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3,44-52(연중 제17주일 ‘가’해)

이번 주일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일명 ‘비유의 장’이라고 불리는 제13장에 모아놓은 일련의 비유 중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세 비유와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에 관한 비유 하나가 합쳐져 4개의 비유를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비유들처럼 오늘의 비유에서도 추상적인 서술을 하지 않으시고 쉬운 이미지를 통해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시고, 마음에 간직하여 일상 안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하신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하늘 나라의 역동성을 이해하도록 하면서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삶을 다스리도록 청하게 하고, 하느님께 빨리 돌아오도록 거듭 촉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복음을 믿고 열광하여 회개하도록 해 준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밭에 숨겨진 보물, 진주 상인, 그물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온다. 밭에 숨겨진 보물과 진주 상인의 비유를 해석하는 데는 『① 보물의 엄청난 값어치, ② 모든 것을 다 파는 전격성, ③ 보물을 발견한 단 한 번의 기회, ④ 다시 숨겨두고 재산을 처분하는 슬기로운 전략적 접근, ⑤ 보물을 발견한 기쁨, ⑥ 마침내 보물을 획득하고 난 후의 삶 등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다.(참조. 게르하르트 로핑크, ‘예수 마음 코칭’, 생활성서, 2015년, 410-415쪽)』 또한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서는 『“밭”, 곧 흙에 묻힌 보물이고 인간이 흙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인간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보물의 발견, 그리고 내 인생의 밭을 일구어야만 나의 인생 안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참조. 안셀름 그륀, ‘예수, 구원의 스승’, 2004년, 분도, 96-98쪽)』

1. “밭에 숨겨진 보물”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라는 말로 첫째 비유를 말씀하신다. 숨겨진 보물, 오랜 세월 묻혀 있어서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아 도둑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보물이다. 그렇지만 우연히 찾아진 보물이다. 밭 주인이 아닌 농부는 밭을 갈다가 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매우 놀라서 은밀하고 신속하게 행동한다. 즉시 그 보물을 그 밭에 다시 묻고, 그가 발견한 보물의 값어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전 재산을 모두 매각한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어마어마한 값어치의 보물이 담긴 그 밭의 소유주가 된다.

비유는 단순하고 이해하기가 쉽다. “보물”에 해당하는 “그것”은 분명하게 “하늘 나라”이다. 조금 더 나아간 마태오복음 뒷장에서 젊은 부자를 두고 예수님께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하신 것처럼 “하늘 나라”는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팔아야 하는 유일한 실제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듣는 모든 이에게 오늘날까지도 “하늘 나라”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야 하고 발가벗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에서 보듯이 내가 가진 소유는 인간 존재를 지배하고, 이는 하느님께서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막는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하시며 산상설교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 있다. 예수님을 따르고 다가올 왕국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는 자기가 자기 인생 안에서 누리는 모든 안전장치와 가진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태 13,11) 하는 말씀에서 이미 들었듯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하늘 나라의 신비이다. 만약에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보물이라는 것을 항아리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가 지고 이고 다니는 것들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들임은 분명하다.

2. “진주 상인”

예수님의 비유가 이어진다. “밭에 숨겨진 보물”에 이어지는 “진주 상인”의 비유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좋은 보석을 사서 큰 이익을 남겨야 하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은 어느 날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5-46) “값지고” “좋은 진주”를 어느 날 발견한 “상인”은 무척 놀라서 어떻게 하면 그 진주를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자기가 파악한 바에 따라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그 진주를 사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한다. 우연처럼 발견한 그 “진주”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가치를 지녔으며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야만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밭에 숨겨진 보물”이든, 또 “좋은 진주”요 “값진 진주”이든, 두 비유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에게 밭을 사게 하고, “찾는 상인”에게 “진주”를 사게 하는 “보물”이요 “진주”이다. 밭의 보물과 진주는 밭을 일구는 사람과 진주를 찾는 상인을 움직여 밭을 사게 하고 진주를 사게 한다. 두 비유에서 이 두 사람은 정확하게 동시에 같은 행동을 한다. 이는 “하늘 나라”라는 헤아릴 수 없는 은총 앞에 선 인간의 행동이고 반응이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선물이자, 은총이지만, 은 쟁반에 담아 사용할 수 있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동성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찾아야 하고 걸어야 하며,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찾는 태도는 발견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소중한 보물, 곧 예수님의 인격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려는 열망으로 불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숨겨진 보물이요, 큰 가치를 지닌 진주이십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의미로 가득 채워주시고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주시는 근본적인 발견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비유들에서는 하느님의 왕국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팔고 완전히 발가벗도록 요청하는 일종의 급진주의radicalism적인 내용의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전격성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할 때 처음에 1회적인 사건으로 한 번만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각각 다른 상황에서, 그리고 인생의 여러 매듭 안에서 이러한 전격적인 포기를 계속하고 쇄신해야만 한다. 우리 인생 길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처음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살아가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성향과 충동은 항상 우리 인생 길에서 하느님의 지배와 통치를 위협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를 모두 팔고 처분해야만 그 나라를 얻을 수 있다. 하늘 나라를 위해서는 하느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발가벗겨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 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일생 내내, 매일매일, 매 순간, “팔고, 처분”해야만 하는 기나긴 여정이다. 이 때문에 사막의 현자였던 교부 팜보Pambo는 『죽는 순간까지, 마침내 우리의 인생마저 벗으라는 요청 앞에아멘!’이라고 응답할 때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라고 조언한다.

