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모든 악이 들어오는 대문
「칠극」 제4권은 ‘식분’(熄忿, 불꺼질 식/성낼 분)이다. 분노의 불길을 끄는 방법을 살폈다. 분노는 잠깐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났을 때 한 일은 분노가 풀리면 틀림없이 후회한다. 분노했을 때는 오직 자기를 다스리는 데 힘써야지, 남을 다스리려 하면 안 된다. 분노는 복수의 마음에서 나와 갖은 나쁜 말과 욕설, 다툼과 싸움, 살상과 과도한 형벌의 형태로 표현된다.
분노는 장작을 잔뜩 넣은 가마솥과 같다. 한번 불길이 타오르면 이 다 끓어 넘쳐도 멈추지 않는다. 국물이 다 졸아도 그침이 없다. 결국 속에 든 음식을 다 태우고 솥마저 터져 버려야 끝이 난다. 이를 막으려면 아궁이에서 장작을 빼내는 수밖에 없다.
사실 분노는 사나운 짐승의 감정이다. 굳센 발굽과 날카로운 뿔, 예리한 이빨과 긴 발톱을 가진 맹수들은 이를 써서 난폭하게 원수를 갚는다. 몸뚱이뿐인 사람은 어떤가? 수많은 흉기를 만들어 남을 해친다. 짐승은 아무리 사나워도 제 동류를 해치지 않지만, 사람은 잔인하게 저와 동류인 사람을 해친다.
사람을 죄악에 빠뜨리려면 상대가 분노했을 때를 엿보면 된다. 마귀는 사람의 분노를 가장 기뻐한다. 한 사람의 분노는 연쇄적으로 옮겨 가며 서로를 끌어당겨 끝없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세네카를 비방했다. 세네카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그가 제정신으로 나를 헐뜯었다면 내가 혹 화가 나겠지만, 마음이 병들어서 나를 헐뜯었다면 성을 내서 무엇 하겠는가?”소크라테스가 길에서 만난 어떤 사람에게 공경의 예를 표했는데 그가 대답하지 않자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자가 분개해서 그를 꾸짖으려 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병든 사람이 지나간다면 네가 성을 내겠느냐? 이 사람의 마음은 내 마음보다 병들었는데 어찌 성을 내겠느냐?”
이렇게 예시를 든 판토하가 말한다.
“분노로 남을 해치는 사람은 벌과 같다. 벌이 성이 나서 물건을 쏘면 물건은 약간 아프고 말지만, 벌은 목숨을 잃고 만다.” 또 말했다. “남에게 성내는 사람은 먼저 무겁게 자신을 해치지 않고서는 가볍게라도 남을 해칠 수가 없다. 하물며 남이 반드시 그 해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자신은 해롭지 않음이 없다.”
분노는 이처럼 마음의 눈을 가린다. 마음에 분노를 품으면 너무도 분명한 이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판단을 내리거나 결정을 할 때 조급함과 성냄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성미가 조급해서 분노로 사람을 쉬 해치곤 했다. 분노를 잠시 멈추는 처방으로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전하! 분노가 일어나면 자음과 모음을 몇 차례 외우신 뒤에 명을 내리고 일을 행하십시오.” 가나다라를 몇 번 천천히 외우고, 아야어여를 다시 몇 번 더 외워 분노의 불길을 잠재우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화가 나면 말수가 적어지고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분노의 종류와 처방
그렇다고 모든 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분노에도 종류가 있다. 성을 내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분노와 의로움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 즉 의노(義怒)가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처방은 이렇다. “성내서는 안 될 때 성을 내는 것은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다. 마땅히 성내야 할 때 성내지 않았다면 남을 죄에서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이니, 그 죄가 같다. 잘못을 보고 성을 내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다. 의롭지 않은 일을 그저 넘어가는 것은 잘 참는 것이 아니라 물러 터진 것이다. 이치로 따진 뒤에 일어나는 분노는 의로움과 같다.” 그러니 덮어놓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화내서는 안 될 때와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을 때를 잘 분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식분’에는 세 가지 하위 항목을 두었다. 그 첫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루카 6,32-35를 인용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악한 사람도 잘한다. 우리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취지다.
