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미루다가 2021년에야 무관중으로 치러진 동경 올림픽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던 시몬 애리언 바일스Simone Arianne Biles(1997년~)라는 미국 국적의 Z세대 체조 선수가 있다. 키 142㎝의 바일스를 호칭할 때는 농구의 마이클 조던, 야구의 베이브 루스, 골프의 타이거 우즈 등에게만 허락되는 ‘역사상 최고(G.O.A.T·Greatest Of All Time)’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적수가 없는 최고 선수로 여겨지는 바일스는 2016년 하계 올림픽 체조 개인 종합, 도마, 마루 금메달리스트이다. 또한, 세계 체조 선수권 대회 개인 종합에서 세 번, 마루에서 세 번, 평균대에서 두 번 우승하였고, 전미 체조 선수권 대회(USA Gymnastics National Championships) 개인 종합에서 네 번 우승하였다. 열아홉 개의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대회 메달로, 바일스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딴 체조 선수이다.[1] 이처럼 화려한 경력과 수식어가 붙는 바일스는 많은 사람의 기대 속에 6관왕을 내다보며 출전했던 2021년 동경 올림픽에서 첫 경기 후 느닷없이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심경을 기술한 후 4경기를 기권하고, 마지막 평균대 결선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으며 경기를 마쳤다.
모든 사람의 기대를 모았고 몇 년을 준비했던 올림픽에서 용기 있는 기권 결정과 함께 그녀가 남긴 말은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과 함께 감동적인 격려를 자아냈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쉽지 않은 하루,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잘 버텼다. 정말 가끔 온 세상의 짐을 내 어깨에 짊어진 것 같이 느낀다. 그것을 털어 내고 그런 중압감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빌어먹을 때로는 어렵다 하하하! 올림픽은 장난이 아니다! 그렇지만 가족이 영상으로 나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 그들이 나에게는 온 세상을 뜻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의 이러한 사연을 접한 사람들은 그녀를 탓하기보다 인생이란 그렇게 메달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아낌 없는 격려를 보냈다. 그녀를 격려했던 저명한 이들 중 역시 같은 세대인 캐나다의 팝 가수,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사진, 1994년~)가 있다. 비버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자신도 월드 투어를 중도에 그만둔 경험이 있다면서 『아무도 당신이 마주한 압력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비록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인 걸 잘 알지만, 나는 기권하기로 한 당신의 결정이 자랑스럽다. 온 세상을 다 얻더라도 당신의 영혼을 잃게 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때로는 우리의 ‘No’가 ‘Yes’보다 강력하다. 당신이 사랑했던 것이 당신의 기쁨을 앗아가기 시작한다면 한걸음 물러나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라는 글을 남긴다.
경쟁만을 위해 스포츠에 임하는 많은 이들의 정신 건강을 염려하는 가르침에 교회도 소홀하지 않다. 한 예로, 교황 비오 12세는 1952년 11월 8일 운동선수들과 스포츠 지도자들에게 연설하면서 운동 경기의 적절한 균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체조와 스포츠의 올바른 연습에 기쁨을 두십시오. 그 유익한 흐름을 사람들에게 가져와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점점 더 번성하고 육체가 영혼을 섬기며 활력을 얻도록 하십시오. 무엇보다도…긴장감과 함께 자신을 흥분하게 하고 몰입하게 하는 체조 스포츠 활동 중에도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영혼, 양심,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하느님입니다.』[2]
이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시몬 바일즈는 며칠이 지난 인스타그램에서 다시 『저는 넘치는 사랑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경험으로 나 자신이 제가 이룬 성취나 체조 선수 이상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진심으로 자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젊은 Z세대의 일원답게 메달보다 나 자신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용기 있는 기권으로 웅변한 셈이다.(그림 캡쳐. 오마이뉴스, 21.07.31)
올림픽, 승리가 아닌 참가의 의의?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탱(1863~1937년)은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가 아닌 참가하는 데 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닌 노력이다.』라고 말했다. 올림픽에는 여전히 메달을 따지 못해도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서로 박수와 격려를 보내며 함께 울어주는 감동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올림픽에서 끝내 메달은 없었지만, 우리가 우리 배구팀의 열정을 얼마나 국민적으로 응원했던가?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 오늘의 올림픽이 그런 말과는 이미 큰 거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경쟁과 점수, 순위와 메달은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산물이 틀림없다. 올림픽의 중심어휘는 경제적인 효과만을 따지면서 ‘경쟁’, ‘스포츠 권력’, ‘스포츠 산업’,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올림픽 경기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점을 참작하더라도 더는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요 화합의 한 마당만은 아니다. 승자의 눈물이건 패자의 눈물이건 이미 반성이나 감사의 눈물이 아닐 수 있다. 이런 눈물이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고 살만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끝없는 경쟁은 욕심을 부추기고, 욕심은 많은 거짓과 사회적 혼란, 때로는 폭력을 불사하며 인간 영혼의 피폐를 낳는다.
