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사가 루카는 복음 선포를 세례자 요한의 부르심과 사명으로 시작한다. 루카가 “요한은…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루카 3,18)라고 기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단테 알뤼기에리(1265~1321년)가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기술한 복음사가(Scribe manuetidinis Christi=scribe of the gentleness of Christ)’라고 불렀던 루카는 오늘 복음에서 구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또한 구약의 여러 예언자가 부르심을 받았던 형태로 꾸며, 세례자 요한의 부르심을 통하여 구원의 보편성을 알린다. 이는 이미 시메온의 입을 통하여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루카 2,30-31)이라고 오늘 복음의 앞 장에서 설파한 것과 같은 주제이다.
세례자 요한이 복음을 선포하기 30여 년 전 이미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예수님의 그간 행적은 숨겨져 있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이 “부모님과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해갔다.”(루카 2,51-52)라고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는 복음사가들이 공통으로 예수님의 이 30여 년을 ‘숨겨진’ 시기로 남겨둔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계속 성장하셨는지, 아니면 교회의 전승에 따라서 추정컨대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계셨는지 등에 관한 문헌적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1. “하느님의 말씀이…요한에게 내렸다…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
루카는 본격적인 예수님의 공생활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제3장의 서두에서 장엄하고 거창하게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 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니코스 지방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가 카야파의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1-2) 한다. 로마제국과 유다 제사장의 아들(요한)과 관련한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광야에 개입한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록하는 것이다. 루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과정을 구체적이고도 극적으로 묘사하려는 듯이 로마 황제의 연대를 기술한다. 루카는 황제로부터 지역 통치자들을 거론한 뒤에 종교 지도자를 거론하는 순서로 연대기를 묘사한다.
“말씀이…내렸다”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개입하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삼으신 사건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려 5세기 동안 끊어지다시피 잠잠했던 예언이 거룩한 땅의 요르단 강 계곡과 유역을 중심으로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는 요한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다시 등장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요한은 설교를 통해 회개, 곧 사고방식과 행동의 변화를 설파하면서, 마음의 변화로부터 우러난 결정에 따라 행실이 달라져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표시로서 요르단 강물에 몸을 담그는 침례의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 강물에 자신을 담그는 행위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뜻한다. 곧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콜로 3,9 참조. 로마 6,6 에페 4,22)의 표시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로마 6,4)라는 표시로 물에 잠겼다가 다시 그 물에서 빠져나오는 행동이다. 이렇게 물에 잠겼다가 다시 물에서 빠져나오는 표시는 새로운 시작이며 새로움 자체이고 이를 사람들과 예언자 앞에서 공공연하게 확인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구약의 많은 율법에서 규정한 것처럼 무엇인가를 잘못했거나 잃어버린 순결을 단순히 되찾는 행위가 아니라 한 번의 행위로써 그 효력이 죽을 때까지 지속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모든 삶의 지침이자 기준으로 삼겠다는 뜻을 지닌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로 다시 들어서는 것이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며 돌아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침수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루카 3,7) 두려워하는 것을 뜻한다.
“회개”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다. 지평의 확장, 체험의 변형, 삶을 바꾸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못되게 살았음을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구체적인 행동 방식을 찾아 결심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악인에게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의 악과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에제 3,19)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from) 무엇에로(to) 돌아서는가?
복음에 의할 때 이 침수를 통한 세례라는 행위는 하느님 편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는다. 마르코복음은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라고 표현한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회개의 표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으로 그 사람의 죄를 사하신다는 용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저 용서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이 회개를 하도록 이끄시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인간이 회개하였으므로 하느님께서 용서를 해 주시는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라는 말씀에 따르면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회개를 원하거나 찾기도 전에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 먼저 작용하시는 은총이다. 우리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합당한 존재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기 원한다면, 곧 우리가 회개한다면,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와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안에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악행을 씻은 듯이 잊으시고 지워주시며, 당신 자비로 용서를 받아 의롭게 된 우리를 흠 없는 피조물로 대하시며 바라보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통해 광야와 요르단 강 유역의 모래 언덕과 바위에 메아리치기 시작한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후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바로 이 선포가 바야흐로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달려오는 수많은 군중에게 세례자 요한이라는 선구자요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진 것이다.