판토하가 설명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므로 나도 그를 사랑하였다면 천주께서 ‘그는 이미 보답을 받았구나’ 하실 것이다. 만약 ‘그가 나를 해치고 미워했지만 제가 천주를 위해 그를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천주께서는 ‘이는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라 내가 네게 빚진 것이니 내가 너에게 갚아 주겠다.’고 하실 것이다.” 나아가 적는다. “네가 남에게 원수를 갚으려 한다면 마귀로 하여금 네게 복수하게 하는 것이다. 네가 남의 편안함을 빼앗았다고 즐거워할 때 마귀는 능히 너의 덕을 빼앗았다고 즐거워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은 이렇다. “원수를 용서하지 않는 자에게 하늘 문은 이미 닫혀 있다. 그의 기도는 천주께 들어가지 못하고, 천주의 인자하신 은혜 또한 그에게 내리지 않는다.” 바오로 성인의 말은 또 이렇다. “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찬미하여라. 그를 비방하여 헐뜯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마라.”
인내의 덕으로 환난에 대처하라
둘째는 인내의 덕으로 환난에 대처하라는 주문이다. 서두부터 인내의 정의가 나온다. “인내는 평온한 마음으로 해로움을 받아들이고, 내게 해를 준 사람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 인내라는 것은 착한 사람의 갑옷과 투구다.” 하지만 인내는 용기보다 어렵다.
판토하가 말한다. “어려움을 만나 목숨을 맡기는 사람은 많지만, 어려움을 당하여 굳게 참는 사람은 적다. 사람은 무엇이든 이길 수 있지만, 인내하는 사람만큼은 이길 수가 없다.” 성경도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잠언 16,32)고 했다. 판토하는 이렇게도 말했다. “이미 분노로 해로움을 제거할 수 없다면, 어찌하여 인내로 덕을 더 늘리지 않는가? 인내하면 분노의 괴로움을 살피면서 괴로움의 고통마저 잊게 해 준다.” “세간에서 말하는 고통과 욕됨은 올바른 고통과 욕됨이 아니라, 다만 남의 뜻에 매인 것이다. 내 생각으로 욕되다고 여기면 욕됨이 되지만, 욕되지 않다고 생각하면 욕됨이 아니다.”
이런 말도 보인다. “나쁜 말로 너를 범하는 자는 스스로 먼저 악을 행하여 네가 이를 따라 하게 하려는 것이다.” 인내는 해로움과 욕됨을 받고도 입으로 말하지 않고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근심치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욕을 받고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참았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입만 침묵했지 마음은 더 시끄럽고, 낯빛만 부드럽지 가슴속에 성이 나 있다면 이것은 인내가 아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이 말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한 악을 가만히 생각한다면 모욕받음을 참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방을 받은 어떤 현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의 다른 큰 죄를 알았더라면 나를 욕하는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쳤겠는가?” 자신에 대한 악담을 들은 어진 이의 말은 또 이러하다. “마땅히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할 것을 거저 얻었으니 다행스럽다.”
세 번째 항목은 박해의 고통을 견뎌 덕을 보태라는 내용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칠극」은 이를 “천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순경과 역경이 계속 바뀌더라도 모두 그 복을 도와준다.”로 옮겼다. 좋은 일은 사랑의 보답이고, 역경은 그를 더욱 강하게 단련하시려는 주님의 안배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이 다 기쁜 축복일 뿐이어서, 삶은 축제의 연속이 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네가 천주의 나무람 밖에 있다면 틀림없이 그분의 사랑 밖에 있는 것이니, 끝내 그분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레고리오 성인도 말했다. “지금의 나무람은 자애의 징표이고, 지금의 용서는 노여움의 표징이다. 희생에 쓸 소를 죽이려 할 때는 마음대로 놀고먹게 한다. 다만 살려 두려는 것은 묶어 둔 채 힘든 일을 맡긴다.”
