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위해서는 일단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여행을 위해 그다지 준비할 필요도 없어 보이고, 또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이든 그때그때 금방 할 수 있기 때문에 뭐 그리 거창하게 준비할 것까지야 있느냐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진짜 어떤 여행을 준비하려면 충분히 시간을 갖고 서두를 필요가 없는 여유가 있어야만 한다. 여행한다는 것과 달린다는 것은 상반된 실제이다. 오직 여행하면서, 그러니까 길을 닦고 길을 만들어가면서, 아름다운 것도 보고 추한 것들도 보면서,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1875~1939년)가 놀랍게 표현한 대로 『여행자여, 길은 없다.…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라는 것을 실감한다.
참된 여행은 누군가와 대화 중에 오간 한 마디, 벽에 걸린 어떤 그림 한 점, 낡아빠진 잡지일지라도 우연히 우리의 기억과 사랑을 되살려주는 몇 장의 사진들…, 이런 다양한 충동, 호기심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에 불꽃을 일게 하는 그런 것들 안에서 신비스럽게 탄생한다. 그럴 때 떠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 그것을 계획하고 마침내 떠나기로 결정한다. 여행자만을 위해 고독 속에 남겨진 맛을 느끼기 위해 혼자 떠나든, 혹은 다른 이들과 어울려 함께 흥분하고 함께 모험하기 위해 그렇게 떠난다. 때로 여행에는 나름대로 떠나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떠나야만 한다고 하는 생각뿐일 때도 있다. 자동차 여행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멈추고 싶을 때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라도 멈출 수 있고, 비싼 비용이나 원치 않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런 여행을 좋아한다. 어떤 목적지를 설정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여행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
길을 가면서는 보아야 할 예술 작품이 있고, 방문해야 할 유적지가 있으며, 맛보고 싶은 맛집이 있고, 잠시 생각할 거리를 위해 멈추어야 할 공간도 있다. 여행에서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뜻밖의 놀라운 사람을 만나 일정과 여정을 바꾸어가면서 어떤 곳에 더 머무르게도 되고, 예상하지 못한 몸짓과 일이 생겨나기도 한다. 여행은 모험이어야만 하고, 누군가를 알게 되는 가능성을 담아야만 하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는 ‘프티 존petit jaune(작은 노랑이라는 뜻)’이라는 별명을 가진 파스티스pastis를 마시고, 그리스에서는 터키에서 유래되었다는 라키raki를 마시며, 요즘에는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붉은 빛 마티니를 마셔야만 한다. 자동차가 여행에 도움이 되지만, 조금은 걷기도 해야 하는 것이 여행이다.
나의 여행 때 나는 확실히 짐을 최소한으로 꾸린다. 보통으로 짐은 40년 가까이 나를 따라 중국, 자이레, 캐나다, 터키, 모로코, 이집트를 동반했던 검은 가죽 가방이다. 맨날 같은 가방을 보는 친구들은 웃지만, 내게는 그 가방이 소중하다. 캘커타의 공항 바닥과 페트라 사막의 모래 구덩이에서는 나의 베개가 되어주었고, 아침이나 저녁 늦게 열면 지혜와 위로와 희망을 주는 작은 책이 거기에 있다. 피곤하고 졸리고 또 문득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는 곳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혜로운 책이다. 볼품없이 보여도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있는 가방이다.
때로는 여행이 내가 생각한 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나게도 되고 사고를 당하게도 된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고,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그리 화를 돋우는 일도 아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 여행하면서 어떨 때 유일한 장애가 되는 것은 여행의 리듬에 서로 합의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럴 때는 그 사람과 다시는 함께 여행하지 않으리라고 은밀한 분노를 숨기기도 한다. 그런 경우 간혹 중도에 함께 하는 여행을 그만둔 일도 있다. 그럴 때는 각자 자기 여행을 하는 것이 더 낫다. 여행은 평화롭게 진행되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경우가 되고 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나는 젊어서부터 혼자 여행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다소 위험하고 외롭기는 하지만, 인도에서, 네팔에서, 태국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집에 있는 것 같고 동네 사람들 같은 사람들,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을 받고, 겨울에는 흰색으로 덮이는 발코니와 지붕이 있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어우러져 있는 ‘우리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에서 그렇게 여행했다.
여행의 마음은 어떨까? 다른 감정에 계속 응답하는 것이다. 경이로움, 묵상, 발견, 미지의 것들과의 만남, 그리움, 유혹….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우리의 기억은 이미지, 소리, 향기, 말…몇 년이 흘러도 그 여행을 생각하기만 하면 다시 떠오르게 할 것들을 축적한다. 여행 중에 그리 많지는 않았을지라도 아주 인상적이었던 천사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샤르트르 대성당에 들어갈 때 그 성당 문 앞에서 어떤 천사가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사로잡아 순간 당황하며 그를 다시 보려 할 때 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아서 그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나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도 보았으므로 발현이라기보다는 만남이었다. 그리스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아래에서 테세이온 신전으로 갈 때 완전히 흰색 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한 천사가 내게 다가와 나를 만나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내게 남았던 그 향기를 저녁때까지 애써 보존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그를 뒤쫓아갔지만, 그는 그곳을 방문하던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어 어쩔 줄 몰라 했고, 다시 그를 볼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내가 천사들, 누가 보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던 천사들과 만났던 만남에 관해 얘기할 수 있지만, 천사들은 그렇게 오고 그렇게 떠나간다. 거의 찾기는 힘들지만 내 마음에 남아있는 그들의 얼굴, 그들의 눈빛, 그들의 우아함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찾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나는 조용히 앉아서 다시 볼 수는 없지만 내가 본 것을 똑똑히 새겨놓으려고 그림 그리듯이 수첩에 적어놓았다. 분명 나는 천사를 보았다.
