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 보스코의 꿈: (‘꿈’을 이야기하는 이유와 배경) 돈 보스코는 1883년 성 프란체스코의 날에 쓴 회람 서한을 통해 ‘살레시오 집에서 체벌을 가하는 것에 관하여’라는 편지글을 썼다. 그 편지글 끝에 돈 보스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교육은 마음의 일이며 하느님만이 그 마음의 주인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 마음에 다가가는) 기술을 가르쳐주시지 않고, 우리 손에 그 열쇠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무엇도 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겸손하게 온 힘을 다하여 굳세고도 완고하게 닫혀 있는 이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애들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노력하고,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의무감이 (애들에게) 스며들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수많은 아이의 마음 문이 놀랍도록 쉽게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모든 면, 특별히 청소년 교육에서 우리의 본보기, 우리의 길, 우리의 모범이 되고자 하셨던 분께 찬미와 축복을 노래하는 데에 (아이들이 우리와) 하나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안에서 항상 저를 믿으십시오.”
“교육은 마음의 일(l’educazione ѐ cosa di cuore)”이라는 살레시오회의 교육에 관한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정의定義와 살레시오 회원들이 종신서원을 하면서 수도회로부터 수여 받는 십자가에 새겨진 “젊은이들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힘쓰십시오(Studia di farti amare).”라는 명문장이 탄생한 대목이다. 인간의 마음자리는 하느님의 자리이고, 그 자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교육은 그 마음에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이루어져야 한다는 돈 보스코의 통찰과 믿음,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간직하고 살아야 할 원리이다.
믿음이나 확신이 없어도 관계를 맺어가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별 지장이 없지만, 마음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살았어도 산 것이 아니다.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이성이나 논리로 길들지 않는다. 마음은 보려고 하는 이에게만 보이고 들으려고 하는 이에게만 들리며 아무리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이에게는 무심히 흘러가고 만다. 누군가가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상황은 비극이고 너무 어렵다. 낙담과 실의에 차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의 설명과 동행을 체험한 뒤 제자들이 “우리 마음이 불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하였던 것처럼 살레시안들이 돈 보스코의 꿈들을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기도한다.
2024년은 살레시오회와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매우 특별한 해이다. 돈 보스코가 아홉 살(1824년)에 꾸었다고 직접 증언하여 기록한 아홉 살 꿈의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살레시오회는 이 아홉 살 꿈으로부터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회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음을 마음으로부터 믿는다. 그런 의미로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라는 성경의 첫 구절처럼 “한 처음에 돈 보스코에게 아홉 살 꿈이 있었다.”라고 살레시오회 안에서 읽힌다. 그래서 총장 앙헬 페르난데즈는 살레시오 가족의 2024년 생활지표를 “당신을 꿈꾸게 하는 꿈–늑대를 양으로 바꾸는 마음(The dream that makes you dream-A heart that transforms ‘wolves’ into ‘lambs’)”이라고 설정했다.
돈 보스코는 아홉 살의 꿈만이 아니라 다른 꿈도 매우 많이 꾼 성인이다. 돈 보스코의 생애에서 꿈을 빼고 그 생애를 읽는다는 것은 복음에서 비유를 빼고 복음을 읽는 것과 같다. 돈 보스코의 전기를 처음 기록하기 시작한 레뮈엔 신부는 “돈 보스코라는 이름과 ‘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돈 보스코에게서 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의 옛 제자들 수천 명이 들고 일어나 ‘아니, 꿈은 어떻게 하고요?’라고 물을 것이다. 돈 보스코의 생애에서 놀라운 이 현상은 거의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MB 1권, 254쪽)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어로 ‘돈 보스코의 꿈들’이라는 말을 옮기면 ‘i Sogni di Don Bosco(소니 디 돈 보스코)’가 된다. 이 말의 머리글자들을 따면 ‘sdb’가 된다. 살레시오 회원들을 지칭하는 ‘Salesiani di Don Bosco(살레시아니 디 돈 보스코)’를 줄여서도 약칭으로 ‘sdb’라고 하는데, 이렇게 Salesiani를 Sogni로 대치해도 같은 ‘sdb’이다. sdb, 곧 살레시안들은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 회원들이자 돈 보스코의 꿈들이다. 돈 보스코의 꿈들과 관련된 책들은 아주 많다. 대개는 부분적으로 꿈들을 선별·편집·수록하고 간단한 해설을 곁들이는 식이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의 꿈만을 집대성한 책은 없다. 왜 그럴까? 돈 보스코는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꿈을 꾸었을까? 돈 보스코께서 세상을 뜨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연구자들도 많은데 돈 보스코의 모든 꿈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책은 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 살레시안으로서 나는 과연 돈 보스코의 꿈인가? 돈 보스코의 꿈이고자 하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돈 보스코의 꿈을 알기 위해서는 1898년부터 1939년까지 저자가 바뀌어 가면서 이탈리아어로 완성·출판된 대규모 돈 보스코의 전기 <Memorie Biografiche(이하 MB)>, 이탈리아 말본이 영어로 옮겨가는 데에만도 다시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색인을 포함해 20권으로 완성된 책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원原 자료에 해당하는 책이면서 돈 보스코의 직접 서술이라고 할 수 있는 <Memorie dell’Oatorio di S. Francesco di Sales dal 1815 al 1835(이하 MO)>를 먼저 살펴야 한다. MO는 우리말로 <돈 보스코의 회상(이하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1997년 말에 김을순 수녀가 E. 체리아 신부님께서 엮으신 책을 따라 번역하였다.
