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의 막바지인 대림 제4주일에는 항상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라고 노래하였던 나자렛의 한 여인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하느님의 일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된다. 천사가 마리아라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에 구세주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고 잉태되신다는 사실을 알렸던 그 장면은 수도 없이 많은 예술 작품으로 묘사된다. 이는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느님 말씀의 성취이다.
1. “여섯째 달에…가브리엘…나자렛…마리아”
복음은 “여섯째 달에”(루카 1,26)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천사가 즈카르야 사제에게 아들(훗날 세례자 요한)을 가지게 된다는 소식을 전한지 여섯째 달이다.(참조. 루카 1,5-25)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아들 요한을 예고했던 천사 가브리엘을 “하느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신다.(루카 1,26) 천사 가브리엘은 먼저 즈카르야에게 보내질 때 사제인 즈카르야가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 곧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분향 제단 오른쪽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말했던 그 “갈릴래아 나자렛”이라는 고장, 훗날 거룩한 땅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맨 끝 변방, 이방인들이 사는 아주 작은 도시로 찾아간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파견된 천사는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기원전 6세기의 다니엘 예언자에게 “환시와 예언이 확증되며 가장 거룩한 곳에 기름이 부어지리라.” 하며 70주간이 흘러 마침내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가 올 것을 예고한 천사이다.(참조. 다니 9,20-27) 이 예언을 기억하듯이 루카 복음사가는 일흔 주간이 완료되었고, 기다림이 끝났으며, 때가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듯이 “여섯째 달에…”라고 예수님 탄생 예고의 기록을 시작한다. 천사 가브리엘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간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7) 메시아가 오시기로 약속된 “다윗 집안”이다.
2. “은총이 가득한 이…주님께서 너와 함께…하느님의 총애”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인사한다. 이 인사말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백성, 곧 “시온의 딸”을 종말론적인 기쁨으로 초대하는 말로서 ‘기뻐하여라. 내가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알려준다.’ 하는 말이다. 천사는 마리아를 희랍말로 ‘케카리토메네κεχαριτωμένη(kecharitoméne, 영어로는 Full of Grace)’, 곧 “은총이 가득한 이”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몸소 지어주신 마리아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케카리토메네’라는 말에는 ‘카리스χάρις(cháris, 영어로는 grace, 은총)’라는 말이 들어 있는데, 이는 마리아가 온전히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으로 자비의 은총을 입었다는 뜻이 강하게 들어 있다. 그래서 천사는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는 인사말을 덧붙인다. “시온의 딸”, 구약의 하느님 백성, 오직 주님만을 바라고 의지하며 살던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아나윔, anawim, 히브리말 אנאיים)’들에게 하는 인사말을 되풀이하고 되살리는 말이다. 천사의 말에서는 특별히 구약의 두 예언을 떠올리게 된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스라엘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 3,14-17)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즈카2,14)
천사의 인사를 받은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천사를 만나게 된 것에도 놀랐고, 인사말의 뜻에 대해서도 놀랐다. 마리아는 묵상하고 되짚어 생각하며 “뜻”을 찾으려 “곰곰이” 생각한다. 하느님의 뜻을 듣게 된 이들은 놀라고 당황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감히 이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하며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고 그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앞서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던”(루카 1,12) 즈카르야처럼 마리아도 주님의 오심을 맞으면서 놀라고 이 만남이 어찌 이어질 지를 모른다.
이에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라는 말로 마리아를 안심시키며 말을 이어간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몇 번을 두고 읽고 또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로 당신께서 부르신 이들에게 몇 번이고 평화를 빌어주시며 힘과 용기를 내라고 하신다. 천사는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1-33) 한다.
바로 이 “아들”은 일찍이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 왕에게 약속하신(2사무 7,8-16) 바로 그 아들이다. 이렇게 마침내 “때가 차서” 다윗의 자손이자 마리아의 아들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 탄생하심으로 옛 예언이 완성되고 실현된다. 우리가 오늘까지도 매주 신경으로 반복하는 것처럼 과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도 세기에 세기를 더해 에세네의 꿈란 공동체와도 같은 곳에서는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모른다. 천사는 간결하면서도 장엄하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갈릴래아의 작은 고을에 살던 마리아라는 소녀에게 이 위대한 선포를 하고 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아기에게 주는 것은 훗날 아버지로 알려지는 요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직접 건네주셨으므로 마리아에게 달려 있다. 이 이름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으로서 그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신원이고 하느님만이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바로 그분을 가리킨다.