그래서 『‘올림픽이 과연 가치가 있는가’ 하는 논쟁에도 불이 붙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국가 경제 사정이 어려운 판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올림픽에 투입할 대의명분이 있는가 하는 논쟁이다. 영국은 2020년 도쿄올림픽에 32개 종목에 걸쳐 3억 4500만 파운드(5175억 원)의 예산을 쏟아부었고, 2024년 파리올림픽에는 43개 종목에 3억 5200만 파운드를 향후 4년간 투입할 예정이다.…(과거) 올림픽은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신념에 찬 소수 개인들’의 경연장이었으므로 영국은 역대 올림픽에 국가적인 뒷받침도 없었고 종합순위에 연연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메달 숫자를 가지고 국격 운운하는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어른 옷을 입은 아이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과는 다르다고 자부했다. 영국은 그런 식으로 국격을 높일 필요도 없을 만큼 이미 높은 국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은 나라들이나 메달을 따야 위대한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특유의 ‘태연하고 냉소적인 오만’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오만은 오래가지 않았다.…개인의 인성 개발과 성취감을 위한 고상한 스포츠맨십을 지향하던 영국 체육계는 올림픽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거의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경험했고 이를 무조건 따라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결과를 위해 능률을 우선으로 삼는,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성과주의가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 했다.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조건 승리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영국에서는 이렇게 엘리트 체육을 위해 퍼붓는 돈을 일반인 체육 진흥을 위해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으냐는 논쟁이 ‘영국체육’ 출발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한 영국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영국인은 운동을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운동하는 것보다는 보기를 더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거액의 돈을 써서 메달을 더 따는 것보다는 그 돈으로 국민 건강에 관련되는 운동에 치중하면 더 좋을 듯하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3]
꼭 경쟁교육이어야만 하는가?
다소 긴 지문이지만, 이를 인용하는 것은 이것이 어쩌면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걸어온 부정적인 진화과정이나 제도가 현대 올림픽과 너무나 흡사한 점을 지녔다는 생각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입시 교육을 통한 경쟁교육의 폐해를 개탄하면서 자녀 교육을 위해 그런 교육 제도의 불편이 없는 국가를 찾아 이민하지만, 이민하여서까지도 나의 자녀만큼은 특별해야 하고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터를 잡은 곳에 또 다른, 작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아닌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자체에 함몰된다. 그렇게 하여 명문대에 진학하는 한국 아이들의 우수성(?)은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적어도 미국과 같은 곳에서 진학이나 졸업 후에 한국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상당히 보편화된 정설 중 하나이다. 교육 시스템의 근본 목적은 학생들의 학습을 돕는 일이고, 학습과 배움은 경쟁을 통한 점수 매기기나 획득이 아니라 우리가 어릴 때 놀던 강강술래, 숨바꼭질과 같은 놀이이자 기쁨이어야 하며, 학생과 학생 간, 교사와 학생 간 협력이고 협동이며 동반으로서, 그 결과는 자기 인생의 성취이고 실현이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 기쁨을 동반하는 신념에 찬 열성적인 교사가 사회적 신뢰를 받으면서 교육자로서의 자존감과 전문적 자율성을 존중 받고 학생들의 학습을 도울 수 있으면 그것이 교사가 살아야 할 소명이고, 자녀를 둔 부모의 기도이다.