인(忍)이라는 글자는 마음 [心] 위에 칼날을 꽂아 둔 상태다. 인내는 이처럼 어렵다.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을 수 있다면 참지 못할 것이 없다. 「칠극」의 네 번째로 분노를 가라앉히는 인내를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정민, 경향잡지, 2023년 6월호, 제115권, 통권 1863호)
***
‘참을 인忍’이라는 한 글자 – 심心과 칼刃을 합쳐, 마음 위에 칼날을 붙인 것(心上着刃)
분노忿怒
4.2 분노는 모든 악의 대문이다. 이를 닫아야 모든 덕이 그 거처에서 편안해진다.(성 그레고리오) (“忿怒, 衆惡之門也, 闔之而衆德安其居.”-聖厄勒卧略)
4.3 쉽게 성내는 사람은 초가집에 사는 것이나 같다. 초가집은 불이 나면 그 자리에서 타버린다. 오늘 큰 부자였더라도 내일은 크게 궁색해진다. 분노의 불길을 거두지 않음은 재력을 다 쓰고 정력을 모두 소모하는 것이니, 이는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또 솥 안에 음식을 삶는 것과 같다. 장작을 잔뜩 넣어 불길이 타오르면 백번 끓어 넘쳐도 멈추지 않는다. 처음 끓어 넘칠 때 뜬 거품을 제거해도 그치지 않고, 국물이 모두 졸아도 그치지 않으며, 솥이 온통 바짝 타도 그치지 않아 솥마저 깨지고 만다. (易怒者如居草舍. 草舍失火立燼. 今日大富, 明日大窮矣. 怒火不戢, 財力悉費, 精力悉耗, 是自焚也. 又如水煮物釜中, 薪盛火熾, 百沸不止. 初湧去浮沫不止, 音汁俱盡不止, 釜實乾焦更不止, 釜幷破裂.)
4.10 분노로 남을 해치는 것은 벌과 같다. 벌이 성이 나서 물건을 쏘면 물건은 약간 아프고 말지만, 저는 정작 목숨을 잃고 만다. (怒害人如蜂. 蜂以怒螫物, 物得微痛而自失命.)
4.16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방법…“항상 남을 따르고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손해를 입더라도 성내지 말고, 복수도 생각하지 않는다.”(성 베르나르도) (…入聖之方…“恒從人, 不從己. 受人害, 不怒, 不思復讐.”-聖百爾納將)
4.17 …인내를 익히고 성냄을 나무란 것… (…習忍責怒…)
4.18 …무릇 사람이 여러 일을 판단하고 결저알 때 가장 꺼려야 할 것이 두 가지…조급함과 성냄이다.… (凡人斷決諸事, 最忌者二, 躁怒.…)
4.19 분노는 잠깐 동안 미치는 것이다. 술에 취하는 것과 분노에 취하는 것은 똑같다.…“가장 함께 일을 계획할 수 없는 사람이 셋 있으니 여색을 탐하고, 술에 취하며, 성을 내는 사람이다.”… (怒, 暫狂也. 以酒醉, 以怒醉, 等也.…“最不可共計事者三, 色貪, 酒醉, 忿怒.”…)
4.23 군자는 죄로 인해 남에게 성을 낸다. 성냄을 그만두지 못할 때는 죄를 고쳐야 분노가 가라앉는다. 소인의 분노는 자기의 마음에서 나와 까닭 없이 화를 낸다. 이 때문에 한 가지 분노가 남아 있을 경우, 분노가 분노를 불러 곧장 무겁게 성을 내고 오래도록 성을 내서 마땅히 성낼 만했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君子緣罪怒人, 怒不獲已, 罪改而怒息. 小人之怒, 出於自心, 無故而怒. 故一怒則存, 怒增怒, 直欲以重怒久怒, 顯其宜怒.)
4.24 어떤 이가 물었다. “분노는 모두 나쁩니다. 마땅히 모두 끊어버려야겠지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성 크리소스토모가 말했다. “마땅히 성내서는 안 될 때 성을 냈다면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다. 마땅히 성내야 할 때 성내지 않았다면 남을 죄에서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이니, 그 죄가 같다.”