마리아에게는 이마저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믿음의 여인이지만 묻고 물어 되새기는 믿음을 지녔던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의심하고 표징을 요구하면서 실제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벙어리”가 되어 훗날 하느님을 증거해야 했던 즈카르야처럼(참조. 루카 1,8-20) 행동하지는 않는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그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고 묻는다. 복음사가 루카가 마리아가 그렇게 물었던 심리 구조를 묘사하려 했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루카는 마리아를 통한 아기의 잉태라는 사실을 통해 아기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밝히려고 할 뿐이다. 마리아는 처녀이고 아기를 출산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구약에서 우리는 하느님 은총의 개입으로 아기를 출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수많은 아기를 출산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목격하지 않는가! 사라가 그렇고 한나가 그러하며 신약의 엘리사벳에 이르기까지…. 인간적인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권능은 많은 불임의 자궁을 열어 열매 맺게 하신다. 불임의 부부에게도 하느님의 뜻에 의한 은총으로 빛을 얻고 자녀를 얻게 하신다.
마리아의 경우는 수많은 구약의 사례들보다도 더 명백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젊은 처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를 두고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과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라고 묘사한다 – 그러니까 마리아는 결국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표징이나 어떤 보증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가 믿음의 길, 순명의 길에서 만나게 된 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묻는다. 이런 식으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길을 찾는다. 마리아는 진정 “듣는 마음”(1열왕 3,9)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를 지키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루카 2,19.51) 천사의 알림을 해석하고 생각하며 묵상한다. 마리아는 자기가 듣고 이해한 바에 관해 믿음으로 묻는다.
그러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고 계시한다. 성령께서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을 이루신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창조의 주인공이시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창세 1,2)에서처럼 그렇게 꼴이 없고 비어 있는 곳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마리아의 비어 있는 태胎에 내려오시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성령”, 하느님의 영이요 힘, 그분의 쉐키나šekīnah(‘거주, 임재’라는 뜻, 히브리어 שכינה, 영어 ‘dwelling/settling’), 시나이 산 위로 내려오시고 구름으로 덮으신 분(참조. 탈출 19,11-20;24,16), 거룩한 곳의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임하신 분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시어 당신 거처를 삼으신다. 성령께서 마리아의 태에 내려오신다. 그렇게 하여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 하느님의 아드님, 거룩하신 분이 임하신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당신만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아드님이 되어오심은 어쩌면 이렇게밖에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땅이 되시고, 영원이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죽을 운명이 되시고, 전능이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약함이 되시고, 세 번 거룩하신 분이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임마누엘, 곧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참조. 이사 7,14 마태 1,23)가 되셨으니, 하느님께서 이렇게 사람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위대한 육화의 신비이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도록 하느님께 자리를 내드렸고, 그렇게 하여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으나…하느님이신 그분께서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 *참고로 이 구절에서 “알려 주셨다”로 번역되는 말은 희랍어로 ejxhghvsato(엑세게사토, exeghésato)라 한다. 이는 ‘설명하다, 이야기하다, 묘사하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알도록 인도하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to explain’ ‘to expound the exegesis’ ‘to narrate’ ‘pointing towards’ ‘leading (someone) to’ 등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이렇게 하느님을 알려주신다. 하느님을 보지 못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예수님을 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중요한 말이다.
3.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복음의 마지막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37 참조. 창세 18,14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단 말이냐”) 하면서 하나의 표징을 선물한다. 천사의 이 마지막 계시에 마리아는 아주 단순하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대답한다. 우리말에서 “보십시오”라고 번역되는 말은 아무것도 토 달지 않는 조건 없는 ‘예!’이다. 천사의 장엄한 선포와 표징까지 곁들인 상세한 계시 앞에서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는 침묵 속에서 “예!”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이라 한다. 마리아는 계속 믿음의 여인이고 들음의 여인이며 순명의 여인임을 드러낸다. 마리아는 제자가 되려고 어머니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자였으므로 한 어머니, 메시아의 어머니가 된다.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기 전부터 이미 제자였고 “주님의 종”이었던 마리아는 평생 전적으로 메시아를 섬긴다. 마리아는 “예!”, “아멘!”, “피앗fiat!”(라틴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 마리아에게는 성경 전체가 요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고 받아들이는 완전한 순응과 포기가 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최우선에 모시고 성령에 따라 행동하려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완전한 모델이다. 성령의 은총이 마리아에게 내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과 마리아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을 때 그 위로 성령께서 내리셔서 교회가 태어났다는 것(참조. 사도 1,8;2,1-4)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에서 증언하듯이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함께 지내셨던 세대 자체가 영적인 사건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군중 가운데에서 말씀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그리고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 한다. 사실 마리아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없을 것이고, 마리아만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 영적인 사건이다. 하느님의 현존, 그분의 능력과 성령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믿음의 은총 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요구되는 부르심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신앙과 순응으로 받아들여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데,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하신 것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라도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하는 믿음의 부르심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신다. 바오로 사도께서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콜로 1,27) 하신 그대로이다.
마리아의 신비,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신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을 관상하며 마리아의 부르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의 부르심을 본다. 그리고 신자 된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총을 믿고 그에 의탁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음을 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