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말경 예루살렘 신자들은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을 그리스도 구원 사업의 완성으로 여기며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함께 경축했다. 반면 예루살렘 외 지역에서는 4세기부터 주님 승천 대축일을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 따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처럼 주님 승천 대축일은 원래 부활 대축일 이후 40일이 되는 여섯 번째 목요일이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해 이날이 공휴일이 아닌 나라에서는 그다음 주일(=부활 제7주일 * https://blog.naver.com/kbenji/223073195129 참조)로 옮겨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낸다. 40일째의 근거는 사도행전 1장 3절로서 예수님 부활 후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한편 초창기 교회는 유다인들이 누룩 없는 빵을 먹은 후 50일 동안 축제를 지냈던 전통에 따라 예수 부활 대축일 후 50일 동안을 부활 축제 기간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부활 후 40일째에 지내든,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내든, 주님 승천 대축일은 아버지의 영광을 입어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날임에 틀림이 없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요한 13,1)에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옮겨가신 것으로 전해진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1)라는 루카복음 마지막 장면의 기록이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등의 사도행전 도입 부분의 기록에서 직접적인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고,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끝부분에는 직접적인 기술이 없다. 그 대신 마르코복음은 종결 부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라고 짤막하게 기록한다.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기록은 전해주지만,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오르셨다는 기록은 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 복음의 끝에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에 관해서 주님께서 갈릴래아에 있는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셨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을 아주 짤막하게, 그것도 부활하신 주님의 기사로서는 유일하게 남겨놓을 뿐이다. 만일 마태오 복음사가가 복음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창세기…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참조. 마태 1,1.23)』 하는 의미를 담아 복음 기록을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했다면, 맨 마지막 부분에서도 마땅히 마태오 본인이 이미 익히 알고 있었을 구약의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2역대 36,23) 하는 역대 왕들의 실록이라고 할 수 있는 역대기 마지막 구절을 암시하는 듯이 기록하였을 것으로 가정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정하에서 부활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라는 구절을 읽으면 그 의미가 깊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인간 구원 역사의 완전한 성취를 그렇게 기록한다.
1.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수난을 당하신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음식을 잡수시면서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고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모두 흩어져 도망을 갈 것이고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태 26,32) 하고 말씀하시며 제자들 몇몇과 함께 “올리브 산”으로 가신다.(마태 26,20-35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가 오자 모든 제자는 정말 도망쳐 흩어졌고, 수난의 어둔 밤, 죽음과 무덤의 밤이 이어진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 복음 마지막 장에서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마태 28,1) 빈 무덤을 발견하였고, “천사”를 만나 “그분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되살아나셨다.”(마태 28,6)라는 전언을 듣게 된다고 기록한다. 이어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이 “복음”을 전하러 “제자들에게 달려갔는데”, “갑자기” 마주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이 이미 그녀들에게 전해준 내용을 다시 되풀이하시면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신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으로 열둘이 아닌 열하나가 된 제자들에게 미리 예고하신 곳이었고 제자들을 다시 만날 곳이었다.(참조. 마태 28,1-10) 완벽한 숫자인 열둘에서 하나가 빠진 불완전한 숫자 열하나이다. 배반자 유다를 뺀 숫자이고 아직 마티아 사도가 채워지지 않은 숫자이다.(사도 1,15-26 참조) ‘불완전’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완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갈릴래아로 떠난다. 우리 역시 불완전한 존재이면서도 완전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소명을 산다. 복음을 살면서 불완전이 완전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 제자들을 ‘파견된 자들’이라는 뜻의 ‘사도들’이라 하지는 않는다. 천사는 “제자들”(마태 28,7)이라 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형제들”(마태 28,10)이라 부르신다. 이는 이들이 아직 사도의 직무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예수님께서 애초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당신과 함께 제자들과의 생활을 시작하셨던 바로 그 땅에 제자들을 다시 한번 불러 모아 새롭게 시작하신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어 인류를 위한 『갈릴레오』가 되어야 할 땅이고,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참조. 마태 4,12-16 이사 8,23-9,1)로서 복음화가 되어야 할 땅이었다. 유다인의 처지에서 보면 불결한 곳이었고,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던 땅이었으며, 여러 민족이 뒤섞인 곳이었고, 예배와 신앙의 중심지인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실로 갈릴래아는 복음화와 선교를 위해 탁월한 선택지였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모두 끝난 것처럼 느껴졌던 암울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이 땅에서 다시 한번 부르심을 받는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약속 장소가 “산”(마태 28,16)이라 한다. 마태오복음에서 “산”은 항상 신학적인 의미를 담은 장소이다. “산”은 하느님께서 반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 당신 백성과 만나시려고 했던 장소이며,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을 포함한 소위 ‘산상설교’라고 알려지는 긴 말씀(마태 5,1-7,29)을 건네주셨던 곳이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했던 자리이다.(마태 17,1-8)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그분을 마지막으로 뵈었으므로 갈릴래아의 높은 “산”에서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된 제자들은 엎드려 경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8,17)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인들이 무덤에서 돌아와 전해준 말들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일절 전하지 않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다른 여타의 표징이 있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된 제자들이 그 어떤 말도 없이 그저 “엎드려 경배하였다”라고만 할 뿐이다. 그다음에는 곧바로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라는 말을 덧붙인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의심은 계속된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의심은 미움과 불의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승리를 의심하는 것이고, 억압과 죽음에 대한 해방과 생명의 승리에 대한 의심이다. 그러나 결국 제자들의 의심은 의심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의심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전도하면서 극복될 것이다.
