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홍기령(데레사,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대학원 여성학과에서 ‘여성주의 정신분석학, 주제통합과정에서 ’21세기 행복한 사회인’을, 한국 예수회 센터에서는 꿈과 영적 치유에 대해 강의했다.)
인간에게는 평범한 꿈과 구분되는 특별한 꿈이 있다. 자신의 무의식 대신 하느님을 뵙는 꿈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찰 사건이다. 토마스아퀴나스 성인은 「신학대전」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는 꿈을 ‘환시’(vision)로 부르며 그러한 경험을 한 이들이 성인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부록, q.92 참조). 그들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며 그들의 환시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환시는 자아가 초월된 꿈
꿈의 내용물은 자아의 부산물인 개인 무의식에서 (프로이트) 시작하여 집단무의식의 지혜에 이르기까지(융) 매우 다양하다. 평소의 평범한 꿈은 꿈꾸는 이의 자아가 만들어 낸다. 정신분석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의식의 주인인 자아로 인해 무의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아가 형성한 무의식은 환시를 만드는 데는 관여할 수 없다. 아퀴나스의 가르침처럼, 환시는 각 개인의 생활사에서 비롯되는 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꿈이기 때문이다.
환시에 대한 그의 신학적 정의는 신비체험을 연구한 21세기 과학의 발견과 일치하기에 매우 흥미롭다. 뇌과학자 뉴버그와 야덴은 신비체험을 하는 종교인들의 뇌를 관찰하여 두 가지 사실을 밝혀냈다(The Varieties of Spiritual Experie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22년, 242-244쪽 참조).
첫째, 계획의 실행과 지시 등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비활성화이다. 이는 신비체험을 할 때 우리가 제 뜻대로 하려는 의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어디엔가 내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주변과 타인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구별하는 감각과 지각을 담당하는 후두정엽의 비활성화이다. 이는 꿈꾸는 이가 스스로를,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개체로 바라보는 대신 자신을 초월하는 영역과 연결된 존재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평범한 꿈속에서는 꿈꾸는 이가 자아의 관심사에 집중한다면 성인들은 환시를 경험할 때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그와 하나 되는 데 집중한 상태이다.
지성과 행복감을 증가시킨 환시
자아를 초월하는 환시의 신비체험에서 성인들은 하느님을 직접 뵙는다. 물론 그들이 뽑는 하느님은 그분의 일부에 불과하다. 피조물의 지성은 그 자체로 불충분하여 창조주 하느님 전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피조물의 지성이 그 본질적인 결핍으로 무지한데, 그 결핍 탓에 경험하는 고통은 형벌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 설령 아주 작은 일부라 해도 – 하느님을 직접 마주 뵙는 경험은 피조물의 지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할 수 없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는 “어떤 피조물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지성을 능가하지 않으므로”(「신학대전」, 부록, q.92, art.3, obj.4), 하느님의 환시에 힘입어 성인들의 지성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증가하는 지성은 이성이나 감각을 통하여 습득된 지식보다 훨씬 깊은 변화를 끌어낸다. 12세기의 성녀, 빙겐의 힐데가르트는 환시를 경험한 뒤 연장된 지성으로 시편과 복음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Scivias [‘너의 길을 알라’라는 뜻의 라틴어] 참조).
환시를 통해 무지의 형벌에서 벗어나는 성인들은 동시에 인간이 바라는 행복 중 가장 큰 행복을 성취하게 된다. 바로 신앙인 삶의 최종 목적인 천국에서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 뵙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떤 물질적 성취도 영원한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교회의 위대한 스승들 대다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절히 원하기까지 했는데, 죽음으로써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환시를 경험한 성인들은 살아있는 가운데 하느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 가장 큰 행복을 성취한 존재들이라 믿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을 부러워해도 누구나 이 행복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아퀴나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인간의 행복이 그들의 의로움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잠언 10,24 참조). 그 의로움의 자질은 성경에 따라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마음의 깨끗함이며(1코린 15,24 참조), 둘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요한 14,21 참조)이다. 지상에서 환시를 경험한 성인들은 아직 천국에 다다르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을 뵙도록 허락하는 두 가지 긍정적 자질을 이미 나누어 지닌 이들이다.
영적 열매가 있는 꿈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꿈은, 개인적이기에 모호하고 상징적이기에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나 환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보이시는 가운데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신다(민수 12,8 참조). 그리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환시는 인간의 지성을 능가하기에, 환시를 본 성인들의 책임은 주석을 달거나 해석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다. 그대로 옮기는 것 그 자체가환시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퀴나스는 환시의 경험 자체뿐만 아니라 그 도덕적, 영적 결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이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성경 말씀에 근거한다(마태 7,16 참조).
실제로 성인들의 삶은 환시 경험을 전후하여 매우 달라지는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타인을 향한 영적 책임감이 강하게 고양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환시를 경험한 성인들의 삶은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삶을 공유한다. 모세가 환시를 경험한 뒤(탈출 3-4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귀양살이에서 해방시켰듯이 성인들도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하고자 같은 노력을 기울인다.
성인들의 경험은 그리스도의 중개에 참여하여 인간을 돕는 전환점을 마련한다. 동료 인간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을 섬긴다는 확신이 이들의 가치를 재배열하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환시의 내용을 영적 지침서, 기적의 메달, 성화 등으로 남긴 이유는 환시를 통하여 받은 통찰을 우리와 나누고자 함이다.
가타리나 라부레 성녀와 파우스티나 성녀가 자신들의 환시를 나누어주었기에 우리는 기적의 메달을 몸에 지니거나 자비의 예수님의 심상을 떠올리며 주님의 가호 아래 있는 법을 배웠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자신들의 환시를 나누었기에 우리는 영혼이 성장시키고 식별해야 하는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향잡지, 2023년 8월호, 통권 1865호, 96-99쪽)
*꿈을 많이 꾼 성인으로 유명한 돈 보스코의 환시를 통해서 인류는 비로소 이 세상의 젊은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