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지난주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원에 관해 물으시고 베드로가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가난한 어부 시몬을 반석이요 첫 번째 초석으로 삼아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다.(마태 16,18) 그다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마태 16,20) 하시면서 당신에 관한 다른 내용 하나를 계시하신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오늘 복음은 “그때부터…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루카복음은 “이르셨다”(루카 9,22) 하고 마르코복음은 “가르치기 시작”(마르 8,31) 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마태오복음은 “밝히기 시작하셨다” 한다.
1.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예수님께서 밝히신 내용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셔야 할 필요가 있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마태 16,21)이다. 이렇게 마태오는 수난과 부활의 첫 번째 예고를 세례자 요한이 죽고(참조. 마태 14,1-1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으며(참조. 마태 15,1-20;16,1-12), 갈릴래아 지역을 넘어 북쪽, 이스라엘(소위 거룩한 땅)을 벗어나는 경계선 상으로 이동하셨다가(참조 마태 15,21), 다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그러나 예언자들을 잡아 죽이는 예루살렘(참조. 마태 23,37)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을 향하여 여정을 시작하시는 시점에 배치한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만 한다고 기록한다. 이는 예수님 당신 자신의 필요를 위해 떠나는 여정이라기보다 예수님께서 지신 사명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가셔야만 하는 길이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할 이유는 인간의 역사와 세상에서, 곧 불의한 세상, 의인이 거부와 박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오직 인간을 살리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백성을 두고 권세와 권력을 휘두르는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미움과 배척을 받고 죽음까지 무릅써야만 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가셔야만 하는 그 길은 인간을 위한 길이요 동시에 아버지를 위한 길이다. 인간의 길이요 신神의 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그 길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 예수의 죽음을 원해서 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의 하느님, 그저 하염없이 내어 주고 인자하신 하느님, 때리기보다 맞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끝까지”(요한 13,1) 보여주려고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아드님의 죽음과 고통을 원하시는 아버지라는 왜곡된 하느님 상을 투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이는 세상의 못된 “악인들의 삶과 생각”이고 “옳지 못한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니 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의인을 어찌 못살게 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지혜서의 저자는 이를 간파하여 예언으로 기록해 준다.(참조. 지혜 1,16-2,20)
불의한 세상에서 의인은 오로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 직후에 곧바로 이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여정에서 무려 세 번이나 거듭하여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데(참조. 마태 16,21;17,22-23;20,17-19),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메시아로서 가는 길이 고통과 죽음을 알고 가는 “주님의 종”으로서의 길(참조. 이사 52,13-53,12)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분명한” 의도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고의 본질은 소위 합법적인 종교적 권위에 의한 거부와 배척, 폭력적인 죽음, 인간적인 눈으로만 볼 때 하염없이 실패한 사명이고 생애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고에는 파국 이후에 아드님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곧바로 사흗날에 되살아나리라는 부활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얻어진 열매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예고는 말뿐 만이 아니라 그러한 필연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심이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공개적으로) 하셨다”(마르 8,32)라고 기록한다.
2. “맙소사, 주님!”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고를 하시는데, 교회의 “반석”이요 초석이며 방금 예수님으로부터 “행복하다!”(마태 16,17) 하고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태 16,22) 감히 예수님을 책망하듯이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칭하면서도 그분이 주님이요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말이 엉뚱한 말만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태 26,38) 하시고,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42)라고 기도하시며, “근심과 번민에 휩싸인”(마태 26,37) 모습을 제자들 앞에 보여 주시지 않았던가 말이다. 베드로는 우리들의 고통과 죽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막 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의 말이 광야에서 십자가와 죽음이 없는 메시아의 길, 성공과 권력의 길을 가라고 유혹(참조. 마태 4,1-11)했던 사탄의 새로운 유혹이라고 여기시고, “돌아서서…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직역. 내 뒤로 가라, ὀπίσω(opíso, back) μου(mou, my).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고 말씀하신다. 졸지에 “반석”이 “사탄”이 되고 “걸림돌”이 된다. 이전에 베드로에게 적용되었던 “행복”이 분명한 ‘경고’로 바뀐다. “반석”이라 할지라도 세속적인 생각은 주님의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3.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그래서 마르코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마르 8,34) 한다. 곧 수난과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 못 하고 인간적인 생각만을 하는 베드로를 제쳐두시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ὀπίσω μου)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다. 우리 말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앞서 23절에서 베드로를 꾸짖으실 때 사용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사용하시며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모든 제자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값은 비싸다. 싸구려가 아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스캔들과 시험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치러야 할 대가를 요구한다. 고난받는 종이신 예수님 편에 서기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하는 이들이 치를 대가이다.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고, “박해를 받는” 이들…(참조. 마태 5,1-12)이 행복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자신을 버리고”, 곧 세속적인 나를 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나를 찾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선포하는 교회의 목자들은 절대 십자가를 잊어서도 안 되고 숨겨서도 안 된다. 