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이라는 이름 앞에 붙은 접두어나 호칭은 수백 가지가 넘는데, 그중 하나는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모님”일 것이다. 성모님은 당신께 찾아들어 보호를 청하는 이들을 언제나 지켜주신다. 다음은 성모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주는 세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다.
레판토 해전: 성모님께서는 1571년 유럽에서 당신의 교회인 그리스도교를 지키셨다. 많은 이들이 16세기 말에 가톨릭 신앙과 교회가 끝날지도 모르는 큰 위기에 봉착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는 못한다. 당시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국가들이었던 여러 나라가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무렵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거대한 오스만(이슬람) 제국의 터키(오늘날 튀르키예) 함대가 그리스도교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로마를 정복하러 출발한다. 만일 그때 로마가 함락되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져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상이 아닐 것이다. 오스만 함대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연합 함대가 그리스 앞바다인 레판토Lepanto라는 곳에 집결했다. 지휘관은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Don Juan이었다. 해전사에 기록될 만큼 400여 척이 넘는 전함들이 싸우는 대전투였다. 이 전투는 15세기부터 패한 적이 없었던 오스만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고 그리스도교 연합 국가들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전투의 결과는 끔찍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엄청난 파괴와 노예, 약탈과 비인간적인 후유증이 뒤따랐다. 우리가 <돈키호테>로 잘 아는 저자 세르반테스는 이 전투에서 보병 연대장으로서 활약하다가 다쳐 왼쪽 팔에 평생 가는 장애를 입기도 했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수장이었던 교황은 비오 5세로서 전투를 앞두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자들의 도움(Help of Christians)’이신 성모님께 특별히 쉼 없는 묵주기도를 통해 보호를 청하라고 호소하였다. 전투의 결과가 교황청에 전달되기까지는 며칠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교황은 이미 환시를 통해 승리를 알고 있었고, 갖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국가와 교회를 지켜낼 수 있었다. 비오 5세 교황은 이 승리를 기념하여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제정하였고, 훗날 성 요한 23세 교황이 이 축일의 이름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바꾸었다.
살레시오회의 남미 진출: 살레시오회 창립자인 돈 보스코는 꿈을 많이 꾼 성인으로 유명하다. 이제 갓 출발한 신생 수도회이지만 돈 보스코는 살레시오회의 해외 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유럽을 넘어 형제들을 어디로 파견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중 돈 보스코는 1872년경의 꿈을 통해 그 답을 얻는다.(참조. 돈보스코 전기-MB, X, 54-55쪽) 돈 보스코는 이 꿈에 대해서 먼저 비오 9세 교황님께 말씀을 드렸고, 바르베리스 신부나 레뮈엔 신부와 같은 몇몇 신부들에게도 얘기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이 꿈을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내 생각에 아마도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느 들판에 와 있었던 듯하다. 광활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고, 산도 언덕도 없었다. 그런데 아주 저 멀리에 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곳을 치닫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거의 벌거숭이에 키는 장대처럼 컸고 험상궂은 모습이었다. 갈색과 검은색의 억세고 긴 머리카락을 지녔고,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헐렁한 망토 같은 것을 어깨에 걸쳐 흘러내리게 하는 것뿐이었다. 긴 창과 돌팔매를 무기처럼 들고 있었다. 이 부족의 사람들이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 보여 줬다. 몇몇 사람들은 들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쫓아다니고, 어떤 이들은 창끝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를 꽂고 왔다 갔다 했다. 한쪽에서는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고, 다른 편에서는 유럽인 복장을 한 군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있었다. 땅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나는 이런 장면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때 평원의 끝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등장했다. 그들의 복장이나 태도를 보니 여러 수도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위해서 그 야수 같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자세히 봤으나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들판 한가운데로 나갔다. 야만인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더니 사정없이 죽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긴 창끝에 꽂아 높이 들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질렀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본 후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렇게 잔인한 종족들을 어떻게 회개시킬 수 있을까?’ 그러는 사이 멀리서 다른 그룹의 선교사들이 즐거운 얼굴로 등장해서 한 무리의 활기찬 아이들을 데리고 평원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저들도 죽으러들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신학생들과 사제들로 구성된 그들에게 다가갔다. 주의를 기울여 자세히 보니 모두 우리 살레시오 회원들이었다. 첫 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다 살레시오 선교사로 우리 회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왜?’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들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들을 멈춰 세우려 했다. 그리고 앞서 다른 선교사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이제 곧 일어날 것이라 떨고 있었는데, 그 야만인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등장하는 것이었다. 무기들을 내려놓고, 그들의 야만성을 버리고 온갖 정성으로 우리 선교사들을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두고 보자고 속으로 말했다. 우리 선교사들이 그 평원을 가로질러 나가며 그들을 가르치자 그들은 기꺼이 경청했다. 가르치면 그들은 집중해서 배웠다. 경고하면 이를 받아들이고 그 경고에 따라 실천했다.