그러므로 잘못에 대해 성을 내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롭지 않은 일을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잘 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치게 물러터진 것일 뿐이다. 이치로 따진 뒤에 분노가 따라온다면 의로움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되므로 지나치게 무른 것이 되지는 않는다. 형벌은 그 죄에 합당해야 의로움에 큰 도움이 된다. 만약 이치로 따지기에 앞서 참람하게 주인 노릇을 하면 지나치게 가혹하여 인의를 해침이 심해질 것이다. (或問: “忿怒悉惡, 悉宜絶否?” 曰: “否.” 聖契理瑣曰: “不當怒而怒, 自犯罪也, 當怒不怒, 不欲救人罪也. 其罪等.”
故怒其罪, 謂愛其人, 見非義而心不動, 非能忍也, 惟過柔耳. 忿怒從於理後, 則爲義役, 勿得過柔, 刑當其罪, 甚助於義. 若在理前, 而僭爲主, 斯過於虐, 甚害仁義矣.)
원수를 사랑함(愛讐)
4.26 마태 18,23-34 매정한 종의 비유…너희가 남에게 원수를 갚으려 들면, 천주께서 이미 사해주신 죄를 다시 뒤쫓아서 돌려받으실 것이다. (…爾欲復人讐, 天主所已赦罪, 復追還之.)
4.35 덕을 닦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아는 것에 다급해야 한다. 허물을 알아야만 허물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修德者, 皆急干識己過. 識過斯能改過失.…)
4.38 …네 원수가 굶주리면 그를 먹이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주어라. 악을 이기려 들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겨라. 만약 곧음을 가지고 해를 갚으면 자기가 죄를 범함을 면하게 된다. 은혜로 해를 갚으면 또 남을 죄에서 건져주는 것이다. 곧음으로 원수를 갚으면 남의 원수가 됨을 면하고, 사랑으로 원수를 갚으면 또 원수가 변하여 벗이 되니, 어느 것이 더 좋겠는가? (…爾讐饑食之, 渴飮之, 不勝於惡, 反以善勝惡矣. 若以直報害, 免己犯罪, 以恩報害, 又救人罪. 以直報讐, 免爲人讐. 以愛報讐, 又化讐爲友, 孰善乎?)
인덕忍德
4.42 인내란 무엇인가? 평온한 마음으로 해로움을 받아들이고, 내게 해를 준 사람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忍者何? 以平心受害, 不忌授我害者是也.…)
4.43 인내라는 것은 착한 사람의 갑옷과 투구다.… (夫忍者, 善人之甲胄也.…)
4.44 …참을성 있는 사람은 모욕을 영광으로 알고, 미천함을 존귀함으로 여기며, 내쳐짐을 윗자리로 올라가는 듯이 보고, 가난해도 부유하다고 생각한다. 배가 고파도 배부르다고 여기고, 지고서도 이긴 것으로 치며, 흉년인데도 풍년으로 여기고, 역풍에도 길을 간다. 이는 마치 배가 바다 위에서 험한 풍랑을 만났을 때, 파도가 높을수록 하늘에 더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忍人以侮辱榮光, 以賤微尊貴, 以降黜上昇, 以貧富, 以餓飽, 以負勝, 以荒歲豐, 以逆風行. 如海舟値浪險, 浪愈高, 廼愈近天也.)
4.45 …선을 행하려 하면서 인내의 덕이 없는 것은 삼엄한 진陣 가운데 갑옷 입은 군대가 없는 것과 같으니, 능히 다치거나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성 그레고리오) (…欲行善無忍德, 如在嚴陣中無兵甲, 能不受傷失命哉?-聖 厄勒卧略)
4.50 덕을 닦는 데는 세 등급이 있다. ① 시작함이 있고, ② 나아감이 있으며, 이미 ③ 도달함이 있다. 인내에도 또한 세 등급이 있다. 어려움을 만나 ① 억지로 참는 것은 인내의 시작 단계다. 어려움을 만나 ② 즐겁게 참으면 인내의 발전 단계다. 참기 어려운 일을 얻기 위해 이를 ③ 구하고, 얻은 뒤에는 즐기며 이것이 떠나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미 인내의 지극한 단계다. 이미 지극한 단계에 이른 사람은 그 몸은 땅에 있더라도 실제로는 하늘의 사람이다. (修德者有三級, 有始者, 有進者, 有已至者. 忍亦有三級. 遇難强忍之, 忍之始. 遇難樂忍之, 忍之進. 願得所忍難而求之, 既得而樂, 不願去之, 已忍之至也. 已至之人, 其身在地, 實天人矣.)
