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복음 제18장에서는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나 자매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툼, 그 구성원들과 구성원들을 위한 권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예수님의 지침을 듣는다.
1.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타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우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하신다. 사실 “죄를 짓거든…”이라는 이 전제는 두 형태인데,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형제’(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실로 적절하지 않은 죄를 지은 형제)와 특별히 “너에게”, 곧 ‘개인적으로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 이런 식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교회 안에서 교회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일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형제들 간의 개별적인 미움이나 갈등 상황에 관한 말씀일 것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후자의 경우를 선택하고 있는데, 전자이든 후자이든 죄라는 것이 형제 관계를 훼손하고 형제적 통교를 가로막는 큰 죄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강조점이 다르다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그 죄로 해를 입은 사람 간에 교정과 화해를 요구하신다. 그렇지만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말고 공동체 차원에서도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키거나 물의를 일으켜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 생활에 장애가 될 수 있으며,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성 안에서도 전체가 어우러져 화합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통교는 서로 각자의 임무가 뒤따르고,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내 옆에 있는 다른 이를 보호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서 문자 그대로 “단둘이 만나”,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교회에 알리는” 식의 법적인 조항이나 순차적인 단계로 읽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레위 19,17 참조. 집회 19,13-17) 하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이런 말씀을 하셨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 있지만, 분쟁의 해결 방법이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법을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공동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긴장, 갈등, 분쟁, 그리고 죄들 안에서도 친교에 대한 원의, 더 잘해보려는 열망, 각자가 서로서로 발휘해야 하는 지혜로운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큰 죄가 발생하게 될 때는 창의성과 슬기로움, 인내, 특별히 자비로 이를 다스려야만 한다.
죄를 꾸짖어야만 하지만, 큰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적절한 기회를 찾아야만 하고, 겸손하고도 분명하게 해야 하며, 그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공개하지 않고 덮어 주어야 하고, “단둘이 만나” 해야만 한다. 다른 형제에게 “타일러주는” 이는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선입견으로 대하지 말고 용서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있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서서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참조. 마태 18,12-14)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바로 그 착한 목자의 마음으로 해야만 한다.
형제가 어떤 조항이나 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어 자신을 해쳤고,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형제를 타이른다. 그 어떤 경우라도 밀을 살리자고 가라지를 뿌리째 뽑아야만 한다는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참조. 마태 13,24-30) 길을 잃은 형제가 생명의 길을 다시 찾도록, 그리고 다른 형제를 화나게 한 사람이 화해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단순한 사실을 요구하시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이 단순한 사실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한다. 다른 형제를 타이르고 교정한다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 어려운 예술이다. 자신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예술이기도 하다.
복음에서는 형제적 타이름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죄를 지은 형제가 그 타이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으며, 복음과는 계속 반대쪽으로만 가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앙심을 품거나 고까움을 품지 말고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형제나 자매들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신명 19,15)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마태 18,16) 하시지만, 이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엄격한 법적 절차를 요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절차가 그 형제를 공동체에서 내치고 배제하기 위한 순서가 아니라, 구하기 위한 절차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다른 형제나 자매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단둘이 만나” 타일렀던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다른 누군가 권위 있는 제삼자의 도움으로 화해의 길을 한 번 더 모색하자는 취지이다.
“타일러라”(마태 18,15) 하신다. 『형제적 타이름은 내가 입은 상처에 대한 반응도 아니고, 뒷담화와도 아주 다르다. 뒷담화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뺨을 후려치는 것이고, 다른 이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격적 살인을 하는 것이다. 많은 이가 형제적 타이름을 나의 반응이나 뒷담화로 곡해한다.
첫째, 사랑과 애덕이 담기지 않으면 그 어떤 형제나 자매의 잘못도 결코 지적해서는 안 된다. 사랑과 애덕이 없이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마취하지 않고 수술하려 드는 의사와 같다. 그렇게 되면 환자가 고통으로 죽게 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려 할 때 사랑과 애덕은 마치 마취와 같은 것이다. 한쪽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사랑으로 얘기해야 한다. 둘째, 중요한 것은 항상 진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공동체 안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진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은 비방이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다. 진실을 사실대로 듣고 사실대로 말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에 사랑이 담겨있다면 훨씬 덜 어려운 일이 된다. 셋째, 형제적 타이름은 겸손을 담아야 한다. 누군가의 결점을 지적해 주고 싶다면, 그 전에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하는 말씀에 따라 내가 훨씬 더 큰 결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형제적인 지적과 권고는 교회의 몸을 치료하는 행위이다. 교회에 금이 갔고, 그래서 그 교회를 수리하고 수선해야만 하는 일이다. 엄마나 할머니가 아이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듯이 부드럽고 아주 조심스럽게, 사랑을 담아 그렇게 우리 형제나 자매를 대해야 한다.