교육은 국가의 미래이므로 교육의 부정적인 폐단을 막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년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하고 있다. 특별히 응용력과 활용성까지 고려하는 평가에서 거의 항상 최고이거나 상위권을 기록하는 핀란드의 사례, 등수·사교육·영재교육이 필요 없는 교육을 위해 국가가 교육비 전체를 부담하면서 지향하고자 하는 ‘협동교육’, ‘평등교육’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4] 미국 제일의 ‘경쟁 비판자’라고 불리는 알피 콘Alfie Kohn(1957~)은 이를 ‘협력학습’이라며 역설한다.[5] 문맹률 1% 이하의 최고 국가인 우리나라도 PISA의 평가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지만, 문해력(literacy) 측정에서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점을 고백해야만 한다.[6]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큰 비용을 부담하면서 공교육을 통해 교육을 ‘관리’하려는 데에는 한편에 교육이 국가의 경제 번영과 경쟁력 우위를 위해 결정적 요소라는 전제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학교의 근본적 임무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인적자원’ 양성이 아니다. 교육은 시험 성적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취를 위해 학습을 촉진하는 일이다. 학교의 시스템은 깔때기와 같이 소수 엘리트 추출을 위해 다수 불량품을 용도 폐기하는 공장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개인이 ‘정직하고 바른 시민’[7]으로 서로 협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기본과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돕는 복지 시스템이다.
수능 1점으로 배우자의 얼굴이 결정되고 소득과 미래가 결정된다는 점수와 등수의 경쟁교육을 걱정하며 ‘교육개혁’을 이야기하고 ‘교육혁명’을 논의하면서도, 말 그대로 공론空論으로 남고 마는 것처럼 느끼는 우리에게 이러한 내용은 과연 요원한 꿈의 얘기일 뿐일까? 시몬 바일즈처럼 자기 최선에 만족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 애들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해 주면 안 되는 것일까?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나 마련해주신 각자 인생의 고유 계획이 있게 마련이니 많은 방황을 겪지 않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이를 찾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서 자신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살아야만 행복하다고 얘기해주면 안 될까? 우리 애들은 ‘그렇게 말해 주는 가족이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면 정말 안 되는 것일까? 경쟁교육이 아닌 평등교육, 성취교육, 협동교육, 협력학습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에게는 이런 얘기들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인 세미나 때나 논문에서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이어야만 할까?
자기 고유성과 자존감을 북돋우면서 어린 시절부터 경쟁이 아닌 협력과 협동으로 배우고 가르치며, 상호 의존 속에서 너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며 나의 성공이 너의 성공일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며,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사회 구조를 함께 사는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아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두려움’의 끈을 끊기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두려움에서 결코 풀려날 수 없다.(2021년 11월 <살레시오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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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위키백과 [2] https://aleteia.org/(2021년 7월 30일) [3] 권석하, 영국서 이는 ‘올림픽 엘리트 체육’ 회의론, 주간조선 2670호, 2021년 8월 9일 [4] 참조. PISA 2018 results / 학원·등수 없는 핀란드, 평등교육이 ‘최우수’ 비결(한겨레, 2008년 2월 15일) / 북유럽 핀란드 교육의 5가지 다른 점(www.nordikhus.com) [5] 알피 콘, 경쟁에 반대한다, 민들레, 2019년, 306-349쪽 [6] 정희진, 문해력 ‘최하위’ 한국, 한겨레, 2021년 5월 11일 / 송영훈, 한국인 문해력 OECD 최하위?, Newstof, 2021년 3월 26일 [7] 돈 보스코의 교육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