2.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이러한 요한의 선포를 두고 복음은 이사야 예언서 40,3-5을 인용하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라고 기록한다.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예레 1,2) 혹은 “주님의 말씀이…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에제 1,3) 하듯이 하느님 말씀의 부르심을 받은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오래전에 예언한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그대로 실행하면서 ‘위로의 사명’을 수행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세례자 요한이 공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때 그곳 광야에서 살았던 ‘쿰란’ 공동체의 수도자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은 바로 이 이사야서의 예언을 말 그대로 자기 공동체의 사명과 임무의 원천으로 생각하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곧은 길을 내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이런 이유로 쿰란 공동체의 수도자들은 광야로 나아가 하느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면서 기도와 말씀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메시아와 그분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다리며 그것만을 위해 살았다. 세례자 요한 역시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과 똑같은 이상으로 극기와 금욕을 살았고 마침내 사람들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등장을 두고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루카 3,4)라고 기록한다.
원래의 이사야서에 기록된 그대로이지만, 루카복음은 특별히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의 남녀노소 자녀들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경계를 넘어가는 “모든 사람”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 간에 맺어졌던 계약에 따라 선택되고 축복된 민족만을 말한 것이 틀림없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를 넘어 분명히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면서 우주적인 구원이요 보편적인 구원을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몇몇도 아니고 소수도 아니며 많은 이도 아닌 모두(2015년 2월 10일 피렌체 대성당, 이탈리아 전국 교회 대표자 모임에서)』를 위한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라며 이를 힘주어 강조한다.
이 모든 일이 거룩한 땅의 변두리, 그것도 적막한 침묵과 고독의 장소인 광야의 초입에서 일어난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티베리우스 황제…”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거창하고 위대한 역사적 묘사였는데, 이와는 달리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알리면서 겸손하고 숨겨진 방식으로 조용하게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세례자 요한의 출현에는 그 어떤 정치적 권력의 흔적도 없고, 세례자 요한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 가문 출신이라지만 그와 관련한 어떤 특징이나 두드러짐이 묘사되지 않는다. 그저 작은 강물이 있고, 그 강물에 내려가 사람을 물에 잠기게 하였다가 다시 일으키는 한 사람의 팔과 손, 새롭게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서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한 목소리만이 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서는 흐르는 물 자체가 대단히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더는 숨길 것도 없고 아닌 척할 수도 없는 단순함으로 물, 말씀, 잠겼다가 다시 일어서는 인간, 그를 붙들어주는 다른 이의 팔과 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례’라고 부르는 오늘날 우리의 세례가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말씀과 행동, 그리고 동작의 내용에 담긴 힘과 상징성을 잃어버린 채 단지 하나의 의례로서, 그리고 수많은 부차적인 치장들로 오염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3.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구원이 가까이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한다. “모든 사람”,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죄에 빠진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소리”를 듣고, “주님의 길을 마련”하며, 그분의 길을 “곧게 내면서” 우리가 그분을 만난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야” 한다.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야” 한다. 각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겸손해져야 하고 교만과 자만의 산은 깎아내리며 우리가 사는 처참함과 절망의 늪은 메꾸어야 한다. 회개의 여정은 거저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방해하는 장해물들을 치우는 것이다. 이것만이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하신 주님,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이다.
『지난 주일의 전례는 깨어있는 태도와 동시에 기도의 자세를 통해 대림시기와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를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곧 “깨어 있으십시오(vigilate)”와 “기도하십시오(orate)”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은 그와 같은 기다림에 어떻게 내용을 채울지 알려줍니다.…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초대하는 회개의 요구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회개의 요청은 어떤 것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느낌과 같은 느낌으로, 다시 말해 이웃의 요구를 짊어지는 형제적 관심으로 진심으로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면서, 냉담과 무관심으로 생긴 침체상태를 개선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냉담에 의해 만들어진 침체상태를 개선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멍이 많이 뚫려있는 길을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구멍(buchi)”이 많다면, 이웃과 사랑의 관계나 우호적인 관계나 형제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계는) 태도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가장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를 통해서도 행해져야 합니다. 아울러 자만과 교만으로 생긴 까다로움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마도 스스로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지만, 교만하고 가혹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진심 어린 관계를 맺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며, 우리 형제들과 화해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수행하면서, (그러한 태도를)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누가 먼저 첫걸음을 뗄 것인가(누가 먼저 시작할 것인가)?”라고 항상 생각합시다. 우리가 좋은 의지를 갖춘다면, 이 점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사실 우리의 잘못, 우리의 불충실, 우리의 불이행을 겸손하게 인정한다면, 회개는 이루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형제에게 가까이 다가섬을 통해, 세례자 요한처럼 사막에 길을 여는 사람입니다.…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매일매일 주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간청합시다. 또한 끈기 있게 평화의 씨앗, 정의의 씨앗, 형제애의 씨앗을 우리 주변에 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합시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12월 9일 삼종기도)』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