우리가 진실을 얘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고, 거기에 나의 뒷담화를 얹어서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선자가 된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지적할 거리가 생겼다고 느낄 때, 내 마음속에서 뭔가 건수를 잡았다는 생각이나 약간이라도 기분 좋은 희열을 느낀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악마의 장난이 분명하다. 이럴 때는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성령께로부터 오는 생각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우리가 은총과 죄 사이에 서 있는 천사처럼, 또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환자를 앞에 두고 선택의 기로에 있는 의사처럼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내가 오히려 주님 앞에 실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진정으로 사랑과 진실, 그리고 겸손이 없으면 형제적 권고는 실패한 것이고 그 자신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형제적 권고는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형제나 자매를 더욱더 나아지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항상 사랑과 진실과 겸손으로 해야만 한다.(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9월 12일 강론, 영어본에서 가필‧첨삭하여 강론이 아닌 평문으로 번역)』
2. “교회에 알려라”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시도까지도 충분하지 않다면 “교회에 알려라”(마태 18,17) 하신다. 교회, 곧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개입이 다툼이나 타이름에 가장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가 최후의 법정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형제나 자매들이라는 지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도조차 여의치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교회에 알렸는데도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형제의 죄로 해를 입었거나 어떤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보고 그를 타일렀는데도 끝내 듣지 않았더라도 내치거나 파문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형제애의 복원과 화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수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지키기 위한 거리를 두고, 그 형제가 나쁘다고 욕하지도 말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셨고 기꺼이 만나고자 하셨던(참조. 마태 9,11;11,19) 이방인이나 세금징수원처럼 치료가 필요한 사람, 용서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두 가지 책임, 곧 죄를 용서할 것인가 용서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책임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하신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신 매고 푸는 열쇠(마태 16,19)는 화해의 사목을 권위 있게 행사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연결된다. 이 권위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요한 3,17)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에게서도 그렇게 행사되어야만 한다.
성 베네딕토는 훗날 수도회의 규칙을 쓰면서 오늘 복음에 기초를 두고 형제를 교정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더라도 그것이 어려운 상황을 두고 『나이 지긋한 지혜로운 형제를 보내 흔들리는 형제를 남모르게 위로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본받아 잃어버린 양을 당신의 거룩한 어깨에 메고 양의 무리로 다시 데려다 주실 만큼 그 양의 연약함에 동정同情이 극진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도무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할 때 ‘더 큰 방법’ 곧 장상과 모든 형제가 그를 위한 기도를 바쳐,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연약한 형제에게 건강을 주시도록 할 것(참조. 베네딕토 성규 27-28항)』이라 권고한다. 성 베네딕토는 공동체에서 죄에 빠져 뉘우치지 못하는 형제에게 벌을 주게 될 때 공동기도나 공동식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마저도 그 형제를 완전히 내치는 경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치료를 위한 약藥으로서의 벌이었다.(참조. 베네딕토 성규聖規 24항)
이렇게 죄에 빠진 어떤 형제나 자매를 구하는 일은 매우 섬세하고 불편한 일이면서도 인내와 자비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 약하고, 도움과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불순한 이를 돕는 순수한 이들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병든 이를 보살피는 건강한 이들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든 나중이든 우리는 모두 우리의 죄와 그에 따른 현명한 도움, 그리고 참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자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성 베네딕토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nos pariter ad vitam aeternam perducat(베네딕토 성규 72,12)』이라는 구절로 성규를 마친다. 아무도 홀로 구원되지는 못한다. 나 혼자 들어가고 다른 이는 모두 밖에 있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와 구원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그저 외로움과 슬픔의 구원이요 나라가 아니겠는가?
3.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하시며 함께 기도하라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기도가 그저 함께 웅성웅성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나 같은 동작이나 양식을 취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기도가 정말 진지한 기도가 되고, 하느님께서 반기실 전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사랑 안에 “마음을 모아(‘같은 소리, 한 소리’라는 희랍어 동사 ‘심포네오’ συμφωνέω, sým-phonéo, 영어 단어 symphony의 뿌리)”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기도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하신다. 마음들의 심포니가 울려 퍼지는 곳에는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고 말씀하신 대로 은총의 선물인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하신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는 둘이든 셋이든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믿음을 둔 사람들이면 충분하다. 고대 라삐 문서는 『둘 셋이 함께이고 그 사이에서 율법의 말씀이 울리면 그들 안에 하느님의 현존이 있다.(Pirqé Abot 3,3)』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둘이나 세 형제나 자매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사랑하면 그 자리에 당신께서 현존하시겠다고 하신다. 사랑이 살아 있는 자리, 형제와 자매들의 사랑이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아멘!
형제와 자매의 관계 안에서 맺어야 할 것은 맺고, 풀어야 할 것은 풀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생각을 알고 행동하기위해 나를 더 단련하는 기도와 묵상을 매일같이 생활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