안 되고, 한쪽은 올렸다가 한쪽은 내렸다 하면서 용을 쓰는 그런 의지여서도 안 되고 단지 결연하게 또 온전히 가고 싶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8-8.19)
3537. 하고 싶다는 마음이야 하고 싶다는 그것으로 족하니까 하고 싶다면 당장 할 수 있는데도 안 하곤 했습니다.(8-8.20)
3538. 영혼이 손더러 움직이라고 명령하면 하도 쉽게 이루어지므로 복종과 명령 사이가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영혼은 영혼이고 손은 신체입니다. 영혼은 영혼이 하고 싶은 대로 명령합니다. 이 기이한 일이 어디서 유래합니까? 또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영혼이 전적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고 전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8-9.21)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정진하고 싶은 의지와 뜻대로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유약한 의지로 절감되는 심리적 분열 상태를 ‘두 의지duae voluntates’라고 일컫는다.)
3539. 주님 안에서 빛이 되려고 하지 않고 제 자신 안에서 빛이 되고 싶어 하는 한, 저들은 스스로 더없이 짙은 어둠이 되었습니다.…오래전 계획한 대로 주 저의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도 저였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도 저였고 하기 싫었던 것도 저였습니다. 저, 결국 바로 저였습니다.(같은 영혼이 동시에 무엇을 하고 싶어 하기도하고 하기 싫어하기도 하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사물을 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하기 싫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De duabus animabus 10,14) 그런데 오롯이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오롯이 하기 싫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제가 저와 싸우고 있었고 제가 저로부터 이탈되어 갔습니다. 이 이탈은 저의 의사와 반대로 생기는 것이었지만 다른 이의 지성에서 오는 본성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고 제 지성의 죄벌임을 보여 주었습니다.(8-10.22)
3540.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사상은 첫 인간 아담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범한 죄, 그에 따른 징벌로 오는 의지의 분열, 정욕의 발호, 후손 개개인의 거듭된 범죄로 쌓인 악습이라는 질병 등을 꼽는다.)
3541. 하나가 선택되면 여럿으로 나뉘었던 자기 의지는 그 하나로 온통 쏠려야 합니다.(물체는 제 중심 무게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저의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quo feratur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eo feratur-고백록 13,9,10)(8-10.24)
3542. 엄한 자비로, 두려움과 부끄러움 두 가닥으로 꼬인 채찍을 들어 저를 거듭 내리치시는 중이었습니다.(하느님의 손길에는 ‘엄격과 자비’가 겹치고severa misericordia 인간에게 내리는 가책은 ‘두려움과 부끄러움’ 두 가닥이 한 쌍으로 말린 채찍flagella ingeminans timoris et pudoris으로 형용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또다시 물러서는 일이 없게, 아직 남아있는 저 가늘고 약한 쇠사슬을 끊지 않고 남겨두는 일 없게, 남겨두었다가 저 사슬이 다시 굵어져 전보다 더 세차게 저를 잡아 묶어버리는 일 없기 위함이었습니다.…전에 하던 짓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기까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저리에서 멈추고는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또 한 번 용을 써보곤 했으며, 약간 못미처까지 가긴 했는데 약간 못미처까지, 거의 닿을 듯, 거의거의 붙잡을 듯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거기가 있지도 않았고, 닿지도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에 죽고 생명에 살아나기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8-11.25)
3543. (교부는 ‘욕정cupiditates’을 ‘창녀meretrices’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출세욕honores, 물욕lucra, 색욕coniugium이라고 실토했었다.)(6-6.9)
3544. 금욕은 격려가 담긴 비웃음을 띠고 저를 비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 사내들도 해내고 저 아낙들도 해낸 일을 너는 못 한다니?”…그분께 너 자신을 던져라! 겁내지 마라! 그분은 네가 땅바닥에 떨어지게 몸을 빼지 않을 것이다. 마음 놓고 너를 던져라! 받아 안아 너를 고쳐주실 것이다.(8-11.27)
3545. 그러는 사이에 깊은 상념이 저의 가련함을 저 깊은 밑바닥에서 통째로 끄집어내더니 제 마음의 눈앞에다 턱 하니 쌓아놓았습니다.…저는 어느 무화과나무 밑에 주저앉았고(무화과나무를 상징적으로 풀이하면 원죄의 범죄가 가져온 흔적-창세 3,7 참조-을 가리키기도 하고 구원에 불림받는 징조-요한 1,37 참조-를 가리키기도 한다)…“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자기를 바로잡는 일을 두고 “그대가 하는 ‘내일 내일cras cras’은 까마귀 소리다. 비둘기처럼 울고 그대 가슴을 두드리라.-Sermones 82,11,14)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저의 추잡을 끝내지 않으십니까?”(8-12.28)
3546. 집어 들었습니다. 폈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arripui, aperui, et legi 이 세 단어는 카이사르의 승전보 ‘왔노라, 보았느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세 마디를 연상시킨다) 제 눈이 가서 꽂힌 첫 대목을 소리 없이 읽었습니다. “술상과 만취에도 말고,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다툼과 시비에도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에 빠져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로마 13,13-14) 저는 더 읽을 마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구절의 끝에 이르자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저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버렸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회심의 마지막 장애가 완전한 금욕생활이냐 성애의 만족이냐는 양자택일이었다는 앞의 고백으로 미루어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육욕의 그 질긴 사슬에서 놓여나는, ‘자유의지의 갑작스런 해방’을 체득한 듯하다.)(8-12.29)
※ 총 13권 278장으로 이루어진 <고백록>을 권위 있게 맨 먼저 우리말로 소개해주신 분은 최민순 신부님으로서 1965년에 바오로딸을 통해서였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Confessiones, 성염 역, 경세원, 2016년>을 따랐다. 각 문단의 앞머리 번호는 원문에 없는 개인의 분류 번호이니 독자들은 괘념치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