그것이 목자들이 항상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이유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제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님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저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저 느낌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에 저 자신을 맡깁니다. 설혹 제가 잘못 생각했더라도 저 자신을 맡겼으니 결국은 가야 할 곳에 이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시겠지만 가야 할 곳이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제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할 자격이 영영 주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착한 강도의 십자가라도 같이 지고 싶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외의 모든 인물 중에서 저는 그 착한 강도가 단연코 가장 부럽습니다. 그 강도는 그리스도 옆에 있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동안 자신도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있었으니,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오른편을 차지하는 것보다 더 부러워할 만한 특혜 아닙니까?…(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Attende de Dieu>,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5년, 34쪽)』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아 포기나 자아 부정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장애가 되는 자아를 버림이다. 오히려 예수를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신을 버리고”, 곧 self-denying은 God-facing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나를 버려 예수님 안에서 참된 나를 찾는 과정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게 되면 손에서 씨앗이 떠나가 마치 땅에 씨를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버리는 것이 아니듯이, 열매와 수확을 위해 잠시 내 손을 떠남이다. 그처럼 우리는 자신을 예수님 안에 묻어 열매를 맺는 존재들이다. 흔히 ‘비운다’ 하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비움이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함’임을 잊곤 한다. 채워지지 않은 비움은 빈 깡통일 뿐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불확실로 보이는 미지를 향해 나를 던지는 것, 지금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것들, 익숙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 미지의 앞날에 손을 내밀어 나를 내가 모르는 힘과 섭리가 이끌어가도록 놓아두는 것, 그래서 내 존재의 신비를 깨우치고 나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진정으로 나를 버려 그리스도로 채우지 않으면 인생의 공허한 허상과 실존의 그늘이 만들어 놓은 어둠에 홀로 남아 고립이라는 참담함을 맛볼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가끔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을 오해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 하신 것이지 십자가를 억지로 만들거나 찾아내라는 것은 아니었다.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는 싶으나 그 십자가의 종류를 선택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왕왕 그 십자가의 종류는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저로서는 저의 십자가나 여러분들의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그 어떤 십자가도 아니기를 바랍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1567~1622년)』 그리스도인이 져야 하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없다.
무시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으며 내팽개쳐 버리거나 미워할 수만은 없는 십자가,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 나만이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 그 십자가를 내 어깨에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고통은 기쁨으로 정복되고, 죽음은 생명으로 정복되고, 어둠은 빛으로 정복되고, 미움은 사랑으로 정복되고, 분노는 용서로 정복되고, 절망은 희망으로 정복되고, 십자가는 부활로 정복된다는 사실을 믿기에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나를 따라야 한다.”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따름’의 영성을 산다. ‘따름’이라는 주제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따르다”라는 동사는 4복음서에서 89번 사용되는데, 그중 73번이 직접적으로 예수와 연관된다. 『따름은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 그의 성령으로 인도되는 것, 그를 본받아 사는 것, 그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 그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등을 뜻한다.(J.M.Lozano)』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지혜롭고 권위 있으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진 예언자를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그분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설파한 대로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로마 6,6)하는 삶이며,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는”(에페 4,22) 삶이며,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콜로 3,9)의 삶으로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묵시 14,4)의 삶을 말한다.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목숨”에 관한 말씀을 덧붙이신다. “목숨”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하겠다고 해서 보존되는 것도 아니고, 타인을 무시하거나 타인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자기 보존의 논리나 하느님과 타인을 향한 생명의 역동성을 무시하는 논리로는 절대 살아질 수 없다. 그렇지만 나의 생명을 누군가에게 끝까지 내어놓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우리 목숨의 마지막에 주님 부활의 권능 안에서 그 목숨을 다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하신다.
참된 생명은 세상을 얻는 것, 곧 소유와 같지 않다. “사람이 사람을 결코 구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다. 그 영혼의 값이 너무도 비싸 언제나 모자란다.”(시편 49,8-9)라는 시편 말씀처럼 그 누구도 자기 소유로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언자들이 알려주었고 예수님께서 확인해 주신대로 “사람의 아들”께서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당신의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오실 때, “주님의 날”에 드러날 것이다.(참조. 마태 24,44;25,31) 그때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이 땅에서 행하고 살았던 것에 따라 생명을 주실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오실 분은 사람의 아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신 바로 그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박해 앞에서 반석인 베드로처럼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고 챙기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 한다면,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1-63) 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길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밖으로 나가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아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아 포기나 자아 부정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장애가 되는 자아를 버림이다.”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