여행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먹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것은 내가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나도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먹는 것을 나도 먹고, 그들이 머무르는 그 식탁에 나도 머무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캠핑은 그곳 사람들과 그 땅에 대한 모욕 같아서 별로 내키지 않는다. 캠핑은 내 등에 나의 집과 나의 음식, 그리고 나의 침구를 짊어지고 가서 내 집에서 자는 것 같아서 말이다. 캠핑카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어리석게 보인다.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그대로 내 등 뒤에 짊어지고 갈 때 거기에는 ‘시詩’가 없다. 여행은 숙소와 음식과 만남을 구하러 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짐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나에게 허락하는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필수적인 것으로 최소가 되어야 한다. 캠핑카는 달팽이처럼 집을 지고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팽이처럼 그렇게 느린 속도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다. 달팽이의 집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달팽이와 함께 자라나는 보호막이지 모든 필요한 것을 담아 등에 지고 운반하는 집이 아니다. 간혹 달팽이와 캠핑카를 견주어 말하는 것은 달팽이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
여행에서는 발이 멈추어진 곳에서 그곳의 전통적인 시간에 맞추어 그 동네 사람들이 먹기 위해 모인 자리, 소박한 자리,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의 식사 자리를 찾아 식당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반드시 현지인들이 먹는 보통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네팔에서 스파게티를 찾는다거나 모로코에서 라자냐를 먹으려 들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공부하려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를 내가 말해줄 수 있다』라는 그런 자세가 더 중요하다. 현지의 음식을 배우고 알고 선택하면서 그 음식이 어디에서 유래되었고, 인간의 어떤 수고를 통해 얻어지는 음식인지, 그러한 음식을 만드는 예술성과 지혜, 오랜 역사 안에서 그 음식이 어떻게 그곳의 전통 음식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음식은 그 음식을 둘러싸고 인간의 지식과 앎이 오랜 세월 공생한 결과이다. 홀에서 봉사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부엌을 들여다볼 수 있고 어떤 재료들을 사용하는지 배울 수 있으며 요리사를 만날 수 있으면 그것은 행운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지방에 가게 될 때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지역 시장에 나가 그곳의 식탁에 올라오는 현지 야채나 과일, 고기나 생선 등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참 유익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식탁에 앉게 되면 식전 음료를 한잔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나의 앞에 나온 음식의 색깔, 냄새를 즐기면서 마침내 한 입 먹을 때의 기쁨이란, 이때 그 음식은 그곳 사람들에게 매일 먹는 일상의 음식이겠지만 내게는 전혀 다른 새로움이 된다.
그렇게 식사가 천천히 이루어지면서 음식의 향을 발견하고, 색을 발견하며, 맛을 발견하면 나의 체험과 지혜가 풍요로워진다. 이는 장차 다가올 미래라기보다는 더 많은 추억과 경험을 살게 될 노년에 풍미를 더해주는 일이 된다. 파리의 골목에 놓인 작은 식탁, 요르단 사막의 바닥에 깔린 카펫, 자수刺繡가 새겨진 덴마크의 식탁보처럼 인간의 식탁은 항상 다르고 다양하다. 식탁은 항상 뭔가 의견이 모이는 곳, 함께하는 어우러짐이 있는 곳, 말들이 오가는 곳, 웃음이 터져 나오는 곳, 그리고 부드러운 사랑의 속삭임이 있는 곳이다. 또한, 잔이 있고 따를 술이 있으면 축제요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다. 술은 식사에서 인장印章과도 같은 것, 오로지 먹고 영양을 보충하고 허기를 면하자고만 있는 것이 식탁은 아니다. 술은 대화의 상징이다. 술은 그 식탁에 함께 하고 있지 않은 누군가를 불러내는 힘을 가진다. 술잔을 치켜들고 건배를 외칠 때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렇다고 술잔이 온갖 사랑의 종합이요 모든 사랑을 다 불러들이는 것은 아니다. 식탁 위의 술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이와 나누는 애환이며 사랑하는 이들과의 낭만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있다면 여행은 우리의 온갖 감각을 통해 깊은 의미를 주는 세상과 만남이 된다. 여행은 일단 뭔가를 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무엇인가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냄새와 향기, 소리와 소음의 교차 속에서 세상을 만지고 맛보는 것이다. 여행은 항상 감각을 통해 느끼며 걸어가는 것이고 우리 감각의 훈련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대끼며 몸으로 맞닿는 것이고, 눈으로는 빛을 만나며, 귀로는 어디쯤 있는지를 가늠하며, 접촉을 통해 따뜻함과 차가움을 느끼며, 땅에 닿는 발을 통해서는 내가 살아있음을 알고, 순간순간이 다르면서도 발자취를 남기지는 않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항상 떠나라, 여행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멀리 갈 수 있도록 짐은 항상 가볍게 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의 아버지는 내게 ‘배가 고프더라도 여행을 하고 책들을 사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여행은 잘하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의 큰 도서관이기도 하다.
이제 한참 나이 들어 늙은이가 된 지금에 아토스Athos 산에서 만난 어떤 은수자가 『앉아, 그리고 가!』라고 했던 조언을 잘 이해하게 된다. 앉기 전에 부디 부지런히 많은 여행을 할 수 있기를!(이탈리아 말에서 번역한 글, https://www.ilblogdienzobianchi.it/blog-detail/post/136578/il-viaggio, 엔조 비앙키, 20210807 *이미지-이탈리아 구글)
당장이라도 여행을 가고 싶다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직장마다 차이가 있지만, 요즘은 컴퓨터를 갖고 다니며 공간의 구애 없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주어진 시대에 더 마음의 눈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커진 것 같아요. 팬데믹 또한 영원히 사라진 건강한 남은 해가 되기를 기도 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