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으로 새로운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이다.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인 대림절待臨節(기다릴 대·임할 림/임, 대림시기)을 영어로는 Advent라 한다. 전례력을 따라 매주 주일을 거듭하면서 교회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간의 끝에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온 생애에 담겨있는 구원의 역동성을 거행하고 기념한다. 새로이 맞은 이 ‘다’해에는 루카복음을 따라갈 것이다. 루카복음은 우리 가운데에 오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주면서 무엇보다도 겸손과 가난함, 연약함과 부드러운 모성적 사랑으로 묘사되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 할 것이다.
2주 전 연중 제33주일 ‘나’해의 마르코복음을 통해(참조. 마르 13,26-27) “사람의 아들”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시는 장면으로 ‘나’해의 전례 복음을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루카복음의 해를 시작하면서, 그 마르코복음을 이미 보았으며 참조했을 것으로 보이는 루카의 기록(복음)을 듣는다. 마르코복음의 저술 완성 연대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기원후 70년) 전前이라고 한다면, 루카복음의 저술 연대(기원후 85년경)는 당시 세상의 종말과도 같았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로서 어휘들이 훨씬 무겁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재림은 온 땅과 모든 시간, 그리고 온 인류와 창조된 모든 것들 위에 다시 세워진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到來’요 ‘오심(라틴어 Adventus, 영어 Advent = arrival)’이다.
1.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오늘 복음 첫머리에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루카 21,25)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박해, 그리고 어두웠던 시기에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해 당시 일련의 영적인 흐름이기도 했던 묵시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신다. 역사라는 것이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압력이 느껴질 때 하느님 편에서는 ‘베일을 걷어 올려(re-veil)’ 당신을 ‘계시’하신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묵시록(계시록)’을 지칭할 때 이를 영어로는 ‘Apocalypse’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원인 그리스말 ‘아포칼립스(αποκάλυψης, apokálypsis)’는 문자 그대로 옮길 때 무엇인가의 덮개를 벗겨내는 것과 같은 상태를 묘사하면서 ‘드러남(disclosure)’, ‘계시(revelation)’라는 뜻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묵시록’을 예전에는 ‘계시록’이라 하기도 했었다.
주 예수님께서 묵시문학적인 표현으로 당신 구원 계획의 완성과 실행을 밝히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으면 우리 인간과 피조물이 살고 있는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라는 세 공간이 태초에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는”(창세 1,2) 듯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재탄생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왕국이 들어설 새로운 탄생이요 변형의 과정이며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6) 하신다.
이러한 종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성으로 주도면밀하게 이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해와 달과 별들”은 사람들에게 신의 속성을 지닌 것과도 같은 우상으로서 신화가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던 대상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날에 온 우주의 임금이시며 우리의 하느님만이 주님이시므로 하늘의 온갖 피조물과 관련된 신화神話는 영원히 제거될 것이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루카 23,44-45) 하였듯이 우주 시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힘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 드러났다. “백인대장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23,47) 하듯이 모든 피조물이 자기들의 주님이신 “의로운 분”의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곧 주님의 날에 인류는 역사적이면서도 우주적이며 존재론적인 드라마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말 번역 25절에서 “공포에 휩싸일 것이며” “까무러칠 것이다” 하신 말씀을 되짚어보자면, ‘쉬노케(συνοχὴ, synoché, 어떤 일이 발생하여 꼼짝달싹할 수 없이 힘들고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엄청난 상황)’와 ‘아포리아(ἀπορίᾳ, aporía, 몹시 당황스럽고 난처한 혼란에 빠진 상황)’를 가리킨다. 영어에서는 dismay와 perplex라는 말로 번역하였지만, 그 뜻이나 의미가 약하다. 헤어날 길이 없는 상황이고 혼란이며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우리에게 그저 두려움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새로운 창조 과정에서 피조물이 재탄생을 위해 겪어야 할 신음이다. 이는 우주와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를 다독이면서, 우리가 아는 세상의 소위 확실성이라는 것을 벗어나기 위한 기쁨의 진통으로 다가온다.