제자 중 몇몇은 부활 신앙에 이르렀고, 다른 몇몇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면서 의심하였다. 신앙은 어떤 환상이나 비전이 아니라 의심에 대한 계속된 극복의 과정이다. 그 승리는 “경배”하면서, 무엇보다도 사랑하면서 얻어진다. 마태오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선뜻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승천”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믿음과 포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랑의 관계로 실현되는 힘든 앎을 기록한다.
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다가가 이르셨다.”(마태 28,18) 그들이 도망쳤던(마태 26,56) 것에 대해 아무런 꾸지람도 없이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하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불러올려져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영광을 계시하고자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하신다. 우리를 흔들어대는 말씀, 믿음으로써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다. 오직, 하늘과 땅의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 예수님께서는 힘과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러나 그 힘과 능력은 누가 준 것도 아니고 원하신 것도 아니었다. 일찍이 “유혹자”인 악마가 예수님께 제안하였을 때 그것을 거부하셨고(참조. 마태 4,8-10),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으신 것이었다. 우리의 주님,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은 다니엘 예언서가 오래전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3-14)라고 기록했던 바로 그분이다.
구약에서는 하느님만이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고, 보이지 않는 세상과 보이는 세상의 주님이시며, 온 우주의 임금이시다. 이제 하느님의 그 모든 권세가 예수님의 영광 안에 나누어졌음이 계시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가시적이고 눈에 보이는 식으로 예수님의 승천을 기록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계시한다. 하느님의 통치 안에서 하느님과 동등하게,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요한 1,18)이라고 요한 복음사가가 기록한 분을 마태오는 이런 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분’,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시는 분이라고 예수님을 찬양하며 고백한다. 이런 고백과 찬양이 신비를 다 밝혀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예수님의 승천을 읽어내는 것보다는 오히려 주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신가, 예수님께서 참으로 우리 역사의 주인이신가, 예수님께서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분께만 의지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3.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느님께서 이처럼 예수님께 “권한”을 주셨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마태 28,19)라고 하신다. 여기서 “가서(=가다)”라는 동사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땅과 공간을 점유하고 정복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모든 문화에, 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남녀에게, 열린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구세주가 약속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오신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아버지께서 명하신 이 사명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성실하게 수행하셨고, 이제 당신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사명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유다인들과 이방인을 가르던 모든 장벽과 역사 안에 세워졌던 모든 장벽이 무너뜨려져야 한다. 바야흐로 모든 인간이 “복음”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 “명령”인 그 “복음”은 다른 이들에게는 명령이 아니라 제안이며, 번지르르한 말의 선전이 아니라 증거이고, 선포되기 위하여 우리 안에 먼저 살아져야만 하는 말씀이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세례를 주고…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19-20) 하시는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건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세례”는 교회 공동체 건설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사제직司祭職과 예언직預言職(맡길/미리 예預), 그리고 왕직王職을 공유하고 나누어 받는다. 사제직은 매일 매일의 생활을 성화聖化하라는 사제직이요, 예언직은 내가 매일 읽는 말씀이 나를 읽어 나를 살게 하시는 예언직이며, 왕직은 가시관을 왕관으로, 또한 십자가를 깃발로 삼아 섬기는 왕직을 말한다. 우리는 그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을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신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명령”을 살아서 사람들을 가르친다. 제자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 제자는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통교 안에 잠긴다. 제자는 먼저 파견된 자들, 곧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께서 복음을 살라 명하신 대로 이 주어진 은총의 삶을 산다.
사실 “복음”은 가르칠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몸으로 살아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작은 양 떼”(루카 12,32)였던 갈릴래아의 제자 공동체가 살아야 할 사명이었다.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할 공동체의 작음을 보지 않고 그 사명을 수행하라 하시는 분의 엄청난 약속을 보아 그것을 믿고 살아서 선포해야 할 사명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두어야 할 예수님의 약속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 간에 새롭게 맺어진 결정적인 계약이다. 다른 말로 ‘나는 너희의 하느님, 너희와 함께 하는(임마누엘) 하느님!’이다. 마태오복음의 이 마지막 구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우리의 신앙이고 믿음이다. 아드님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아버지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 1,23 이사 7,14) 하셨다. 마태오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결정적으로 충만하게 성취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하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우리 각자에게 당신 복음을 “지키고” 살라 하신다. 아멘!
그러고 보니 오월은 정말 영광스러운 달이다; 성모님의 달이기도 하고, 또한 주님 승천 대축일과 이어 성령 강림 대축일을 동시에 기뻐하는 잔치 중의 큰 잔치이니까.
“주님을 향한 믿음과 포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랑의 관계” 마음에 와 닿으며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