4.52 …대개 사랑과 상은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한정이 없고, 분노와 벌은 내 죄에서 나오는지라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은 참을수록 도량이 점점 넓어지고, 천주를 닮아갈수록 하늘나라의 사람이 된다. (…蓋慈賞出于本性, 故無限, 怒罰出於我罪, 故不得已. 人逾忍, 量逾寬, 逾似天主, 爲天人也.)
하늘나라는 구름이 그 빛을 가리지 못하고, 바람이 그 고요함을 흔들지 못한다. 예로부터 한결같다. 인간 세상은 절로 어두워졌다가 절로 개고, 절로 추워졌다가 절로 더워진다. 포용력이 큰 사람은 일이 변해도 마음은 일정하고,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마음은 고요하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은 근심하지 않는다. 정육면체처럼 여섯 면이 똑같아서 안온하지 않음이 없다.… (天之所, 雲不掩其光, 風不撓其靜, 終古如一. 惟下處自暗自晴, 自塞自暑. 大容之人, 事變而心常, 世亂而心靜, 身難而心不憂, 如立方物, 六面如一, 無不安穩.)
또 황금과도 같아 단련해도 줄지 않고 두드려도 끊어지지 않는다. 작은 그릇도 만들고 큰 그릇도 만들어서 그 값을 쳐서 받는다. 오직 관용이 적고 마음이 좁은 사람은 걸핏하면 화내다가 문득 사랑하고, 금방 근심하다가 어느새 즐거워한다.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따라 바뀌듯 한시도 같을 때가 없다. 그래서 포용력이 큰 사람은 한 마음으로도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지만, 포용력이 작은 사람은 이랬다저랬다 하며 한 마음에 끌려다닌다. (又如黃金, 煉之不耗, 鍛之不斷, 以爲小器, 爲大器, 其價埒, 惟寡容狹心之人, 條怒條愛, 條憂條樂. 如樹葉隨風變動, 無刻得同, 故大容之人, 以一心御多事, 小谷之人, 以多變御一心.)
4.58 해로움과 욕됨을 받은 사람이 입으로 말하지 않고,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근심치 않고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인내다.… (受害辱者, 口不言 色不厲, 心不憂不計, 是正忍也.…)
지금 사람들은 모욕을 받고 나서 능히 말하지 않고는 참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입으로는 줄였지만 마음에서는 더한다. 입은 조용하나 마음이 시끄러우며, 낯빛은 부드러워도 가슴속에 성이 나 있거나, 손은 내렸지만 속으로는 불끈하고 있다면, 이것은 참지 못함이 더욱 커서 그 해로움이 더욱 깊다. 가슴속에 성난 뜻을 품고, 입으로 성난 말을 하는 이 두 가지 악은 모두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침묵 속에 쌓아두고 성내기보다는 차라리 말로 펴서 흩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 (今人受辱, 能不言, 謂忍矣․ 然而減於口, 增於心, 口寂而心喧, 色愉而胸愠, 手垂而中攘, 此爲不忍尤大, 其害尤深. 胸懷怒意, 口發怒言, 兩惡俱不可. 與其默畜而蘊, 無寧口發而散.)