이렇게 근본적인 포기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한다. 이는 아마도 과거보다도 너나 없이 웰빙을 외치는 현대인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 나라의 은총, 복음이 전해주는 기쁜 소식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은총 안에서 이를 살 수 있게 된다. 이 은총은 우리 힘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고 원할 수도 없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바오로 사도처럼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쁨으로 충만하여서만 이 은총을 완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농부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마태 13,44)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기뻐하며”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모든 것을 떠났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보물을 발견했다’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판단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또 그 누구에게도 우월감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단순하게 보물을 발견한 사실을 기뻐할 뿐이다.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아닌가는 내가 무엇인가를 버리고 포기하며 떠났다는 식의 ‘이탈’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가 아닌가일 뿐이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소유나 소유로부터 이탈이라는 충동이 아니라 기쁨의 충동이다.

3.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

세 번째 비유이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7-48) 비유 끝에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9-50) 하고 비유를 설명하신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때가 있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구분하고 식별하며 분리하는 때가 있다.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도 있고 나쁜 물고기도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20)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예수님에 의해 “낚인” 남녀로 이루어진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정말 순수하고 의로운 이들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어서 그 안에 좋은 물고기가 있고 나쁜 물고기가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구분과 식별, 그리고 분리의 때가 있을 것이다. 하늘 나라에 온전히 참여하는 사람과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불구덩이에 던져…울며 이를 갈” 사람이 분리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에 놀라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굳이 이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말씀을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기는 싫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 번째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주님께서는 그 누구도 영원한 죽음에 처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지만,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이를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자비의 하느님이시고 자비가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신경信經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라고 고백하듯이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늘 나라의 은총, 하느님 무상의 선물이요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같은 취급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당신 사이에 주고받은 말씀의 결론으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고 물으신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예!’하고 대답하자…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52)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 당신의 말씀을 깨달은 자가 마치 큰 “보물”, 곧 하느님의 선물인 “지혜”(참조. 지혜 8,17-18 잠언 2,1-6),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있는 지혜를 발견”(지혜 7,14)하게 된 율법 학자와도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지혜”라는 하느님의 은총인 보물을 얻게 된 제자는 구약의 모든 말씀과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이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서 “옛것”과 “새것”을 꺼낼 줄 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2,3) 하는 말 그대로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은 이 보물을 단순하게 그리워하며 찾는 데 지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거듭 확인하며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이 우리의 모든 것과 추구를 좌지우지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위해 좀 더 시간을 내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도 그 보물을 얻기 위한 우리의 전진은 그렇게도 더딤을 마주하게 된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느낌, 우리의 발걸음 안에 이미 우리 안에 사시는 그분이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새롭게 우리 마음 안에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시고,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 하시며,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시면서 눈을 활짝 뜨라고 말씀하신다. 아멘!

***

짧지만 아름다운 네 개의 비유

-마태 13,44-52의 거룩한 독서

마태 13장에는 하늘 나라에 대한 일련의 비유들이 등장하는데, 짧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들입니다. 오늘의 네 비유 앞에 유명한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나옴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우선 기도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천천히, 여러 번, 주의 깊게 읽어주십시오.

첫째 비유는, 농부가 밭에서 발견한 순은 보물의 비유입니다. 둘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의 비유입니다. 셋째는 그물의 비유요, 넷째는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의 비유입니다. 앞의 두 비유와 뒤의 두 비유는 내용상 서로 묶을 수 있습니다. 앞의 한 쌍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치우는 사람의 ‘결단’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뒤의 두 비유는 이렇게 하늘 나라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사람의 ‘책임’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즉, 하늘 나라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불가佛家의 용어로 표현해 보자면, 앞의 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위로는 진리를 구함)’에 관한 것이고, 뒤의 것은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함)’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각 부분의 내용을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보물의 비유

하늘 나라를 얻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치운다? 너무 엄청난 요구일까요? 만일 그렇게 느껴진다면, 내가 발견했다고 믿는 것은 아직 참된 ‘보물’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내 사랑!’이란 말 대신 자주 ‘내 보물tesoro mio!’이란 표현을 쓰더군요. 내가 참으로 하느님을 ‘내 사랑-보물!’(의무가 아니라)로 알아들었다면, 슬픔이나 갈등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사로잡게 되어 있습니다. 기쁨은 하느님의 향기입니다. 그분이 계신 곳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는 반드시 우울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은 결단을 가로막지만, 기쁨은 모든 중요한 결단의 동인動因이 됩니다.

