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경축 이동 전례가 아닌 연중 제24주일의 복음을 따른다면, 자기가 받은 엄청난 은혜요 자비, 그리고 용서를 그대로 갚지 못하는 불충한 이의 비유(마태 18,21-35)를 들은 뒤 이번 주에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자비의 또 다른 비유 하나를 듣게 된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하느님 자비의 행위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며, 또한 인간의 셈법을 뛰어넘고 인간이 전혀 예상치 못한 하느님의 셈법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살 수도 없고 취득할 수도 없어 그저 선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선물은 무상이요 공짜여서 ‘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
첫째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마태 20,1)이다. 포도밭 주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 포도밭을 위해 일할 일꾼들을 찾느라 일을 찾는 일꾼들이 모여 있는 “장터”에 들락거리느라 “이른 아침”부터 바쁘다. “이른 아침”, 당시 시간 계산법으로 대략 아침 6시쯤에 “장터”에 나간 주인은 일꾼들을 만나 품삯을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마태 20,2) 주인은 “아홉 시쯤”에도 장터에 나가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라는 계약으로 “할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마태 20,3) 다른 일꾼들을 포도밭으로 보낸다. 그리고 같은 행동을 “열두 시…오후 세 시쯤”에도 되풀이한다.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인은)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이렇게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0,6-7) 주인의 물음에 일꾼들은 팔리지 않아 돈 벌고 일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주인은 새벽부터 일할 시간이라고는 고작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저녁 무렵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집을 나서서 장터로 가고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일할 기회를 준다.
여기까지 보자면 장터에 서 있었던 모든 사람이 일할 기회를 얻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주인이 다른 관리인이나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장터를 오갔으며 그들과 직접 품삯을 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허름하고 땀 냄새가 풀풀 나는 일꾼들과 직접 만나 계약을 하고 말을 섞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관행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인은 자기 포도밭에 일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직접 얼굴을 맞대고 그들을 만나고 싶었으며 자기 밭에서 일할 일꾼들과 직접 말을 나누고 싶었다.
2.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품삯을 내주시오”
그렇게 해서 저녁나절이 되자 일꾼들이 포도밭에서 일을 마치고 품삯을 계산하러 온다. 의롭고 관대한 주인은 “너희는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나, 너희 땅, 너희 성안에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품팔이꾼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의 품삯은 그날로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하여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므로,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가 너희를 거슬러 주님께 호소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이다.”(신명 24,14-15)라는 오랜 구약의 율법을 성실하게 지킨다.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마태 20,8) 하고 지시한다.
『나이가 꽤 들어서 신에게 자신을 의탁한 사람들이 대개 자기 과거란 모두 헛되게 보낸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묘한 심리적 현상이 있다. 희망이 전혀 없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 평생 빈둥거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해도 주님의 포도밭에서 좋은 일을 할 몇 분의 시간 정도는 남아 있다. 심지어는 진심으로 참회한 십자가 위의 강도처럼,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몇 시간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다.(풀턴 J. 쉰Fulton Sheen 대주교, 1895~1979년, 「행복에 이르는 길」에서)』
주인의 지시를 가만히 보면 맨 먼저 와서 가장 일을 많이 한 사람부터가 아니라 맨 나중에 와서 일을 가장 적게 한 이들부터 품삯을 지급하라 한다. 지시에 따라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관리인으로부터)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마태 20,9)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마태 20,10) 이른 아침부터 와서 “뙤약볕 아래에서” 더 많이 일한 사람들이 더 많이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였지만, 그들은 자기 몫을 받아들고 적이 실망한다. 그래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하면서 일을 더 한 사람에게 더 많이 주든지 일을 적게 한 사람들에게 더 적게 주어야 한다는 듯이 자기 몫을 “받아들고” “투덜거린다.”(마태 20,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여기까지만 들으면, 예수님께서 모든 이야기를 참으로 인간적인 일상사에 인간적인 감정을 담아 평범하게 서술하심을 알 수 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혹은 한 시간이라도 더 많이 일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며 투덜거린다.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싫고 차별이 있어야 한다며 화가 나고 투덜거린다. “투덜거린다”는 단어는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도 익숙한 단어이다. 인간관계를 훼손하는 전형적인 어휘이다. 불만의 요점은 “똑같이 대우”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와 마지막이 동등한 것에 대해 주인이 불의를 저질렀다고 판단한다.