살펴보니 선교사들은 묵주기도를 드렸고, 미개인들은 그 기도의 응답 부분을 하고 있었다. 조금 뒤 살레시오회원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 군중 한가운데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자신들도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살레시오 회원 중 하나가 ‘마리아를 찬미하세’라는 성가를 선창하자 그 모든 사람이 한목소리로 성가를 따라 불렀다. 얼마나 큰 소리로 우렁차게 성가를 부르는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테레시오 보스코, 돈보스코, 돈보스코미디어, 2014년, 669-671쪽)」
이 꿈 이후에 돈 보스코는 꿈에서 본 사람들을 수년 동안 찾아다녔고, 마침내 1875년 살레시오 회원들을 남미 파타고니아로 파견한다. 중남미를 비롯한 해외에 선교를 위해 진출했던 많은 수도회가 생존에 실패했지만, 살레시오회는 돈 보스코의 꿈대로 남미를 기점으로 다른 수많은 나라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하여 오늘날 135개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미국의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 1,900피트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폭발시켰고, 이에 따라 지상의 반경 1마일 이내에 있던 모든 생명체와 어린이를 포함한 6만여 명에 달하는 남녀노소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8명의 사람들처럼 그 복판에 거주하고 있던 8명의 예수회 회원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방사능 오염도 거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이 여덟 명 중 당시 30세였던 허버트 쉬퍼Hubert Schiffer 신부는 거룩한 변모 대축일의 미사를 지내고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아 있을 때였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엄청난 폭발이 굉음과 함께 주변을 채웠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의자로부터 들어 올려, 공중으로 던지고, 흔들고, 때리고, 나를 빙글빙글 돌게 했습니다.(A terrific explosion filled the air with one bursting thunderstroke. An invisible force lifted me from the chair, hurled me through the air, shook me, battered me, and whirled me round and round.)” 의식을 되찾은 쉬퍼 신부는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상처는 목 뒤쪽으로 유리 조각들이 박혀있는 정도였다. 미군이 일본을 점령한 뒤 군의관들과 과학자들이 쉬퍼 신부를 포함한 생존자 여덟이 방사능 피폭으로 쇠약해지면서 죽어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들은 전혀 그런 증상을 겪지 않고 살았다. 쉬퍼 신부는 무려 200회 이상의 인터뷰를 통해 과학자들이나 의료 전문가들의 질문에 답을 해야만 했으나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었다. 8명의 예수회 회원들은 하나같이 “저희는 저희가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를 살았기 때문에 생존했다고 믿습니다. 저희는 그 집에서 매일 묵주기도를 하면서 살았습니다.(We believe that we survived because we were living the message of Fatima. We lived and prayed the rosary daily in that home.)”라고 증언했다.(사진: 원폭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성당 옆에 서 있는 예수회원들 – 빨간 동그라미 안의 인물들 *출처-네이버블로그)
* 이 글을 쓰고 나서 한국 예수회 신부님 한 분께 당시 생존자들 모두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고 여쭈었더니 친히 자료를 보내주셨다. 나는 위에서 외국말 기사를 바탕으로 8명이 생존했었다고 썼었는데, 내가 문의했던 예수회 신부님의 자료에 의하면 피폭 후에 16분이 생존했으며 그 명단은 사진에서 영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는 당시 수사였으며 나중에 사제로 서품되신 진성만(14번, 당시 29세, 70세로 선종), 김태관(15번, 26세, 71세로 선종) 조선인 수사님들도 계셨다. 두 분 모두 원폭 피해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