MB에서는 대략 153에서 159편 정도로 돈 보스코의 꿈을 정리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MB에서 꿈을 분류·편집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난해한 작업이다. 돈 보스코 자신이 기록했거나 말한 뒤 즉시 기록하라고 하여 기록된 꿈은 10개 정도에 불과하다. 돈 보스코의 꿈이라고 알려지는 내용 중 90% 이상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텍스트가 없다. 세심한 검증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의 증언이나 전해준 이야기로 기록된 MB의 작성 과정을 고려해야 하고, 돈 보스코께서 꿈을 이야기하면서 덧붙인 이야기인지, 예화인지, 실제 꿈인지, 또 비유나 은유인지, 환시인지, 예언인지 등을 식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MB에 수록된 돈 보스코의 꿈들은 돈 보스코의 기록, 초기 살레시오 회원들의 일지, 다양한 동시대 인물들의 메모, 회고 및 증언, 그리고 돈 보스코와 레뮈엔 신부 사이의 많은 대화로 구성된다. 돈 보스코는 두 개의 꿈을 몸소 상세히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회상’에서 다른 몇 가지 꿈을 암시하기도 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열 개 정도의 꿈을 서술하거나 비서에게 필사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것은 분명히 대다수 꿈이 구두로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돈 보스코는 종종 그 꿈을 오라토리오에 함께 살던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으며, 때로는 일부 살레시오 회원들에게만 이야기하기도 했다. 돈 보스코가 꿈을 전하는 순간, 이를 듣는 많은 이들은 깊이 빠져들었다. 그들은 탁월한 이야기꾼인 돈 보스코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이 꿈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이나 미래에 대한 진실을 밝혀주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녹음기는 없었고, 초기 살레시오 회원들과 다른 증인 중 몇 명은 돈 보스코가 말한 것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기도 했었다. 어찌 되었든 돈 보스코의 입에서 꿈들이 나왔다는 사실, 곧 그의 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돈 보스코가 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던가, 또 기억한 이들이 세부 사항을 얼마나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었던가 하는 문제들을 식별하는 것은 참 어렵다.
