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들은 유럽 전역에서 끌고온 유대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너희들만이 살아갈 아름다운 고장이 보장되어 있다”면서 최소 필수품만을 소지하고 기차에 오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기차는 곧장 가스실의 대량 학살이 기다리고 있는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죽음의 열차였다. 기차가 달리는 도중 몇몇 선지자와 같은 분들은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기차임을 직감하였고, 할 수 있는 대로 기차에서 내려 탈출해야 한다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간과하였지만 이 말을 새겨들은 이들은 간간이 기차가 멈추어 설 때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세상살이도 이런 기차 위의 삶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복잡다단한 아우성 속에서 허황된 말마디와 단편적인 사실만을 믿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애써 자위하고 죽음을 향해 가다가 끝나고 마는 기차 위 같은 인생. 우리 인생이 그러한 죽음으로 모든 것을 가름짓고 만다면 인생은 너무 공허하다.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가 아니기 위해서는, 달리고 있는 기차 위에서 뛰어 내리듯 인생의 행로에서 뛰어내려 가끔씩이라도 우리는 우리가 잡고 있다가 놓았던 것, 구하고 찾았던 것보다 버린 것을 헤아려 보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 많은 이들이 손에 쥔 것만을 헤아리는 습성에 젖어있고, 그것이 우리의 우둔한 인생이라지만, 내가 가장 괜찮다고 믿는 길을 버리고 어느 순간 나의 철로 위에서 뛰어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선각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던가 말이다. 살아왔던 날들이 그저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하고 얻으려 한 삶의 연속이었음을 간파해 내고,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요체가 아니라 덜어내고 잃어가는 것, 그래서 점점 더 단출한 삶이 되어가도록 하는 것이 세월 가고 나이 먹어가는 것임을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인생길을 과감하게 수정하는 것은 애초에 조물주가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다던 내 위에, 살아 가면서 내가 덧씌워 놓았고 그릇된 허물과 부질없는 집착으로 내가 덕지덕지 누벼놓았던 나 위의 나를 벗어버리고, 고고학의 정성스러운 복원작업처럼 원래의 나를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물주가 하신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달리 해 놓았던 것들을 버려야 하고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만이고 인색함이며, 색정(色情)이고 분노이며, 탐욕이고 질투이며 게으름이다. 그런 의미로 나를 버린다는 것은 혐오스럽고 지저분하고 형편없다는 자괴지심에 빠질 수도 있게 하는 나 자신과 직면하는 길이다. 이를 겁내지 않고 맞대면하는 것은 실제의 나를 보지 않으려는 외면과 핑계, 애써 피하고 싶은 강박관념,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대로만 나를 보려는 잘못된 태도를 직면하는 길이다.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버리는 길은 궁극적으로 누군가 타인을 위해 내 자신을 버리는 길이 될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세상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가깝게 우리의 가족 누군가가 지금의 나를 위해 자신을 버려주었고, 아무도 모르는 이를 위해 자신을 버린 이들이 있었으며, 철저히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완성하여 갔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세상은 그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것이고, 희망을 지녀 살아갈 만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불확실로 보이는 미지를 향해 나를 던지는 것, 지금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것들, 익숙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 미지의 앞 날에 손을 내밀어 나를 내가 모르는 힘과 섭리가 이끌어 가도록 놓아두는 것, 그래서 내 존재의 신비를 깨우치고 나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진정으로 나를 버릴 수 없다면 공허한 인생의 허상과 실존의 그늘이 만들어 놓은 어둠에 홀로 남아 고립이라는 참담함을 맛볼 수밖에 없다. 나를 버리고, 정신 차려, 내가 짊어져야 할 내 몫을 내 어깨에 스스로 져야 한다.(20081025, 경향신문*이미지 출처-영문 구글)