주인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며 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정의’라는 것을 내세울 때 ‘이건 불의야! 공정하지 못해!’라며 목에 핏대부터 세우고 큰소리를 지르며 확신과 권위에 차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거꾸로 누군가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엄한 잣대를 나에게 들이댈 때는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이 비유를 읽는다는 전제 아래, 포도밭 주인이 불렀던 일꾼들을 말 그대로 인력 시장의 일꾼들이라 보고, 그들 중에서 이른 아침부터 포도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찾았던 주인이라고 치자. 주인이 맨 처음에 불렀던 일꾼들은 일꾼 중에서 가장 튼실하고 가장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일이 마무리가 안 되는 바람에 주인은 맨 먼저 데려간 일꾼들보다 조금은 못 하지만, 아직도 안 팔리고 있는 사람들을 또 데려오고, 더 못한 사람들을 또 몇 명 더 데려오고…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마침내 일이 마감되는 저녁 시간 얼마 전에 이르러, 그때까지 일을 기다려도 팔리지 않았던 가장 바보 같고, 가장 형편없고, 가장 비실비실한 일꾼들을 보면서 주인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주인은 일은 끝나가지만, 그들도 가족이 있을 것이고 불쌍하니 밥이라도 먹고 살아가라고, 그냥 와서 일하는 시늉만 내더라도 한 푼씩 받아 가라는 뜻에서, 그들을 마지막에 부른다. 이렇게 이 비유를 읽는다면, 맨 처음에 온 사람은 일꾼들의 등급으로 보아 소위 엘리트요 A급이며, 갑·을·병으로 따지면 갑이고, 상·중·하로 따지면 상이었으며, 비행기 좌석으로 보아 일등석‧비즈니스석‧이코노미석이라면 일등석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가장 마지막에 온 사람은 C급일 것이며, 병일 것이고, 하급이고 이코노미석일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사람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가정, 집단, 조직, 그룹, 공동체 안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이 못마땅할 수 있다. 좀 더 멋지지 못하고, 좀 더 세련되지 못하고, 좀 더 본새 나지 못하고…왜 이렇게 바보 같고, 멍청하고, 소위 말썽꾸러기들만 모여 있다는가 하는 자괴감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다른 구성원들의 건너편에 있으면서 그들과 다른 사람이 분명 아니다. 그들이 못났으면 나도 못났고, 그들이 C급이면 나도 분명 C급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A급이요 상급이며 갑이라는 착각 속에 있으므로 그들과 하나 되어 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못났으며, 불쌍한 죄인이며, 철부지들을 위해서 당신 나라를 마련하셨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하늘 나라의 시민들도 분명 인력 시장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안 팔리는 C급의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왜 이렇게 C급들만 있는 거야?’ 한다는 것은 C급들의 와중에 있으면서도 나 자신이 그 C급의 일원이었음을 알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동안 착각 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항상 “이른 아침”이나 아침 “아홉 시”부터 와서 일한 사람이며, 자신은 다른 이들과 다른 A급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속한 공동체, 가정, 조직, 교회, 심지어 나라에 이르기까지 항상 못마땅한 것이 그대로 있으며, 주변의 못남과 바보스러움에 화가 나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아직 내가 그들 가운데 일원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내가 그들의 건너편에 있는 이방인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못나고 바보 같은 사람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나라를 마련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내가 아직 다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맨 나중에 온 사람들”임을 인식하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재주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서로 의지하며 서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하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운 좋게도 얻은 행운,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행운의 나라이다. 여기에는 그저 “감사”가 있을 뿐이다. 맨 나중에 와서도 맨 처음에 온 사람과 똑같이 임금을 받는 사람이 정말 나의 친형제라면, 나는 아마도 주인이 멍청했거나 주인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내가 받은 몫을 불평하는 대신 혹시라도 주인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몫을 챙겨 그 자리를 뜨자는 의미에서 늦게 왔으면서도 똑같은 몫을 받은 나의 형제에게 의미 있는 눈짓이나 몸짓이라도 전달하려고 했었을 것이다.
3. “친구여,…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일꾼들의 투덜거림에 대해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면서 단호하게 개입한다. 주인은 다소 장황하게 조목조목 따지듯이 말한다. 먼저 주인은 일꾼을 “친구여” 하고 부르며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마태 20,13) 하며 자기가 일꾼과 “합의”한 내용을 상기시키고 자신이 “불의”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투덜거리는 일꾼이 “불의”하다는 판단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마태 20,14) 한다. 그러면서 주인은 자기 생각이나 행동을 바꿀 의향이 없다며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하고 자신이 일꾼들에게 그저 후하게 하고 싶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지막에 포도밭 주인은 일꾼에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5)라고 말하며 다소 시비를 걸듯이 도전적으로 반문한다. 여기에 “시기”라는 말이 등장한다. “시기”라는 말을 라틴어로 ‘invidia’(영어의 envy)라고 하는데, 이는 『in(뒤의 동사를 부정하는 뜻) + vidia(vedere, ‘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이므로 ‘보지 않으려 하다’라는 뜻이다. “시기”는 한 마디로 타인의 행복, 선익, 기쁨이 마치 나에게 해害가 되고 공격이라도 되듯이 이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논리적 대가를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주어지는 자비, 그저 인간이 감사하며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선물이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인간이 입어야 하는 사랑, 무상의 베풂을 말씀하신다. 인간은 하느님께 빚진 존재요 헤아릴 수 없이 큰 신세를 진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 앞에 내세울 것이 있는 인간은 없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이고 또 어떤가? 은총과 공로를 두고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실로 하느님의 은총만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공로를 쌓아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언제나 그저 베풀어주시는 사랑이요 사랑 자체이신 분을 결코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는 말씀으로 끝난다. 첫째나 꼴찌나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 싶은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며 마감하는 것이 마땅하다. 부활절 강론으로 보이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년경~407년)의 말씀이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정당한 임금을 받았습니다. “아홉 시쯤”에 온 사람은 덤의 은총을 받아 잔치에 합세했습니다. “열두 시”에 온 사람은 그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후 세 시쯤”에 온 사람은 주춤거리고 눈치 보며 왔으나 그래도 잔치에 들어왔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에 온 사람은 두려웠으나 이내 괜찮아졌습니다. 주인은 관대하신 분이었고, 마지막에 온 이도 처음 온 이와 똑같이 대우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온 이나 마지막에 온 이나 모두 편안했습니다. 마지막 사람에 대한 자비도 이른 아침부터 온 사람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완전한 공짜요 무상으로 주어진 주님의 무한한 자비는 우리 사이에서 나뉘어야 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신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밝혀주셨으니 이런 논리 저런 논리를 관두고 그저 그분의 자비를 나누어야만 한다. 아멘!
모든 이에게 평등한 대우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 덕분에 제가 오늘도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일은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서도 아니고 늦게 시작해서도 아니며,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에 대한 질의 개념도 아니고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대한 양의 개념도 아닌 것을… 잘못된 셈법으로 봉사 했던 일들을 반성하며 하느님의 셈법으로, 한 데나리온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