‘회상’에는 돈 보스코의 직접 서술로 소개되는 꿈들과 각주에서 소개되는 꿈들, 그리고 내용이 돈 보스코의 기록으로 전해지지는 않으면서도 간접 증언으로 전해지는 꿈이 몇 편 있다. ‘회상’의 편집자인 체리아 신부는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 이후, 소위 소명에 관한 비슷한 꿈을 돈 보스코께서 여섯 번 더 꾸었다고 정리한다.(205쪽, 각주 68)
돈 보스코의 꿈을 보는 시각에서 전통적인 견해는 초자연적인 기원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돈 보스코의 꿈이 감각적인 환시, 상상의 환시, 지성의 환시들로 보게 된 “초자연적인 언어들”이었으며 “신비한 환시”요 “사적인 계시”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꼭 이렇게만 보기에는 앞서 말한 대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정 돈 보스코에게 주어진 계시인가를 식별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돈 보스코의 꿈에는 「수면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환시라고 불러야 할 꿈이 아닌 꿈도 있고, 별 중요성이 부여되지 않는 꿈도 있으며, 비유나 우화처럼 묘사되거나 비밀스러운 요소를 담는 꿈들도 있다.」(에우제니오 체리아 신부, 1870~1957년) 또한 돈 보스코의 꿈에서는 「우화처럼 서술되면서도 예언적인 요소들도 많이 담아 현실로 입증되기도 한다. 돈 보스코의 꿈에서는 문화, 종교, 감성이 지금과는 아주 다른 역사적인 환경에서 돈 보스코의 지향과 돈 보스코와 함께 살던 아이들, 그에게 열광하던 이들과 함께 살레시오 가족 안에 영적 유산이 되어간 내용, 또 꿈이 지닌 윤리적이고 교육적인 내용을 두루 고려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꿈들이 없이는 돈 보스코와 살레시안들이 지닌 독창성과 그 종교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피에트로 스텔라 신부, 1930~2007년) 또한 돈 보스코의 꿈에서는 「성인이 살았던 일반적인 문화적 배경,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고방식 등을 고려해야 한다. 돈 보스코는 교회와 사회의 권위 앞에서 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두고 자기가 원하는 ‘목표 달성을 위해 자기의 꿈들을 어느 정도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조작하거나 비틀려고 하는 일반적인 성향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돈 보스코는 조력자들이나 함께 사는 청소년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똑같은 꿈을 가지고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피에트로 브라이도 신부, 1919~2014년)
어찌 되었든, 돈 보스코를 조금이라도 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돈 보스코의 꿈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며 묵상이나 숙고, 연구와 해석의 대상을 넘어서 만나야 할 팩트요 사실이자 영적인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돈 보스코의 꿈을 만나는 이들은 그 꿈들을 이성적인 사고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것이라기보다 꿈들과의 만남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 돈 보스코의 꿈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무엇인가? 돈 보스코의 꿈은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특별한 성인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섭리요 계시일 뿐인가, 아이들 교육을 위해 영리한 돈 보스코가 꾸며내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강박처럼 너무도 밀접하게 살면서 애들만 생각하던 돈 보스코가 어쩔 수 없이 비몽사몽 간에 겪었던 체험이거나 혹은 돈 보스코의 심리적인 투사라고 보는가? 돈 보스코의 꿈을 나는 어디까지 믿으며 돈 보스코의 꿈이 나의 살레시안적인 삶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는가?
* 나는 돈 보스코처럼 청소년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목적인 꿈을 꾸어본 적이 있는가?
* 특별한 관심과 집중력으로 돈 보스코의 꿈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읽어보고 싶은가?
* 어떤 이유로든 살레시안으로서 나의 꿈을 내가 죽인 것은 아닌가?
「…꿈을 죽일 때 나타나는 첫 번째 징후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 (그러나) 가장 바빠 보였던 사람조차 무엇이든 할 시간은 충분한 것; 꿈들이 죽어가는 두 번째 징후는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확신. 삶이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모험이라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스스로 현명하고 올바르고 정확하다고 여기는 것. 아주 작은 것만 기대하는 삶 속에 안주하면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징후는 평화. 삶이 안온한 일요일 한낮이 되는 것. 그러다가 우리는 자신에게 대단한 무엇을 요구하지도,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구하지도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성숙해졌다고 여긴다. 자신의 꿈을 위해 싸우기를 포기한 것이다.
… 꿈을 포기하고 평화를 찾게 되면 얼마간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죽은 꿈들이 우리 안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잔인해지고, 마침내는 그 잔인성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게 된다. 그리고 고통과 강박관념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싸움에서 만날까 봐 두려워 피했던 실망과 패배가 우리 비겁함의 결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죽어서 썩어버린 꿈들 때문에 더는 숨 쉴 수도 없게 된 우리는 죽음을 바라게 된다. 우리의 확신, 우리의 일, 그리고 일요일 한낮의 끔찍한 평화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해 줄 죽음을……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O Diario di un Mago, 문학동네, 2006년, 79-80쪽)」
2.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 꿈 하나: (꿈 중의 꿈, 아홉 살 꿈) 돈 보스코께서 1858년(43세)에 처음 로마를 방문하던 차에 돈 보스코의 인생에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간파하신 교황 비오 9세께서는 돈 보스코에게 “꿈과 그 외의 모든 것을 그대로 자세히 기술하고, 그 기록을 아들들의 격려와 규범으로 그리고 수도회의 유산으로 보존하라고 당부했다.”(MB, 5권 882;회상, 33쪽) 돈 보스코는 그로부터 15년쯤이 지난 1873년(58세)부터 1875년 사이에 자신의 ‘회고록’을 쓰는데(회상, 24쪽), 첫 장에서 간략하게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듯이(참조. 2024년 생활지표 해설) 어려웠던 가족 이야기를 먼저 서술한 다음 “평생토록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아홉 살(1824년) 때의 꿈’ 하나를 기록하면서 ‘오라토리오 회고록’을 시작한다. 돈 보스코가 회고록을 기록한 시점은 1841년 6월 5일 서품 후 온갖 풍상을 겪어가며 오라토리오를 일궈온 이래 이미 32년이 지난 때이며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던 노숙한 나이로, 이미 1859년의 수도회 설립을 넘어 1868년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봉헌, 교황청으로부터 1874년 살레시오회 회헌의 최종적인 인가와 1875년 남미 아르헨티나로 첫 번째 선교사들의 파견을 앞둔 시점이다.