4.61 …모든 덕은 다 한 집으로 돌아간다.…스스로를 꾸짖는 것… (…諸德皆歸一家…自責…)
4.71 …관과 무덤을 만드는 것이 어찌 죽은 사람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산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덮어서 격리시키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棺塋之計, 豈緣顧死人? 正以顧生人也. 人死斯畏之, 故爲是掩離之耳.…)
어려움으로 덕을 더함(窘難益德)
4.78 …세간의 일은 세 종류에 불과합니다. ① 참된 복이 하나요, ② 참된 재앙이 하나며, ③ 복도 아니고 재앙도 아닌 것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살아서 덕을 쌓으면 죽어서 즐거움이 영원하니 참된 복입니다. 살아서 죄를 지으면 죽어서 괴로움이 영원하니 참된 재앙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함을 원치 않는데도 천주께서 이를 강요하는 이치란 없습니다. 스스로 마땅히 받아야 할 천상 즐거움의 공덕이 있는데 천주께서 이를 막는다거나, 응당 받아야 할 지옥의 죄과가 있건만 천주께서 이를 내리시지 않는 이치 또한 없습니다. 그럴진대 어찌 천주께서 진짜 재앙을 착한 사람에게 내리시고, 참된 복을 악한 사람에게 더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나머지 빈부와 귀천, 병든 것과 편안함, 오래 살고 일찍 죽음 등은 본래 재앙도 아니고 복도 아닙니다.… (…世間之事, 不過三種, 眞福一, 眞禍一, 非福非禍者一. 生積德, 則死永樂, 眞福也. 生作罪, 則死永苦, 眞禍也. 夫人自不願爲善爲惡, 而天主强之, 于理無有. 自有應受天樂之功德, 而天主拒之, 有應受地獄之罪過, 而天主不加之, 亦于理無有. 則曷可謂天主以眞禍加善人, 以眞福加惡人與? 若其餘貧富賤貴, 病安壽夭等, 欺本非禍非福也.…)
…지혜로운 사람은 감히 출발점을 믿지 않고, 또한 망령되이 그 중간과 끝을 헤아리지도 않습니다. 천주께 밝음을 돌려 천주께서 직접 결정하시기를 기다립니다.… (…智人不敢信始, 亦不妄其中與末, 歸明於天主, 待天主之自決焉.…)
4.79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에서 천주의 사랑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2) (善人受苦, 驗天主之愛.)
4.80 …어린아이의 정은 단지 눈앞만 보고 훗날에는 뜻이 없어서, 어리석은 아들에게는 후하면서 지혜로운 아들에게는 박하다고 생각하게 마련인데, 아버지가 어리석은 아들에게는 바라는 것이 없고, 지혜로운 아들에게는 무겁게 기대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 줄은 알지 못한다.… (…童兒之情, 但見目前, 無志日後, 以爲厚於愚, 薄於慧, 不知父無望於愚者, 慧則重有冀也.…)
4.81 …어려움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그것은 천주께서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문득 나를 잊으셨다는 분명한 증거일 뿐이다.(세네카)… (…不遭艱難者, 正爲最無幸人, 明徵天主因我怠惰, 忽忘我耳.-塞搦加)…)
4.82 …착한 사람은 영혼의 재물을 취급하는 장사꾼이다. 천상에서는 고난을 참아낸 값이 가장 비싼 줄을 알기 때문에, 괴로움과 어려움을 만나면 이를 참아내고 이를 즐거워하며 훗날의 무거운 값과 바꾼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 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善人, 神貨之商人也. 知爲天上忍苦難之價最重, 故遇苦難, 則忍之樂之, 易異日之重値也. “此時艱難, 不當日後所顯于我輩福樂也.”(로마 8,18)
4.83 …천주께서 천국을 팔 때, 그 값은 고난과 괴로움일 뿐이다.(성 아우구스티노)…세상의 복을 뜻대로 이루는 것은 두려워할 만하다. 끝에 가서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天主沽天國, 其價艱難而已.(亞吾斯丁)…世福遂意者, 可畏也. 恐其終不能爲天人故也.…)
4.91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 요한 성인에게 알리고, 구해달라고 빌었다. 성인이 대답했다. “너는 바로 네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을 없애려고 하느냐? 몸의 때는 물로 목욕하고, 정신의 더러움은 병으로 갈아낸다. 옷이 더러운 것은 비벼빨아 없애고, 마음의 죄는 어려움으로 제거한다.”