2.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참조. 신명 33,26)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28)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역사의 마지막, 곧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때가 갑자기 올 것이라 하신다. 그렇지만 이 ‘때’는 맨 처음 우주의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먼 훗날 언젠가 시간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놀라게 하듯이 갑자기 들이닥칠 사건이라 하신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이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다니 7,13-14) 그렇게 갑자기 온 우주에 임할 것이라 하신다.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루카 21,35) 하신다.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신원이 온전히 드러나는 이 비전에서 제외됨이 없을 것이라 하신다.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신…”(사도 10,38) 나자렛 사람 예수님, 폭력의 극치로 죽음을 맞으신 분, 의롭고 죄가 없으신 분,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루카 23,34) 하시며 “끝까지” 용서와 사랑이신 분께서, 하느님 안에 온전히 계시어 영광을 누리시는 그분께서 당신을 주님이요 인간의 구세주, 역사를 선과 악으로 심판하실 분으로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즈카 12,10)라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말을 이용하여 선견자 요한은 자기의 묵시록에서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묵시 1,7 또한 요한 19,37)이라고 기록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부활 이후에 당신을 드러내시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이(참조. 루카 24,40 요한 20,20.27) 모든 사람이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남은 상처, 부활하신 주님의 영적인 몸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그 상처를 통해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인간이 다른 형제들, 가난한 사람들, 죄가 없는 사람들, 꼴찌인 사람들, 목소리가 없고 누구도 알아주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을 찔러 남게 한 그 찌른 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하느님의 영광 안에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이다. 그 누구도 조작할 수 없는 재림이며 도망칠 수 없는 재림이고 두렵지만 자비로운 재림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죄를 이미 모두 지고 죄인들의 식탁에 죄인들과 함께 앉고자(참조. 루카 7,34) 오신 주님,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3.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렇다면 주님의 날을 기다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깨어”있어야(루카 21,36) 한다. ‘조심’해야 하고 잘 ‘관찰’하면서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현재 내가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화과를 가꾸는 농부는 무화과나무들 사이에 살면서 그 나무들을 하나하나 알고 보살피며 계절이 바뀌어 언제 무화과가 열릴지를 가늠한다. 겨울을 넘기고 나무에 물이 오르며 싹이 트기 시작하면 여름이 다가오는 줄을 안다.(참조. 마르 13,28-29) 그렇게 우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현시대의 사건들을 깊이 살피면서 “시대의 표징”(마태 16,3)을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역사가 어떻게 인도되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이 인도하심을 거스르고 있는지 해석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하신다. 루카가 말하는 “방탕·만취·일상의 근심”은 사람을 쳐지게 하고 산만하게 한다. 루카 복음사가의 이 내용을 들으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살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95퍼센트에 달했을 평범한 보통 시골 농부들의 삶, 그저 허덕임 속에서 생존을 위해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무척 궁핍하게 살았을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오류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방탕할 겨를이 없었고 마시려야 마실 수도 없으며 취할 수도 없었고, 좀 더 안락하게 살아보려는 세속적 일상의 근심 자체를 가질 수 없던 사람들이었다. “방탕·만취·일상의 근심”은 어떤 의미에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가진 자들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가 죽지 말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28) 하신 말씀대로 인간이 똑바로 걸으면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던 것처럼 희망으로 머리를 곧추세워야 한다. 정직한 확신으로 그 무엇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이 오실 주님을 향해 머리를 똑바로 들고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오실 주님께로 나아가는 인간의 자세이다. 이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 앞에 선 인간의 기도 자세이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 역시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이라 한다. 주님께서 영광중에 곧 도착하실 것을 알고 깨어서 그분께서 도착하시자마자 온 도시에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모둠발로 서서 이제나저제나 멀리 지평선을 응시하며 “낮이고 밤이고 쉬지 않고 성벽 위의 파수꾼”(이사 62,6)처럼 서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과연 “늘 깨어 기도하여라.” 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깨어있음’과 ‘기도’이다. ‘깨어있음’은 영적으로 산만한 삶을 경계하고, 속된 염려로 짓눌린 마음을 다스리며, 우리를 취하게 만들어 멍하게 만들고 마는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깨어있음’이 없이 삶의 방향을 유지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여타의 다른 것들이 우리 기다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깨어있음’은 우리의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나아가 이러한 ‘깨어있음’과 함께하는 ‘기도’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매일 우리 가운데에 살아계시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식별이고, 주님과 그분의 왕국이 어서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이라는 이 사건을 정말 믿고 바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하나의 신화神話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주님의 이 영광스러운 재림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결정짓는 중요한 내용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교가 그저 하나의 윤리 체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구원의 역사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인간의 허약한 육신을 취하시어 베들레헴에 오신 주님께서는 장차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66,22 2베드 3,13 묵시 21,1)을 창조하실 것이다.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내면의 잠은 늘 우리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것에서부터 생깁니다. 자신의 문제, 자신의 기쁨과 자신의 고통과 더불어 자신의 삶에 갇힌 채 고립되는 것에서 생깁니다. 항상 우리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싫증 나게 하며 희망을 가로막습니다. 여기서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게으름과 무기력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 대림시기는 (무엇보다 첫째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바깥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과 형제들의 요구와 새 세상의 열망에 마음을 열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넓히며 깨어있으라는 의무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를 잘 살기 위한 두 번째 자세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루카 복음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28절)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을, 오고 계신 예수님을 향하도록 하면서, 일어서서 기도하라는 내용입니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 우리는 일어서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깨어있음과 긴밀히 연결된, 기도 안에서 그분을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기도해야 하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개방해야 하며, 깨어있어야 하고,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소비주의의 분위기 안에서 성탄을 생각하고,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기 위해 무엇을 살 수 있는 데에만 열중하는 분위기에서 성탄을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고, 깨어있음과 긴밀히 연결된, 기도 안에서 그분을 기다리기를 원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12월 2일 삼종기도)』
대림절은 과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다시 깨어나 “마라나 타!”(1코린 16,22)를 외치며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을 소리 높여 외치게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