* 나에게는 돈 보스코처럼 어려움 속에서 지켜온 꿈, 지켜갈 꿈이 있는가?
『인생을 활짝 열어주는 꿈: 그 나이에 나는 평생토록 내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꿈 하나를 꾸었다. 꿈에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아주 넓은 마당에 서 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웃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놀고 있었는데,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욕설을 듣고 나는 곧장 아이들 가운데로 뛰어들면서 주먹질과 고함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애썼다.
그때, 고상한 옷차림을 한 존귀한 남자 어른 한 분이 나타났다. 그는 하얀 겉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으며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그 소년들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면서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 이들을 네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곧바로 설명해 주어라.”라고 말했다. 당황하고 놀란 나는 그분께 내가 그 녀석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말할 능력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가난하고 무지한 아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소년들은 말다툼과 고함과 불경한 말을 그치고 나와 말하고 있는 분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분에게 물었다.
“제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렇지, 그처럼 네게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기 때문에 너는 순명과 지혜의 연마로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디서 어떤 식으로 지혜를 연마하라는 말씀이시죠?” “내가 네게 여선생님을 주겠다. 그분의 지도 아래 너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분 없이는 지혜라는 모든 것이 어리석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게 말씀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분의 아들이란다.” “제 어머니께서는 허락 없이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니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내 이름은 나의 어머니께 여쭤보아라.”
그 순간 나는 그분 곁에 별처럼 찬란히 빛나는 눈부신 겉옷을 입은 존엄한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질문과 대답으로 더욱더 혼란에 빠져드는 나를 보더니 당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자, 보아라.” 눈을 들어 바라보니 소년들은 모두 달아나고 그 대신 염소, 개, 고양이, 곰 등 다른 많은 동물이 나타났다. “자, 여기가 바로 네 일터, 네가 일해야 할 곳이다. 겸손하고 강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라.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있는 이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는 장차 내 자녀들을 위해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눈길을 돌리니 맹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숫자 만큼의 온순한 양들이 나타났다. 양들은 그 남성과 여인을 반가워하듯 그분들 주위를 맴돌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꿈속에서 말씀하시고 알려주시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 울음을 터뜨리며 여인에게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부인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있고 나서 나는 어떤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멍했다. 내가 주먹질을 해댄 손은 아팠고 얻어맞은 뺨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게다가 낯선 분과 여인에게서 듣고 말한 모든 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그날 밤에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적 두목?: 아침에 즉시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형들은 웃어 넘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자 식구들은 제각각 해몽을 해줬다. 요셉 형은, “너는 염소나 양이나 다른 동물들을 치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말했고, “사제가 될 꿈인지 누가 알겠니!”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자마자 안토니오 형이 심술궂게 대꾸했다. “너는 도둑 우두머리가 될 거야.” 마지막으로 전혀 읽고 쓸 줄도 모르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할머니가 “꿈같은 것에 신경 쓸 일 없어요.” 하고 최종적인 단언을 내렸다. 나도 할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꿈을 결코 내 머리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 기록하게 될 일들이 그 사실을 설명해 줄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더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1858년, 살레시오회에 관한 문제로 교황님을 접견하려고 로마에 갔었을 때, 교황님은 내게 초자연적인 기미가 보이는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보라고 하셨고, 나는 그분에게 처음으로 어릴 적 그 꿈 이야기를 해드렸다. 교황님은 그 사실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여 살레시오 회원들을 격려하는 자료로 남겨 두라고 명령하셨다.(회상, 42-47쪽)』