또 한 사람이 병들었다. 그 스승인 현자가 위로하며 말했다. “네가 쇠라고 치자. 병으로 꺾인다면 녹을 없애야 한다. 네가 황금이라고 하자, 병으로 단련하면 더 반짝거리게 될 터이니, 무엇을 근심하느냐?” (或有疾, 告若誾聖人, 祈救焉, 答曰: “爾正欲除有益於爾事耶? 身垢以水浴, 神穢以病磨, 农汚以煩撋去, 心罪以艱難除.” 又一人病, 其師賢者, 慰之曰: “爾爲鐵, 以病剉則除銹, 爾爲黃金, 以病煉則增光, 何憂乎?”)
4.94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다. “금은 불에 들어가면 빛이 나고, 풀은 불에 넣으면 연기가 난다. 괴롭고 힘든 것은 한가지인데, 선한 사람이 이를 만나면 천주께 감사하며 찬송하여 더욱 맑아진다. 악한 사람이 이를 만나면 분노하면서 원망하고 남을 탓하느라 더욱 탁해진다.”
세상의 괴로움에는 절로 선과 악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내가 참아내면 이익이 되고 천주의 사랑을 징험하게 된다. 참지 못하면 손해가 되어 천주의 분노를 불러들인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오가 말했다. “눈앞의 괴로움이 진실로 너를 변화시켜 착하게 한다면 앞선 죄의 끝이 된다. 변화하여 착하게 되지 않고 그대로 악하다면 장차 올 영원한 고통의 시작이 될 것이다.” (亞吾斯丁曰: “金入火生光, 草入火生煙. 苦難一也, 善人遇之, 而以感頌天主, 愈清矣, 惡人遇之, 怒而怨尤, 愈濁矣.” 世苦自無善惡, 惟我忍則爲益, 而徵天主之愛. 不忍則爲損, 而徵天主之怒, 故聖厄勒卧略曰: “目前之苦, 苟化爾爲善, 則爲前罪之終. 不化爲善, 而尙爲惡, 則爲將來永苦之始.”)
인내의 덕으로 환난에 대적함以忍德敵難
4.42 인내란 무엇인가? 평온한 마음으로 해로움을 받아들이고, 내게 해를 준 사람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忍者何? 以平心受害, 不忌授我害者是也.)
4.43 인내라는 것은 착한 사람의 갑옷과 투구다. 이것으로 세상의 변고를 감당하고, 마귀를 이기며, 여러 삿됨을 공격하고 여러 가지 덕을 지킨다. 분노를 막고, 혀를 묶으며, 마음을 다스려 편안함을 기른다. 두려움을 누르고, 근심을 없애며, 다툼을 끊어낸다. 부자의 방자함을 누르고, 가난한 자의 굴욕을 펴주며,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겸손을 간직하게 해주고, 어려운 지경을 당한 사람에게 용기를 지니게 해준다. 인내는 남이 내게 죄를 얻으면 내가 즉시 이를 용서해주게 하고, 내가 남에게 죄를 얻으면 또 나로 하여금 영원히 용서를 구하게 만든다. (夫忍者, 善人之甲胄也, 以當世變, 勝鬼魔, 攻諸私, 保諸德, 防怒, 羈舌, 御心, 養安, 鎭怖, 祛憂, 絶争, 抑富者之恣, 伸貧者之屈, 居尊巍者使存謙, 受艱難 者使存勇, 人得罪於我, 令我即赦之, 我得罪於人, 又令我永求赦之.)
인내가 마음에서 떠나가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이를 어찌 먼 것을 기다려 시험하겠는가? 바로 이 책에서 기술한 앞선 성현들의 인내를 가르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인내의 덕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는 반드시 그 실마리를 자세히 살펴 깊이 그 이치를 헤아려보고, 그 가르침을 굳게 따라 그 이로움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忍離於心, 無事可成, 此何待遠試? 即此鄙篇所述前聖賢訓忍之說, 非有忍德者, 必不能熟察其端, 深思其理, 堅從其箴, 而受其益焉.)
