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旅客, 여행旅行, 여정旅程, 여관旅館, 여권旅券 등에 쓰이는 ‘旅’라는 글자는 ‘나그네 려/여’ 혹은 ‘군사 려/여’라고 한다. 옛날 글자는 ‘𣃨’로서 깃발이 나부끼는 상황에서 깃발 아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이를 ‘나부낄 언㫃’이라는 글자와 ‘좇을 종从’이라는 글자가 합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 ‘나부낄 언㫃’을 ‘방향 방方’과 ‘사람 인人’의 결합으로 보아서 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깃발 신호라고 보면 앞뒤가 이어진다.
깃발은 사람들 집합체의 상징이다.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함께 적을 대적해야 하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니 실제로 ‘旅’는 500명을 ‘一旅’라고 하는 군대 조직의 단위이기도 했다.(우리 군대 편제에도 ‘여단旅團’이라는 말이 있다) 깃발 아래 모인 군인들은 전쟁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사방팔방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旅’에는 ‘여행하다’ ‘나그네’ ‘무리’ ‘나돌아다니다’라는 뜻이 담기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旅’에는 하늘에 제사를 바치는 역할을 해야 했던 왕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는 모습도 담고 있어서 ‘제사祭祀’의 이름이나 ‘제사 지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도 보지만 깃발 아래 많은 사람이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뜻이다. 흔히 집단을 이루어서 해외여행을 다니는 패키지를 ‘깃발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 이런 연유이지 싶다.
‘旅’라는 글자와 함께 만들어진 낱말 중 가장 멋지고도 보편적인 말은 아마도 ‘여행旅行’이다. ‘여행’이라는 말만큼 인생을 잘 상징하는 말이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는 우주 만물이 각기 ‘자기의 계시’를 찾아 여행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의 오욕은 수면욕睡眠慾, 식욕食慾, 색욕色慾,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慾이라 했고, 현대의 윌리엄 글라서William Glasser(1925∼2013년)는 개인의 욕구가 생존, 사랑, 힘, 자유, 즐거움 다섯 가지라고 했다. ‘여행욕旅行慾’은 어쩌면 이런 욕구들의 종합이다. 욕구는 다스려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여행을 꿈꾸고 계획한다. 사람은 일하지 않고 여행이나 하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꿈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가슴이 뛸 때를 놓아두고 다리가 떨릴 때를 골라 하는 때늦음을 한탄하는 우매함 속에서도 여행을 바란다.
여행은 보는 것과 누리는 것, 그리고 먹는 것과 소유하는 즐거움을 망라하는 놀이이다. 여행은 새로운 것, 낯선 것들과 지어내는 이야기이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면서도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승에 사는 동안은 절대 끝나지 않을 인생길, ‘길 없는 길’의 여행을 다시 숙고하게 하는 숙제이다. 여행은 닻을 내릴 포구를 찾는 희망 속에서도 끝내 떠난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귀향이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는 귀향길에서도 누구나 떠남 자체가 보람되었다는 미화美化이다. 여행은 나이가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자기 나이를 잊게 하는 마력이다. 여행은 다소의 허영과 모험, 영웅심과 동경, 전설과 환상이 뒤섞였다 해도 자기를 속이는 거짓이 함께 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품은 무모함이다. 여행은 내 처지의 안타까움 안에서도 늘 꿈을 꾸는 동경이다.
옛날 여행을 떠나는 제자에게 스승은 꽃 한 송이를 꺾어오라 해서 그 꽃으로 제자가 가야 할 길의 길흉화복을 알려주는 화점花占으로 배웅했다. 배웅하는 스승은 물론 아무도 없이 혼자 떠났다 하더라도 여행은 ‘의미’라는 여행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개고생이고, 자칫 온갖 잡동사니를 짊어진 채 질질 끄는 고난의 행군이며 소모이다. 여행은 내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는 내가 만든 강박과 거짓 책임에서 스스로 벗어남이다. 여행은 바다와 산, 별과 사막, 사람과 낯섦을 찾아 떠나면서도 자기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다. 여행은 별들을 보고 떠났다가 별이 길을 안내하는 지도가 아님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여행은 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멀리서 여행 떠나온 별들임을 발견하는 환희이다. 여행은 혼자이면서도 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미련未練이고 상념常念이며 그래서 서글픔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떠나면서도 자기를 벗어나는 인내, 침묵, 명상이다.
여행은 『머리(지성)에서 가슴(공감과 애정)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삶의 현장과 변화)까지 이르는 공부이다.(신영복)』 여행은 『나와 나 자신을 갈라놓은 낭떠러지를 건너는 가장 중요한 여행을 생각하고, 이것이 없다면 다른 여행들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을 아는 깨우침이다.(토마스 머톤)』 여행은 자신의 문에 이르기 위해 만나는 문마다 두드려야 하는 나그네이고, 안에 이르기 위해 밖을 다니는 행로이다. 여행은 영원의 틈새를 흘낏 본 새들이 떠나서 먼 길과 긴 시간을 나는,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끝나는 법이 없는 미완이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여행은 언제나 미완이다. 성경의 여행은 뭐니 뭐니해도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행이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향한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말은 여행 중의 짐과 같고 지각 있는 이의 말은 기쁨이 된다.”(집회 21,16)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모든 일에 능통하다.”(집회 34,11) “나는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지만 내가 배운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집회 34,12) 하는 말들처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는 참 지혜의 습득 과정이었다. 고난의 여정이었던 바오로 사도의 여행 역시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2코린 11,26) 하는 말 그대로이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미완의 여로에 서 있다.(20200504)
인생이란 하느님으로 부터 어떤 목적(사명)에 따라 잠시 이 세상에 오게 되었고,
100년도 안되는 짧은 여행시간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