늘 들었고 자주 읽고 보았던 아홉 살의 꿈 이야기로부터 돈 보스코의 꿈들은 어떨 때 돈 보스코가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지어낸 이야기처럼, 혹은 후대 사람들이 조작해 낸 신화화의 방편이나 조각처럼 들릴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돈 보스코와 살았던 이들이나 살레시오회의 역사가 하나같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는 바에 따를 때 돈 보스코의 다른 많은 행적과 함께 꿈 역시 실제요 현실이며 말 그대로 fact이고 real이다. 잔니 상갈리는 “꿈이 없는 돈 보스코의 생애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복음에서 비유 없이 예수님을 이야기한다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특별히 아홉 살 꿈의 200주년이 되는 해에 다시 읽는 돈 보스코의 꿈은 살레시안이 지닌 영감의 원천이며, 퍼내도 퍼내도 절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무엇보다도 살레시오회만이 지닌 카리스마와 부르심의 의미, 스타일, 삶의 여정이 지닌 아름다움과 독특함의 보고寶庫이자 기준이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때 꿈은 돈 보스코의 삶과 사고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생과 세상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방식”(P. Stella)과 기준이 된다. 한 마디로 이는 청소년들과 함께 살아간 삶이라는 돈 보스코의 사명에 십자가의 오상五傷과도 같은 성흔聖痕이요 상흔傷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이 꿈은 돈 보스코의 일생을 관통하다가 1887년 5월 16일 아침 로마의 예수 성심 대성당의 도움이신 마리아 제단에서 드린 미사 때에야 그 전체적인 의미가 완성된 비밀 가득한 꿈이었으며 돈 보스코를 통하여 이루어져 간 하느님의 꿈이었다.
* 나에게도 영적인 의미에서 나의 일생 안에 돈 보스코에게서처럼 지울 수 없는 거룩한 흔적이 있는가?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꾸고자 하시는 꿈은 무엇인가?
* “꿈” http://benjikim.com/?p=5200
3. 집 근처 아주 넓은 마당: (꿈을 통해서 본 사목적 접근) 어린 소년 요한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서 살레시오회의 카리스마가 지닌 존재론적인 역동성을 되새기기 위하여 잠시 꿈속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공간’,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 내용’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소년 요한 보스코의 아홉 살 꿈속 배경은 살레시오회의 오라토리오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나 해당이 될 ‘집 근처 마당’이다. 돈 보스코에게는 초막 셋을 짓고 싶었던 베드로의 타볼도 아니고, 요한 복음사가가 첫 장면으로 삼았던 성전도 아닌 곳에서 꿈이 시작한다. 집이 있는 곳,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아는 곳, 익숙한 곳, 외로운 바닷가도 아니고 조용한 산책로도 아닌 아이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곳이다. 한 아이가 있는 고독한 곳이 아니고 다수가 어우러지는 곳, 천사들 같은 애들만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 거침없이 욕설도 내뱉는 쌍스러움도 있는 곳이다.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은 현실이고 실제이다.
*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 만난 마당은 1884년 또 다른 꿈(로마에서 보낸 편지)에서 건물로 둘러싸인 운동장으로 다시 등장한다.
하느님께 욕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어린 요한 보스코는 본능적으로 완력으로 개입하여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를 거듭 묻는 요한 보스코에게 위엄이 서린 남성과 기품있는 여인이 등장하고, 요한 보스코는 거스를 수 없는 두 분을 어렴풋이나마 알아가는 중에 아이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다. 힘이 아닌 “온유와 사랑”으로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알려줘야 한다는 내용에 대해서 여느 예언자들이 늘 그러듯이 요한 보스코는 본인이 ‘가난하고 무지한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대답하고, 이에 대해 고귀하신 분은 다시 한번 ‘순명과 지혜의 연마’로 불가능이 가능이 될 것이라며 그에 대한 도움으로 여선생님을 약속한다.
단순한 듯 보이는 꿈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돈 보스코가 평생 있어야 할 자리, 살아야 할 삶의 내용, 실행 방법론과 의지해야 할 지도자까지 돈 보스코가 살아갈 새로운 소명과 성령께서 교회 안에 새로이 불러일으키시는 살레시오회의 카리스마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겼다.