부자 젊은이에게 예수님과 그분 복음은 보물도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는 말씀에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9,21-22). 반면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엽전 두 닢뿐이었지만, 가진 것 전부를 던져 넣었습니다(루카 21,1-4)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 ‘전부’는 사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였고, 자기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미친 짓이라고요? 진짜배기 사랑은 원래 사람을 맹목으로 만드는 것 아니던가요? 이것은 정확히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1코린 1,18-25 참조). 십자가야말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얼빠진 하느님, 바보 같은 하느님의 얼굴이니 말입니다. 이 사랑을 알아들은 이가 어떻게 덩달아 바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발견한 보물을 다시 “숨겨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보물이 그에게 얼마나 진짜 보물이었던지, 혹시라도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발견’만 가지고는 아직 보물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닌 모든 것을 팔아 치워서 진짜로 자기 것으로 사버리기까지, 보물은 아직 자기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이렇게 해야 하느님은 온전히 내 것이 되고, 나는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진주 상인의 비유

위의 비유가 은총의 무상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 편의 갈망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인’은 ‘보석상’이라는 직업에서 훈련된 지식을 토대로 값나가는 물건을 ‘찾아다니는’ 사람입니다. 복음서에서 아주 많은 경우 청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네가 찾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데,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진실로 찾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하고, 나아가 사람의 진정한 갈망을 증폭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정작 마음으로는 딴 것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꽃’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입에서는 꽃 향기가 났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노래한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라고 말할 때 우리 입에서 그분의 향기가 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2코린 2,14 참조).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많은 일들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 실제로 찾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면, 결코 ‘값진 진주’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결코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사지 않습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내 마음이 지금 어디 있는 알고 싶으신가요?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좀 더 알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애착하고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두 비유가 숨긴 ‘칼’이 바로 그런 도전입니다. ‘포기’했노라 자처하는 신앙인들(특히 수도자들)의 얼굴이 흔히 그다니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제자의 여정은 ‘억지춘향’의 발걸음이 아닐 터입니다. 이 비유들을 잘 읽어보면, 포기해야 기쁨이 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기쁨,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은은히 샘솟는 성령의 기쁨이 없다면, ‘음산한 성인’의 우울하고 생기없는 표정이 우리 얼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주’는 아름다워서 진주입니다. 오직 아름다운 것만이 사람 마음을 움직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 갈망은 허기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허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갈망의 대상이 무한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물의 비유

그물은 낚기 위한 도구입니다. ‘낚는다’는 말에 잠시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란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낚는다는 말은 ‘홀린다’, ‘마음을 빼앗는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아름다우심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주님의 그물에 낚인(혹은 잡힌) 사람입니다. 낚인 사람, 잡힌 사람만이 이제 다른 사람을 낚고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 ‘사람 잡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위의 두 비유가 ‘낚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 그물 비유는 ‘낚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요. 처음부터 심판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고기를 다 거두어들인다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예나 지금이나 눈뜨고 경계하지 않으면 자비의 하늘 그물[천망天網, <노자> 73 참조]이 아니라 윤리적 완벽주의의 인간 그물에 걸려 질식하기 쉽습니다. 이미 가라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심판은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잠시 지나갈 지상 생활의 순례자인 우리 모두는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똘레랑스(관용)’의 서구적 휴머니즘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각자가 서로의 형제요 동료임을 기억하라는 이야기, 우리 모두가 신비로이 연대된 같은 그물망의 코임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초대입니다.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의 비유

“너희는 이것들을 깨달았느냐?”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질문입니다. ‘다’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은총의 무상성도, 갈망의 필수성도 다 중요합니다. 정의의 분별력도 자비의 무조건적 힘도 다 중요합니다. 마치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술로 변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이 신약으로 ‘회개’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도 신약도 다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으면 “이것들을 다” 깨닫는 것입니다. 만일 이 질문에 제자들처럼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교사”(52절)입니다. 그래서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처럼 큰 자유로써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말씀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살인검殺人劍], 치유와 해방의 한 말씀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할 것입니다[활인도活人刀]. 이것이 ‘십자가의 말씀’(1코린 1,18)의 기능으로, 성령께서 우리 손에 쥐어주신 “쌍날칼”(히브 4,12 묵시 1,16;2,12)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독서를 통해 이 칼에 맞아 죽었다 살아난 사람만이 이 칼을 제대로 쓰는 법을 배웁니다(히브 4,12 참조).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늘 나라의 제자’입니다. 하늘 나라의 ‘곳간’에는 우리를 충만한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며 주님께서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해 주실 성령(요한 16,13 참조)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씀”으로서, 말씀의 곳간에서 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이것도 저것도 다 꺼내어 엮는 미드라쉬 독서의 주역이십니다. 오리게네스는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1코린 2,13)하는 것이 사실은 미드라쉬의 독서법을 뜻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필로칼리아>Ⅱ,3),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우리가 부여받는 능력이 바로 이것입니다.(이연학,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거룩한 독서의 원리와 실천, 성서와함께, 2010년 6쇄, 127-135쪽)

2 thoughts on “마태 13,44-52(연중 제17주일 ‘가’해)

  1. “은총은 우리 힘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고 원할 수도 없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 묵상합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