4.44 세상에서 말하는 흉한 재앙이라는 것은 인내의 덕으로 능히 이를 돌려 길한 복이 되게 할 수가 있다. 세상에서 천하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것은 인내의 덕을 통해 귀하고 아낄 만한 물건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것 중에 가난과 군색함, 질병과 치욕, 손실과 손해만 한 것이 없지만, 참을성 있는 사람은 능히 즐겁게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죄의 책임을 보상하고, 죄의 형벌을 대신하며, 그 덕을 늘려 쌓고, 천국을 산다. 그 값어치를 어찌 세상의 진귀한 보배로 논할 수 있겠는가? (凡世所謂凶禍者, 忍德能轉爲吉福. 凡世所賤所畏者, 忍德能變爲可貴可愛物也, 世所賤惡, 無過貧窘疾病耻辱, 損失患害, 忍人能樂受之, 則以償其罪責, 以贖其罪刑, 以增其德, 以市天上國也. 其直豈世間珍寶可論哉?)
그러므로 참을성 있는 사람은 모욕을 영광으로 알고, 미천함을 존귀함으로 여기며, 내쳐짐을 윗자리로 올라가는 듯이 보고, 가난해도 부유하다고 생각한다. 배가 고파도 배부르다고 여기고, 지고서도 이긴 것으로 치며, 흉년인데도 풍년으로 여기고, 역풍에도 길을 간다. 이는 마치 배가 바다 위에서 험한 풍랑을 만났을 때, 파도가 높을수록 하늘에 더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故忍人以侮辱榮光, 以賤微尊貴, 以降黜上昇, 以貧富, 以餓飽, 以負勝, 以荒歲豐, 以逆風行. 如海舟値浪險, 浪愈高, 廼愈近天也.)
4.45 인내는 여러 가지 덕을 지켜주고 여러 가지 악을 막아준다. <성경>에 말했다. “네가 천주께 나아가 섬기려 한다면 모름지기 언제나 두려운 마음을 품고 미리 준비하여, 마땅히 유혹과 재앙에 맞서야 한다.”(참조. 집회 2,1-2)
대개 사람이 선을 행하고 덕을 닦으려면 반드시 세속을 거스르고, 습벽이 된 감정의 공격을 받으며, 악마의 유혹을 막아내야 한다. 그럴진대 이 세 가지는 나의 원수다. 세 가지 원수는 요컨대 서로 합쳐서 나를 공격한다. 세상 사람들은 밖에서 어지러이 막으며 조롱하고 비웃고, 습벽이 된 감정은 내 안에서 충돌하며 어지러이 뒤흔들고, 마귀는 안팎으로 부추기고 유혹하며 공격하여 싸운다. (忍保諸德, 防諸惡, 經曰: “子欲就事天主, 須恒抱畏心, 而豫爲備, 以當誘惑窘迫.” 蓋人欲行善修德, 必須忤世俗, 攻習情, 防魔惑, 則三爲我讐矣, 三響者, 要結以攻我. 世人譏笑撓阻於外, 習情衝勃擾亂於內, 鬼魔煽誘攻戰於內外.)
이는 비유하자면 새를 기르는 것과 같다. 새를 새장 안에 가둬둔다면 그뿐이지만, 새장 문이 열려서 날아가면 반드시 일백 번을 쫓아가서라도 다시 붙잡으려 한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이미 마귀의 계략에 떨어졌다면 할 수 없지만, 결단하여 고쳐서 옮기려 한다면 반드시 일백 번 타일러서라도 다시 붙들기를 구한다. 진실로 인내의 덕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어제 없었던 악을 오늘 다시 행하게 될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가 말했다. “선을 행하려 하면서 인내의 덕이 없는 것은 삼엄한 진陣 가운데 갑옷 입은 군대가 없는 것과 같으니, 능히 다치거나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譬如畜鳥. 閉之樊中則已, 決而飛, 必百追以求復獲. 人爲惡, 已墮魔計則已, 決而遷改, 必百誘以求復獲, 苟無忍德以當之, 昨所去惡, 今復行也. 聖厄勒卧略 曰: “欲行善無忍德, 如在嚴陣中無兵甲, 能不受傷失命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