“한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성령의 원原 빛(la luce originaria)을 비추시며 주님께서는 몸소 당신의 어머니, 성령 강림의 동정녀, 교회의 원죄 없으신 모델이신 성모님을 선생님으로 주신다. ‘은총이 가득하신’ 그 어머니만이 모든 언어를 아시고 당신의 말로 풀어주실 것이며, 실로 모든 카리스마를 아시는 분이시다.”(A. Bozzolo) 돈 보스코의 삶에서 꿈이 없다면 이는 비유가 없는 복음과 같고, 돈 보스코의 꿈에서 성모님이 없다면 배경이 없는 풍경화가 되고 만다.
살레시오회의 꿈, 돈 보스코의 꿈은 마당에서 일어난다. 모세와 산상설교, 타볼, 겟세마니, 칼바리, 부활하신 주님의 산에 이르기까지 산이 언제나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였다면, 돈 보스코의 자리는 마당이다. 살레시안과 청소년이 만나는 자리이다. 별도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이고 집 주변의 공간이다. 항상 주도권을 쥐신 분은 주님이시다. 꿈속의 주님께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가운데 성聖과 속俗, 거룩함과 상스러움이 함께 있는 공간에 먼저 다가오시고, 요한 보스코에게도 먼저 다가오시어 먼저 말을 건네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당황하고 의기소침하였으며 낙담과 실의에 빠졌고 두려움에 문을 닫아 잠근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신다.(참조. 요한 20장) 꿈은 시종일관 아이들, 보스코, 예수님, 성모님이 모두 ‘함께’ 있는 곳에서 진행된다. 성령 강림도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졌다.(참조. 사도 1,13-14;2,1-2) 우리가 ‘함께’하는 자리에 ‘항상’ 함께 하시는 하느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마태 28,20) 임마누엘이시다. 형제들과 함께 아이들 곁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은총이 함께 한다. 그 자리는 “온유와 사랑”으로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이 식별되는 자리이다. 어린 요한 보스코가 어렴풋이 체험한 ‘성聖과 속俗’의 공존은 훗날 <준비된 청소년>에서 “악마의 속임수 중 하나는 젊은이들이 즐겁고 기쁘게 지내려는 욕구나 넘쳐나는 생명력과 에너지가 거룩함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돈 보스코의 영적인 중요 가르침으로 완성된다. 거룩함은 기쁨, 즐거움, 생명력, 활기, 에너지라는 본질도 지녔다.
* 내가 즐겨 ‘함께 하는’ 자리는 어디인가? 아이들이나 형제들이 함께하는 자리인가?
* 나는 기쁨, 즐거움, 생명력, 활기, 에너지의 거룩함을 추구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살레시오회가 추구하는 교육의 지향점이 단순한 인간 개발이요 인도주의적인 복지 활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영혼 구원이요 ‘죄의 더러움과 덕의 고귀함’을 식별하여 예수님께 이르고자 하는 ‘종교’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거친 짐승들이 온순한 양들로 변화되는 변화의 가능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살레시오회의 이상이 아니다. 요한 보스코는 이처럼 마당의 어린 만남에서 미래의 살레시오 오라토리오가 지녀야 할 교육적이며 영적인 마당의 본질을 미리 보고 체험한다.
마당은 함께 모이는 곳이고 축제의 자리이다.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이 표출되는 자리이다. 어렵고, 버려진,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은 함께 있는 물리적이고 영적인 자리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외로움은 슬픔을 낳지만, 공감과 공유로 이루어진 인생은 행복하고 즐거운 삶의 조건이 된다. 살레시오회가 추구하고자 하는 ‘축제의 교육’이다. 온순한 양들로 바뀐 아이들이 예수님과 성모님 주변을 뛰며 맴도는 축제는 거룩한 전례의 예시豫示이다. 육체와 영혼, 정신의 원만한 균형과 평온이 이루어지는 성장이고 성숙이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에서 발원된 살레시오회는 토리노 외곽의 공터들을 넘고 발도코의 첫 경험을 넘어 살레시오회 오라토리오의 영원한 기준이 된다. 『돈 보스코는 첫 번째 오라토리오에서 전형적인 사목 체험을 하였다. 그 오라토리오는 청소년들을 맞아들이는 집이었고, 복음을 전파하는 본당이었으며, 삶을 준비하는 학교였고, 친구로서 만나고 기쁘게 생활하기 위한 운동장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있어 발도코의 체험은 모든 활동과 사업에 대한 식별과 쇄신의 영원한 기준이 된다.(회헌 40조)』
* 나의 마당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청소년들과 함께 있는 마당에 있는가? 나의 마당은 열린 곳인가, 아니면 내가 나만의 울타리를 쳐 놓은 폐쇄 공간인가?
천사 가브리엘의 알림처럼 요한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이라는 예지몽으로 시작되었고, 발토로메오 가렐리와의 첫 만남, 피나르디 헛간의 첫 공동체로 이어져 정착하게 된 돈 보스코의 발도코 오라토리오는 실로 돈 보스코의 사목적 카리스마의 모체요 종합이며 요약으로서 초창기 살레시오 회원들, 협력자들, 조력자들의 성령 강림 체험이었다. 돈 보스코의 아홉 살 꿈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의 되새김이나 독서뿐이 아니라, 젊은이들과 함께 만나 기쁘게 살면서 주님을 섬기는 원천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살레시오회의 교육적이고 사목적인 행동 방식에 관한 성찰이고 쇄신의 행동 결정이다.
“집이 없는 이에게 ‘집’이 되어주고, 본당이 없는 이에게 ‘본당’이 되어주며,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이에게는 ‘학교’가 되어주고, 친구들을 만나고 기쁘게 뛰놀 수 있는 ‘운동장’이 되어주려는 목표들”(회헌해설집, 제1권, 164쪽)을 지닌 살레시오회의 오라토리오는 “물질적 구제, 가족적 도움, 복음화, 문화적·사회적 활동에 관한 완벽한 프로그램이고, … ‘친구’로서의 친밀감과 소년들 사이에 ‘현존’하는 교육 담당가로서의 형제애 : 이러한 만남을 용이하게 만드는 분위기 조성 : 여가의 여러 가지 활동 : 오고 싶어 하는 아이들 누구에게나 ‘개방적’인 선교사적 자세 : 모든 이들을 다 환영하면서도 각 개인과 단체에 알맞은 관심을 기울여 주는 일 : 축제 행사를 통한 청소년 공동체의 점진적 교육 : 단체 생활 및 일치를 견고히 하고자 하는 노력, 이러한 요소들은 전인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동시에 얽혀 일어나는 요소들”(회헌해설집, 제1권, 162쪽)을 담는다.
살레시오회의 오라토리오는 한 마디로 ‘마당’의 체험 자리이다. 여성적인 어휘라면 감히 ‘우물’이며, 현대 용어로는 ‘플랫폼’이고, 이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이미지 중 하나는 ‘도서관’으로서 여기에 기쁨과 왁자지껄함을 추가하면 살레시오회의 마당이라는 선물이 된다. ‘마당’은 형식과 구조, 담장을 넘어 온갖 사람들과 세상사가 오가는 길과 연결되는 자리이면서 공식을 넘는 비공식을 개의치 않는다. 마당에는 저마다의 고유성을 띤 기쁨이 민주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고, 더구나 청소년이 있는 곳이라면, 현실과 가상까지도 거침없이 나아간다. 마당은 세상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의 마당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 마당에 주님께서는 어느새 우리 곁에 계신다.
돈 보스코께서 직접 기록한 9살 꿈을 두고 피에트로 브라이도 신부는 “거의 50년 삶의 축적과 경험을 더해 원래의 꿈을 문학적으로 완성하여 기록한 꿈”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엠마오 길을 동행하신 주님께서 길을 더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이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하였던 것처럼 돈 보스코께서 우리와 함께 묵으시기 위하여 우리 집에 들어오시기를 청한다. 그래서 우리 눈이 떠져 그분을 알아보고, 기쁨에 차 우리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한다. 그곳에 돌아가 우리는 다른 제자들과 동료들, 청소년들과 함께 모여, 무엇보다도 돈 보스코의 스승이셨던 성모님과 함께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심”(루카 24,34)을 기뻐할 것이다.
* 돈 보스코는 오랜 세월 후에 완성으로 기록할 꿈이 있었다. 나는 나의 삶으로 완성해낸 기록을 쓸 수 있는가? 쓸만한 것이 있는가?
* 살레시안으로서 나의 사목적·교육적 행동 양식이 있는가? 그것은 나만의 스타일인가, 아니면 살레시오회다운 스타일인가?
* “마당 장場” http://benjikim.com/?p=5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